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154
157화〉
주인 3
“주인님, 저 다녀올 때까지 가지 마세요.”
나미르는 시우를 향해 맑게 웃더니 시르케를 따라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마족이 갑자기 왜?’
그간 반마족 집단은 마족과 인간 모두를 경계하며 살아왔다.
마족은 순혈이 아니라며 반마족을 무시하고 업신여겼고, 인간들은 마족의 피가 섞여 더럽다며 반마족을 배척해 왔다.
그 때문에 반마족들은 그들의 눈을 피해 여기저기 숨고 피해 살다 이곳, 고비 사막이라는 척박한 땅에까지 와서도 지하에 숨어들어 살게 된 것이다.
나미르는 마족이란 이름을 듣고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노예처럼 부려지던 지난 악몽 같은 시간이 떠올랐다.
같은 생명체를 대해지는 게 아닌, 하나의 장난감으로 여겨져 박해받던 끔찍한 나날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시르케가 말한 장소로 달려갔다.
지하 도시 〈술트 오드〉의 하나밖에 없는 광장.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반마족이 모여 있어 소란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장 중앙의 ‘맹세의 탑’에 올라가 있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머리에 작은 뿔을 하나씩 달고 피부가 옅은 보랏빛으로 빛나는 존재들.
‘마족.’
그녀가 당도하자 몰려 있던 반마족들이 지하 도시의 주인인 나미르에게 길을 터 주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술트 오드〉의 경비대들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나미르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자, 맹세의 탑을 놀이 기구처럼 타고 놀던 마족들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라? 이게 누구서, 반마족의 여왕님 아니셔.”
“우히히히. 여왕 이브다. 우히히히.”
“머, 멍청아. 여, 여왕은 내, 내 거야.”
마족들은 일말의 존경심도 내보이지 않은 채 그녀를 희롱하듯 자기네들끼리 떠들었다.
“지금, 제가 다스리는 곳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이냐 물었습니다.”
나미르가 서슬 푸른 음성으로 그들을 다그쳤다.
그러자 날카로운 인상의 마족 하나가 ‘맹세의 탑’에서 내려오더니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아니~ 우리는 마족이셔. 그런데 감히 반마족 따위가 앞길을 막으니 어쩔 수 없으셔. 그렇지 않으셔?”
“애초에 반마족 따위 하고 엮이지 않고 싶으면 이곳에 오지 않으면 됩니다. 나가시죠.”
“우히히히. 여왕 이쁘다. 내 거다.”
나미르는 그들의 태도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감히 자신의 구역에 찾아와서는 이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자, 나미르. 주인님도 이곳에 계시잖아. 소란이 일지 않도록 참아야 해.’
만일 이곳에 시우가 있다는 것을 놈들이 알게 되면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제4계 마왕과 싸웠었고, 근래에는 두 악마를 죽인 마족의 적.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마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물론 시우는 두말없이 나미르와 반마족들을 도울 테지만, 언제까지고 시우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일.
나미르는 시우가 곤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문제였다.
단순한 무뢰배들이었다면 칼을 들이밀고 쫓아내면 될 일이었으나, 마족에게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
마족은 숫자도 적지 않았고 마왕이 있고, 악마가 있다.
인간들은 수많은 국가가 있고, 하이 랭커들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미스틸 테인’이라는 천외천의 존재들마저 있다.
그러나 반마족에겐?
고작해야 IZIZ가 있었지만, 그들도 뒷배라 일컫기엔 무리가 있었다.
IZIZ에 나미르와 함께 자란 반마족들이 몇 있어 〈술트 오드〉를 도와주는 것뿐이었지, 그들 전체가 반마족인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 나미르가 이끄는 반마족 집단은 고립무원의 상태로 다른 모두를 견제한 채 전전긍긍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여왕님~ 마족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너한텐 없으셔. 우리는 제2계 마왕님의 권속인 히카탄 님의 명령만 따르서.”
“〈술트 오드〉는 그 누구의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돌아가세요.”
