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238
242화〉
제안
시우는 그녀의 모습을 재빨리 훑었다.
헐렁헐렁한 옷에 천으로 만든 샌들, 기다랗고 까만 머리카락, 타오를 듯 붉은 눈.
“누군지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냐?”
시우가 그녀의 붉은 안광을 마주하며 또렷이 물었다.
“하, 그렇네? 내가 내 소개를 안 하고 산 지 하도 오래돼서. 나 ‘미스틸 테인’의 간다르바라고 한다. 네가 민시우냐?”
“그렇게 대단한 양반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오, 반갑다, 씨발.”
간다르바가 기세를 천천히 거두더니 시우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시우는 그녀에게 적의가 없는 것을 깨달은 즉시 구현했던 샷건과 마력을 갈무리했고, 최대수와 나미르 역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을 정리했다.
간다르바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할까?”
“···대체 ‘미스틸 테인’이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뭔데? 설마 얼굴이나 보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시우는 간다르바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되물었다.
그녀는 시우의 손을 잡고 조몰락거리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어? 그냥 얼굴 궁금해서 왔는데.”
“······.”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뿅 갔냐?”
시우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최대수를 바라봤다.
최대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간다르바는 털털하고 잔머리 굴리는 성격이 아니라고는 하더군. 아마 정말 네가 궁금해서 온 게 맞을 거다.”
“뭐야? ‘미스틸 테인’이 구라라도 칠 줄 알았어? 누나 못 믿어?”
“댁을 언제 봤다고 믿어?”
시우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대꾸했다.
“하지만 ‘미스틸 테인’인데?”
“마력을 풀풀 피워 올리며 창문을 다 깨부수고 들어오기도 하셨죠.”
옆에 있던 나미르가 간다르바를 보며 말했다.
“아··· 그건···. 강한 놈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흥분돼서···. 흐하하! 미안, 미안! 어이, 최대수! 망가진 건 내가 물어 주도록 할게.”
간다르바는 겸연쩍은 목소리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했다.
시우는 그런 간다르바의 모습을 지그시 관찰하며 어떤 ‘모델’과 비교해 보았다.
바로 정민준을 죽였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VIP보다 더 위의 존재.
카이세가 죽을 당시에, 그는 분명히 〈판데모니엄〉의 1위계가 ‘미스틸 테인’이라고 했다.
시우는 자신의 얼굴이 궁금하단 이유로 ‘간다르바’가 이곳에 쳐들어온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시우의 과거사를 알고 있는 배후가 온 것이라면 딱 들어맞는 상황이지만ㅡ 반대로 얘기하자면 그것 또한 너무 뻔한 추측.
‘골치가 아프지만, 아무래도 간다르바는 아니겠군.’
놈은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만약 직접 나서는 걸 좋아했다면 정민준을 그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의뢰해서 죽이진 않았을 터.
스스로 나서서 죽일 수도 있고, 혹은 〈판데모니엄〉 내부에 있는 조직원에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대한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암살을 의뢰했으며, 타살이 아닌 실종인 것처럼 유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정황으로 봤을 때 간다르바와는 성향이 많이 다른 인물.
시우는 우선 그녀를 향한 의심부터 풀기로 했다.
물론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나, 그녀가 마력을 사용하는 과감성이나 저돌성, 몸의 움직임, 말투 등을 분석해 보면 간다르바는 간계를 꾸미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거의 볼크나 프레와 동급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
‘이런 식으로 12명을 전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간다르바 같은 경우엔 성격이 행동에 드러나는 편이라 읽기 쉬워 판단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
그러나 고수를 넘어 초고수의 경지에 진입한 자들은 아무리 시우라 할지라도 속내를 알아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소거법이 그나마 확실하다고 할 수 있으니, 간다르바를 배제하는 게 수사에 도움이 될 터.
아마 마지막에 가서는 두세 명이 후보로 남아 고민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시우는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간다르바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웃어?”
“아니, 내 격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놈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도망갈 정도의 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흐하하! 역시 마음에 든단 말이야! 케르베로스, 그 씹탱이보다는 훨씬 좋아!”
간다르바는 최대수가 건네준 양주를 병째 들이켜며 붉은 눈에 이채를 빛냈다.
“너, ‘미스틸 테인’에 들어와라.”
그녀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시우는 시선을 흘깃 돌려 최대수를 바라봤다.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도 있는 듯했다.
“그걸 너 혼자 정해도 되는 거냐?”
“응? 아니, 나 혼자 정하는 건 아니고. 이래 봬도 우리도 나름 회의 같은 걸 한다고. 그런데 저번 회의에서 네 이야기가 나왔거든.”
간다르바가 시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했어. 궁금하던 찰나 내가 직접 온 거고. 어때? ‘미스틸 테인’ 탐나지 않아?”
“만약에 내가 되면 최대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음, 글쎄? 한 국가에서 두 명의 ‘미스틸 테인’을 뽑는 걸 싫어하는 멤버들이 있더라고. 나는 상관없는데, 아마 다시 투표하지 않을까?”
간다르바는 배시시 웃으며 양주를 다시 쭉 들이켰다.
시우는 그녀의 천하태평인 모습을 보며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큰 변수.
옆을 바라보니 최대수 역시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스틸 테인’.
그들은 국가를 버리고, 소속을 버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름까지도 버린 자들이다.
그들 중에서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헌터 이명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사용하는 스킬에서 이름을 따와 이명처럼 새롭게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 시우를 바라보고 있는 간다르바가 대표적인 예시.
그녀는 본명이 따로 있었지만, ‘미스틸 테인’으로 뽑히고 난 뒤 자신의 스킬에서 ‘간다르바’를 따와 본인의 새로운 이름으로 지었다.
