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25
25화〉
권위의 역전
노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 자세엔 거짓이나 속임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복종.
최대수가 대통령이 되어 민시우에 대한 자료를 다 말소한 지금,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헌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은 못 알아보고 기술을 알아본 것이지만.
“광··· 민시우 님, 저 하룻강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혹시 살려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노인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죽어 가는 볼크를 부탁했다.
“이 늙은이의 작은 바람입니다. 당신의 존귀한 능력에서 손톱만 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 고개 들어.”
그 태도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어차피 죽이려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시우는 그를 다시 회복시켰다.
[라이프 스틸]로 강탈한 생명력을 다시 집어넣는다.살집이 다시 차오르며 얼굴의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죽어 가는 것 같던 숨소리가 점차 편안해진다.
그렇게 미라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
“······커······ 커헉!”
볼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침과 함께 일어났다.
희미하고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는 노인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누구길래 영감이······.”
그는 노인을 향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노인은 조직에서도 꽤 높은 간부급에 가까웠다.
비록 같은 조직원이긴 해도, 음지에 오래 머물며 1세대 헌터로서 살아온 그의 강함을 모두가 존중한 덕이다.
조직의 관리자들도 노인에겐 나름 예를 갖추며 대했고, 건방을 좀 떨긴 했어도 볼크 같은 안하무인조차 노인의 명령에는 순순히 따랐다.
‘삼 좆이 뭐길래 시발···.’
노인은 시우의 다음 명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릎 꿇은 채 공손히 있었다.
“이 새끼.”
시우가 다시 사진을 들어 보였다.
“본 적 있어?”
노인은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할 때 나타나는 몸의 신호.
미세한 마력의 꿀렁거림.
시우는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흘깃거리던 볼크가 옆에서 중재하듯 참견했다.
“저기···요. 우리 진짜 모른다니까···요. 뒷세계 조직이 한두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을 넘기 바로 전이다.
“······.”
시우는 호흡을 골랐다.
그 모습을 오해한 볼크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 낯짝 여기저기 널렸어요. 몇 번이나 댁한테 죽을 뻔하고도 설마 내가 구라를 치겠습니까. 이 영감님도 모르······.”
선을 조금 넘었다.
“야.”
날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
예기 가득한 시퍼런 안광.
바람도 불지 않건만 풀과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며 두려움에 몸을 떤다.
공기의 흐름과 온도가 뒤바뀌며, 처음으로, 시우에게서 미약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기세는 다른 헌터들과는 격과 급이 다른 것이었으니.
송곳처럼 찔러오는 압박에 그들은 숨도 쉴 수 없었다.
“너한테 볼일 없으니까.”
얼굴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얼얼했다.
“아가리 닥쳐.”
볼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묵직한 기운에 눈물과 침을 질질 흘렸다.
능력도, 스킬도, 마력도 아닌 단순한 살기.
“사지를 찢어 개밥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볼크는 볼썽사나워진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속에선 조직의 두려움과 시우에 대한 두려움이 비등비등했었다.
오히려 조직의 타깃이 되는 것보단, 이 남자에게 계속 거짓을 고백해서 살아남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감의 편에 서서 말을 대신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자 실수였다.
단지 0.5초 정도 느꼈던 살기로 인해 모든 기준이 뒤바뀌었다.
“어이, 영감.”
“예.”
“기회는 한 번이다.”
노인의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예.”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거짓은 권하지 않는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이 되고 싶지 않다면.”
시우의 말에 한 치의 고민이나 연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한마디의 대답으로 자신과 볼크의 목숨이 달라질 것이다.
“누구냐.”
노인은 두 눈을 감았다.
조직에 몸담은 지 어언 15년.
그는 그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조직을 팔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배신자를 찾아가 처리하는 히트맨의 역할을 해 왔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조차,
죽음을 아우르는 공포를 이기진 못했다.
‘하물며.’
대한민국 헌터계의 거목,
‘삼존’에 대한 굴복이었다.
같은 1세대로써 존경해 마지않던 존재.
노인은 본능에 끌리는 대로,
“사진 속 인물은 저희 조직원입니다. 〈베스티아〉의 사수귀 중 하나인···.”
시우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며,
“‘Black mamba’라고 합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 벅차오르는 경외심을 마음껏 느꼈다.