나미르의 단호한 어조에 마족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라라~? 우리는 히카탄 님의 외교 사절로 온 거셔. 나는 사쿤, 얘네 둘은 17번과 22번이셔.”
이름을 가진 마족이란, 나름 그곳에서 높은 직위를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번호로 불린다는 건 아직 인정받지 못했단 의미였고.
나미르는 이름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가 어쭙잖은 위치가 아니란 것을 알았으니,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됐다.
그녀가 사쿤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건 이들이 섬기는 ‘히카탄’이라는 마족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었다.
나미르가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홀로 마족을 상대로 싸우기엔 역부족.
그녀는 대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이제 상황을 알겠으셔~?”
“그간 반마족을 업신여겨 놓고 이제 와 무슨 외교 사절이란 말이죠?”
이전에도 몇 번인가 마족이 찾아온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의 명을 듣고 온 자들이 아니었고, 단순히 반마족이란 존재를 궁금히 여겨 심심풀이로 방문한 것일 뿐이었다.
이번처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마족이 찾아온 적은 지하 도시 생성 이래 처음.
나미르의 질문을 들은 사쿤이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주 의미 있는 명령을 전달한다는 것처럼,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선포하듯 말했다.
“여왕님~ 히카탄 님이 이곳을 자신의 땅으로 삼을 계획이셔.”
“뭐라고요···?!”
나미르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수많은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제 반마족들은 마족을 섬길 자격을 갖춘 것이셔.”
사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우리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은 채, 말도 안 되는 억지인가요!”
나미르가 버럭 소리치며 그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사쿤은 그녀의 반응 따위는 별 가치가 없다는 듯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라라~? 여왕님, 반마족 같은 반푼이들에겐 영광스러운 일 아니셔? 드디어 우리 마족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해 준 것이셔. 이제 도망 다닐 필요 없이 마계에서 노예로 살면 되셔.”
“뭐··· 노예···라고요?”
“우히히히. 여왕 내 노예다. 나를 섬겨라.”
“머, 머, 멍청아! 여, 여왕은 내, 내 노예야!”
나미르는 노예라는 단어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사라졌던 지난 상처들이, 밀물처럼 그녀의 가슴팍에 들어차고 있었다.
“······.”
마족들의 희희낙락한 멸시와 조롱을 듣던 시르케가 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그녀는 자신을 거둬 준 나미르를 마족들이 모욕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주인님, 놈들을 죽여도 되겠습니까?”
“시르케···?”
당황한 나미르의 목소리가 만류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새에 17번과 22번이 시르케의 곁에 섰다.
“ㅡㅡ!!”
뻐어어어어억!!
17번의 주먹이 시르케의 복부에 직격했고, 그녀의 입에서 새빨간 핏물이 토해졌다.
“시르케!!”
“에이이ㅡ 여왕님은 가만히 있으셔.”
사쿤의 날카로운 손톱이 나미르의 목에 닿았다.
“이거 안 치우십니까?!”
“여왕님~~ 앞으로 노예로 살아가려면 이제부터 고분고분 살아가는 법을 배우셔. 마족에게 무기를 들이밀면 앞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셔.”
“사, 사, 사쿤 님! 이 여자 내, 내, 노예로 데려갈래요.”
“우히히. 내 노예다. 17번의 노예다.”
“여러분ㅡ 노예는 많이 있으셔. 걱정 안 해도 되셔.”
소매로 피를 훔쳐낸 시르케가 검을 휘둘렀다.
17번의 두꺼운 뱃살이 베이며 까만 피가 흘러나왔다.
“우히히. 노예가 나를 공격했다. 엄벌에 처한다.”
“이런, 이런ㅡ 아무래도 공개적인 처벌이 필요한 것이셔. 잡종 따위가 순혈 마족에게 겁도 없이 덤빈 것이셔.”
“경고합니다. 그녀에게 검을 거두게 할 테니, 당신들도 이만 물러가시죠.”
나미르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쿤은 그녀를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어라~~ 여왕은 이해 못한 것이셔? 너희들은 이 시간부터 우리의 노예이셔.”