이런 식으로 ‘미스틸 테인’ 멤버 모두 국가와 이름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뭘 고민해, 민시우? 원하는 건 세계 정부에서 뭐든 줘. 돈이든, 집이든, 음식이든, 명품이든, 뭐든.”
“그걸 받는 대가로 ‘미스틸 테인’이 하는 게 뭔데?”
“우린 일종의 수호자가 되는 거지. 커다란 범지구적 재앙이 닥쳤을 때 나서서 적들을 개작살ㅡ!”
“그럼 S급 게이트가 터졌을 땐 왜 안 도와줬지?”
“어···.”
시우의 질문에 간다르바는 볼을 긁적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한 감도 있지만, 정보는 얻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얻어 둬야 한다.
“사실 그때 가자고 했던 사람들도 있는데, 몇 명이 반대했었거든. 그렇게 의견이 나뉘다가 투표를 하자고 했고, 결국 안 됐던 걸로 기억해.”
“반대했던 이유가 뭐였는데?”
“음ㅡ ‘상위 랭커들도 있는데 우리가 너무 간섭하면 좋지 않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도와주고, 어느 나라는 도와주지 않으면 형평성에 어긋 난다.’ 이런 의견이었던 것 같아.”
그럴싸한 이야기긴 하네.
시우는 어떤 놈의 주둥아리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설득력이 높은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미스틸 테인’의 뒤틀린 정체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버리고, 집단을 버리고, 이름을 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러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한 국가에서 두 명의 ‘미스틸 테인’을 배출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어차피 국가에 소속된 자들이 아닌데, 저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어느 나라는 도와주고, 어느 나라는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범지구적 재앙에 맞서는데 나라를 왜 따진단 말인가.
시우는 이런 얘기를 따지고픈 마음이 들었으나, 어차피 눈앞에 있는 상대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간다르바였기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 ‘미스틸 테인’에 어울리는 각성자일지도 모른다.
“얘기를 들어 보니 그곳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겠군. 멤버들 간에는 서로 간섭하거나 트러블을 만들면 안 되겠지?”
“오ㅡ! 너 생각보다 똑똑하다! 맞아, ‘미스틸 테인’ 안에 규칙이 딱 하나 있어. 전투 금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네. 인재가 줄면 안 되니.”
“민시우! 그래서 ‘미스틸 테인’에 들어올래?”
시우는 더 고민할 필요도 없겠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니, 거절하지.”
“어ㅡ? 왜??”
“주인님??”
옆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던 나미르마저도 놀랐는지 시우를 불렀다.
“서로 못 싸운다며? 내 헌터 이명 뭔지 몰라? ‘미친개’야.”
“어··· 그렇지만··· 우리 모임 들어오면 엄청 좋은데···? 집도 엄청 좋고, 밥도 잘 나오고···.”
“난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리고 싸울 때마다 투표해야 하면 스트레스받아서 어떻게 사냐.”
간다르바는 시우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더 꺼내고 싶었지만, 딱히 더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 같은 애가 있어야 너희들을 견제하지 않겠어?”
“우리를 왜 견제해···?”
“아무튼 만나서 즐거웠다. 다음 ‘미스틸 테인’은 최대수로 하라고 해. 얘는 할 마음 있을 테니까.”
시우는 순진한 그녀의 의문을 뒤로한 채 나미르와 함께 대통령실을 빠져나왔다.
“주인님. 대단히 좋은 제안 같았는데, 왜 거절하신 건가요?”
무척이나 궁금했던 나미르가 시우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저런 제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시우의 실력이라면 진작 제안이 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받은 게 어디인가.
그녀는 시우가 저 제안에 당연히 응하리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스포트라이트를 넘어 어마어마한 권력과 위세가 생기는 자리였다.
분명 실보다 득이 많은 자리임이 분명할 텐데···.
그 순간 시우가 입을 열었다.
“난 버리고 싶지 않았어도 억지로 끌려가서 100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살아왔잖아.”
“그렇죠···?”
“그런데 말뿐이라 할지라도, 지금 다시 얻은 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거든. 되찾기 위해 싸운 100년인데, 고작 이름값 좀 높이자고 또 버린다는 게 말이나 돼?”
“···그렇군요.”
나미르는 시우의 대답에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시우를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시우는 항상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이었다.
***
– 여보세요? 나 간다르바인데.
“네. 한국 여행은 재밌게 잘하고 있어요?”
바바 야가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간다르바의 음성에 대꾸했다.
– 어! 날씨도 좋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있어. 무엇보다 케르베로스 새끼 얼굴 안 보니까 너무 좋다.
“두 분은 사이가 정말 안 좋군요. 제안하러 갔던 건 어떻게 됐나요? 최대수와 민시우는 만났어요?”
– 만났는데, 민시우 엄청 마음에 들더라!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아. 내가 마력을 뿜었는데 오히려 맞대응하더라고.
“어머나. 혹시 싸운 건··· 아니죠?”
– 아니야, 아니야. 그냥 맛만 봤어! 흐하하.
“그래서 제안은요?”
바바 야가가 고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간다르바는 당황한 것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게··· 거절했어.
” 거절이요?”
– 어. 자기는 싫대. 내가 좋다고 몇 번이나 꼬셨는데, 안 넘어오더라. 마음에 들었는데···.
“그렇군요. 뭐라면서 거절하던가요?”
– 음··· 자기 같은 사람이 있어야 우리를 견제하지 않겠냐고 하던데?
“그렇군요. 수고했어요, 간다르바. 즐기다가 천천히 돌아와요.”
통화를 끝낸 바바 야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더니 쿡쿡거리며 웃었다.
“어머나. 재밌는 사람이네요, 민시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