“블랙맘바라······.”
아프리카 독사의 이름.
시우는 그 이명을 마음으로 곱씹었다.
드디어 제자의 죽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수귀는 뭐야?”
“현재 〈베스티아〉 조직에서 가장 실력 좋은 네 명의 킬러를 뜻합니다. 저나 저 하룻강아지보다는 강한 놈들입죠.”
물론 강하겠지. 그러니 민준이가 당했을 테고.
“그래서 그 뱀 새끼는 어디 있지?”
당장 찢어 죽이러 갈 것 같은 모습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거짓이 아니라, 저희는 서로의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 못 찾는다는 건가?”
“먼저 찾으러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는 것’은 가능하지요.”
“······회담이 있구나?”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조직 회담입니다.”
“날짜는?”
“1주 뒤입니다.”
“장소는?”
시우의 질문에 노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소를 말씀드릴 터이니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뭔데. 들어 보고 결정한다.”
시우는 쓸데없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는 어차피 비밀을 발설한 대가로 죽을 목숨입니다. 「침묵의 서약」이라는 걸 통해 조직에서도 이미 타깃이 되었을 터.”
“······”
“저희를 종자로 받아들여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조직의 누군가는 죽이지 말라는 둥 헛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시우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고심에 빠졌다.
이들이 조직에 쫓겨 죽임을 당하는 것은 사실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잡혀서도 안 됐다.
그걸 고려하자면 당분간 데리고 다니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좋아. 받아들이지.”
시우는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진범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감사합니다! 삼존께 폐가 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너는 할 마음 있는 거지?”
시우는 아직도 떨고 있는 볼크를 보며 물었다.
“저, 저는······.”
“한다고 하거라. 이 썩을 하룻강아지야! 방금 우리 목숨이 건져진 것을 모르겠느냐!!”
노인의 윽박에 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엎드려 절받기지만 하면 됐고.”
“만약 부족하시다면 저희들이 「마나의 맹세」라도 하겠습니다.”
마나의 맹세.
침묵의 서약과 비슷하지만, 스킬로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나에 대고 하는 맹세이다.
그만큼 효과도 좋지만 리스크도 커서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 방법.
마나에 대한 맹세를 어기게 되면 마나에게 거부당해 단전이 막혀 버리게 된다.
“아니, 그런 식으로 구속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보다 영감 이름은?”
“저는 적귀라 합니다. 바라건대, 주인의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노인, 즉, 적귀는 벅차오르는 감동과 강자를 보았다는 설렘에 온몸이 떨렸다.
그만큼 1세대 헌터에게 있어 민시우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저, 저는··· 셰리 볼크···.”
“알아 인마.”
시우는 볼크의 머리를 탁, 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호송 차량이 오지 않자 교도소 측에서 신고한 모양이다.
이제 저쪽을 마무리해야겠군.
“이제부터 적귀와 볼크, 너희는 내 수족이자 내 보호 아래다. 내게 바친 너희 목숨은 이제부터 내 것이다.”
조직이 없애러 온다 할지라도 자신이 보호해 주겠다는 일종의 주종 서약.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그 같은 강함을 유지한 존재뿐이다.
적귀와 볼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시우는 그들을 바라보다 곧 다음 수를 머릿속으로 그려 내었다.
***
황정구는 눈물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쌓인 서류를 훑었다.
그저 윗선의 지시로 HMCS 직원 하나를 보냈을 뿐이다.
마침 민시우가 간다고 요청했고, 당연히 걱정할 게 없으리라 판단했다.
해서 마음을 놓고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전화가 왔다.
– 호송차에 있던 죄수가 도망쳤습니다. 전투 흔적도 크고 조사할 것도 많아서 와 보셔야겠는데요.
설마 광견이 탔는데 그럴 리가.
에이, 말도 안 되지.
그렇게 도착한 교도소 부소장실엔 민시우가 매우 ‘멀쩡한 모습’으로 있었다.
“어, 도망치려는 거 붙잡고 싸우다 내가 졌어. 개처맞았네.”
민시우는 팔짱을 낀 채 당당히 말했다.
교도소 부소장도, 옆에서 감사를 진행하던 교도소 직원도, 현재 수사를 담당하는 수사관도, 그 모습을 보며 서류를 작성하던 황정구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할 거면 차라리 진정성 있게라도 하지.