사쿤이 손가락을 튕기자 22번의 몸이 바람처럼 사라지며 시르케의 뒤에 나타나 그녀의 양팔을 잘라 냈다.
“꼬아아아악!!”
“시르케에ㅡ!!”
마음속에 가득 고였던 아픈 상처가 바라지 않던 불안과 겹치며 선연한 현실을 만들어 낸다.
나미르는 입술이 찢어지도록 짓씹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그녀에게서 어마어마한 분노와 함께 들끓는 격이 뿜어져 나왔다.
쩌ㅡㅡㅡㅡㅡ엉!!
세 명의 마족이 거대한 격에 벌레처럼 짓눌러졌다.
“크흐윽!”
말로 형언키 어려울 만큼의 거센 분노와 살의.
바닥에 짓눌린 채 간신히 고개를 든 사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게 바로 반마족 여왕의 진정한 힘이셔?’
지하 도시의 주인 나미르.
세계 랭킹 3위에 빛나는 명실상부 최강의 하이 랭커.
말로만 들었을 땐 ‘잡종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직접 마주하고 보니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17번과 22번은 아예 고개조차 쳐들지 못하는 중이었다.
“감히 내 구역에 쳐들어와서, 내가 아끼는 권속의 팔을 잘라 내다니.”
서늘한 목소리가 사쿤의 목을 옥죄었다.
그는 나미르에게서 치솟는 살기에 몸을 떨면서도 잔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반마족은 강해 봤자 반마족이다.
누구도 그들의 편이 아니다.
사쿤은 자신의 마기를 끌어 올려 나미르의 격에 대응한 채 입을 열었다.
“흐흐흐~ 여왕님. 당신이 우리를 죽이면··· 여기 있는 반마족들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으셔···. 히카탄 님이 아니면··· 당신들은 마족도, 인간도 될 수 없으셔···.”
“······.”
“그리고~~ 당신 혼자서 마족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셔?”
나미르는 기세를 천천히 거둬들였다.
마음 같아선 사지를 다 잘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녀는 마족의 목을 베어 낼 수 없었다.
“어라라~~ 격을 거둔 것이셔? 잘 생각했으셔.”
사쿤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더니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미르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철써억!!
새빨간 자국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터지며 피가 흘렀다.
“이 빌어먹을 반마족이 미친 거셔~? 감히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미셔?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한 거셔.”
그리고는 나미르의 고운 백발을 힘껏 움켜쥐었다.
“아악!”
“닥치고 따라오셔~ 너부터 노예 교육을 시킬 것이셔.”
그 처연하고 굴욕적인 모습에도 다른 반마족들은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지금 놈들을 없애도, 또 다른 마족들이 쳐들어올 것이다.
그들의 수장인 나미르가 고분고분한데, 대체 누가 나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얼른 따라오셔~ 너는 오늘부로 내 전속 노예이셔.”
“야. 누가 내 거 함부로 만지래.”
그때 낯선 목소리가 사쿤의 옆에서 들렸다.
“어??”
서거억.
사과 자르는 소리와 함께 사쿤의 어깻죽지가 잘리며 새까만 피가 왈칵 쏟아졌다.
“으아아아아아악!!”
“주, 주인님?!”
나미르가 놀란 눈빛으로 시우를 불렀다.
사쿤이 잘린 어깻죽지를 부여잡더니 시우를 죽일 듯 노려봤다.
“너, 너는 뭐셔!!”
“나?”
놈의 말을 들은 시우는 나미르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더니 덤덤히 말했다.
“얘 보호자다.”
“뭐, 뭐셔?”
“얘한테 할 말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
“주, 주인님??”
나미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시우는 개의치 않고 주위를 먼저 두리번거렸다.
“대충 돌아가는 꼴이 이해되네. 피가 더러운 걸 보니 마족인가 보지?”
“뭐? 더, 더러운 피?!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셔? 이제 너는 죽은 것이셔!”
“하, 그래?”
한숨을 내쉰 시우가 놈의 턱을 잡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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