이건 속일 생각조차 없는 뻔뻔 그 자체였다.
“그··· 바디캠 녹화는 왜 안 하셨는지···?”
“망가졌던데.”
“······확인해 보니 멀쩡하던데요?”
“그래? 그렇다면 미안.”
“······.”
황정구는 포기한 듯 찬물을 들이켰다.
예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났다.
광견인 걸 알고 그에게 따질 수 있는 헌터가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참자, 참아.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야. 너희 쪽에서 놓쳤는데 너무 책임감 없이 말하는 거 아냐?”
그러나 교도소 부소장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똥을 쌌으면 치울 줄도 알아야지, 호송관이 죄수를 놓치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 새끼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알기나 해?”
그는 테이블을 쳐 가며 열을 올렸다.
‘이런 병신들 때문에 소장 진급 못 하기만 해 봐라.’
부소장은 자기 교도소 측의 잘못은 최대한 줄이고, 모든 실수와 책임과 죄수의 도망을 HMCS 측에 떠넘길 요량이었다.
“어이, 황정구 팀장. 우리가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이런 시시껄렁한 것 가지고 계속 말싸움 해야 돼?!”
“아닙니다. 샅샅이 수색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HMCS 물이 올랐다더니 어쩌니 하면서 약을 팔아먹을 때부터 알아봤어. 씻팔 백건호 이 양반이 갑자기 왜 그러나 했는데. 써 보니 아주 엉망이구먼.”
시우는 부소장이란 자를 무감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부패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안하무인과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 형식의 술수.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우는 이런 자들을 극도로 경멸했다.
정작 할 수 있는 건 떠들 줄만 아는 아가리뿐.
그들이 손수 나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너 요즘 잘나가는 신입 HMCS 헌터 새끼지?”
부소장은 사소한 건수라도 상관없었다.
“하필 카메라가 망가져? 다 놓친 것 같으니 꺼 놨겠지. 개새야.”
자고로 이득은 윗사람이, 책임은 아랫사람이 지는 법.
“걔가 따로 조직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거 알아보려고 이감을 준비시킨 건데, 하필이면 너 같은 띨띨이가 일을 맡아서는.”
부소장은 자신의 말에 대꾸조차 못 하는 신입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이 새끼가 다 뒤집어쓰는 거다.
어차피 ‘그쪽’에서는 신입 헌터 한 명 정도만 호송관으로 하길 바랐다.
시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말석에 앉아 있음에도 그의 태도는 자못 시건방지며 당당했다.
“정구야.”
“예, 선배님.”
얼마 전부터 황정구는 시우를 ‘선배’라 부르기 시작했다.
직급이 낮은사람에게 존대하려니 떠오르는 호칭이 ‘형’이랑 ‘선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죄수 이감하는데 호송관 몇 명이나 붙냐.”
“기본적으로 넷에서 다섯 명은 붙어서 갑니다. 특히 상위 교도소로 이감되는 경우엔 최대 열 명까지도 붙습니다.”
“근데 왜 볼크는 운전하는 놈 빼고 딸랑 나 하나였지?”
“그렇게 요청이 왔습니다··· 이 교도소에서.”
“그렇다는데?”
시우의 한겨울 서릿발 같은 눈매가 부소장의 전신을 훑었다.
그저 시선이었을 뿐이거늘.
부소장은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 같은 살기를 느꼈다.
“뭐··· 뭐, 그래서 어쩌라고! 애, 애초에 그깟 놈 하나 놓친 네 잘못 아닌가?!”
그는 당황한 나머지 시우가 반말하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시우는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조금 전에는 ‘그 새끼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알기나 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건···. 어쨌든 책임 소재는 분명히ㅡ!”
“볼크 말로는.”
시우가 말을 끊었다.
“암살 조직에서 교도소 윗선에 로비를 했다던데.”
그의 표정은
“호송관을 ‘한 명’으로 할 것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했으며,
“하여 HMCS에서는.”
조소가 가득했다.
“도망친 죄수와 교도소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려 하는데.”
부소장은 들고 있던 컵을 덜덜 떨었다.
이게, 이게 아닌데.
“어떠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