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280
284화〉
거래2
며칠 뒤.
서른에 가까운 하급 악마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이따금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마기 짙은 안광으로 크라켄과 멀린을 번갈아 노려봤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기세와 날카로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왕께서 너희의 지시에 따르라고 하더군.』
대표로 보이는 악마가 앞으로 나서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악마와 마족은 협정을 맺었을 뿐, 서로 관여하거나 명령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악마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그들은 크라켄도 크라켄이지만 멀린을 향해 노골적인 살기를 보내며 마기를 스멀스멀 피워 올렸다.
원인은 바로 생 제르맹.
그가 악마를 죽여 심장을 가공해 실험체를 조종했단 것이 들통난 것이다.
그 때문에 악마들은 〈판데모니엄〉에게 흉악한 적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악마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며 〈판데모니엄〉에 쳐들어가 그들을 전부 죽이고자 했지만, 상위 악마들의 제지로 그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물론 하위 악마의 실력으로 멀린을 이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하위 악마들의 대표인 사브나크라고 한다. 우리는 이번 일이 몹시 못마땅한 상황이야. 정확히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사브나크가 알래스카 불곰 같은 거체를 앞세우며 고압적인 자세로 물었다.
“간단한 일이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하는 데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협조해 주면 좋겠다.”
크라켄이 쇳소리 나는 낮은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상하군. 〈판데모니엄〉이나 마족을 쓰면 될 일 아닌가. 왜 우리 악마들에게 손을 빌리려 하지?』
“〈판데모니엄〉은 이제 남은 인원이 없다. 그리고 우리 마족은 날개를 가진 자가 없고, 인류와 맺은 평화 조약 때문에 아직은 활동하기가 어렵다.”
크라켄의 설명은 단순하지만 따지고 들 틈이 없는 말들이었다.
애초에 인류와 맺은 평화 조약은 마족하고 연관된 것이고, 악마들은 그 조약에서 빠져 있었으니.
악마들은 마족도 아니었거니와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마족과 악마가 다르다는 걸 잘 알지 못했다.
크라켄의 설명을 들은 사브나크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주면 된다.”
『그게 전부인가?』
“여기 있는 멀린이 당신들의 몸에 특별한 술식을 그려 넣을 거다. 당신들은 목표한 곳에 도착해 마기로 술식을 운용해 주기만 하면 된다.”
크라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악마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저 〈판데모니엄〉의 말을 우리보고 믿으란 것이냐?』
사브나크의 성난 노기가 저릿저릿하게 주변을 물들였다.
당장에라도 멀린의 목을 비틀어 땅바닥에 핏물을 흩뿌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
“멀린은 연구에 미쳤던 생 제르맹이 아니다. 그놈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 같은 짓을 저질렀다.”
『상관없다. 어차피 마족과 〈판데모니엄〉은 한통속이잖나!』
사브나크는 새까만 안광을 번뜩이며 멀린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이번 일은 악마의 왕이 허락한 일인데, 당신들은 그걸 의심하는 건가?”
『······.』
악마들은 자신들의 왕을 거론하자 한발 물러서며 기세를 거두었다.
평소에는 제멋대로 활동하고 서로 협동을 안 하는 악마였지만, 대악마의 명령만큼은 절대적이었다.
멀린은 그 틈에 재빨리 스태프를 들어 그들의 가슴에 술식을 하나하나 새기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나 술식을 새기는 것까지 방해하진 않았다.
“이걸 받으십시오.”
술식을 다 새긴 멀린이 악마들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건넸다.
『이게 뭐지?』
“핸드폰입 니다.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멀린은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을 실행했다.
“이제 각자 찍힌 목표 지점으로 향해 날아가면 됩니다.”
『정말 가서 술식만 마기로 발동시키면 되는 게 맞지?』
한 악마가 멀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지시.
“확실합니다.”
『만약 이게 거짓이라면, 그땐 돌아와 네 살점과 내장을 갖고 연회를 열어 주마.』
사브나크가 멀린의 목덜미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기다란 혓바닥으로 그의 목과 귀를 핥았다.
“그러시지요.”
멀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에게 대답했다.
사브나크는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곧장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높이 날았고, 뒤이어 그를 따라 다른 악마들 또한 날개를 박차고 날았다.
멀린은 악마들이 다 날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허공에 홀로그램 지도 하나를 띄웠다.
지도 위로는 현재 날아가고 있는 악마들의 GPS 좌표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악마들의 비행 속도와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이 마음먹고 빠르게 날면 마하 10에 가까운 속도가 찍힌다고 하니, 그 정도면 무인 실험용 초음속기 X-43A의 빠르기와 맞먹는 것.
멀린은 악마들이 다 도작하는 순간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나중에 메피스토펠레스에게는 뭐라고 변명할 셈이냐?”
그때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크라켄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하지만 대악마께서도 어림짐작으로 다 알고 계신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그게 대답이 되지는 않을 거란 걸 알고는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크라켄이시여.”
아리송한 문답이 이어지던 와중, 모든 GPS 좌표가 원하던 목표 좌표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도착한 악마들은 마기를 흩뿌리며 술식을 가동시키려 애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한 소리일 뿐.
실제로 멀린이 새긴 것은 원거리 술식이었고, 그건 그만이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멀린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꽂더니 자신이 지닌 모든 마력을 내뿜었다.
그의 마력과 멀리 떨어진 술식이 공명한다.
***
사브나크는 가슴팍에 새긴 술식이 빛을 뿜으며 움직이자 잠시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경계심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퍼거어ㅡㅡㅡㅡ억!!
사브나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에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입으로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술식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의 심장을 도려내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이··· 개···같···!』
사브나크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가슴팍을 움켜쥐며 입으로 핏물을 질질 흘려 내고는 고꾸라졌다.
꺼내어진 심장이 술식과 조응한다.
새까만 마기가 마력과 뒤엉키며 이윽고 하나의 게이트를 이루었다.
***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에 리버스 게이트가 발생했다.
지금 발견된 숫자만 무려 22건.
상대적으로 정보가 늦거나 폐쇄된 지역에서 발생한 것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특히 이번 발생 지역은 ‘미스틸 테인’을 배출하지 못한 국가나 초하이 랭커를 소유하지 못한 나라가 대부분이라 위태로울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각 게이트의 난도는 추정치 S급.
〈HMCS 국제 총본부〉와 〈세계 헌터 협회〉에 끊임없는 도움 요청이 들어왔다.
게이트가 발생한 국가들은 각 인접국에도 지원을 부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추정치 S급의 리버스 게이트가 발생한 마당에 인접국에서 자국의 헌터들을 보내 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온 경우는 지역마다 상이했다.
어떤 곳은 아직 한 마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고, 어떤 곳은 벌써 열 마리 가까이 나와 인근 동네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얼른 대응하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위기로 번질 초대형 악재가 터진 셈이다.
멀린은 바바 야가의 동의를 얻어 ‘미스틸 테인’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스틸 테인’의 긴급회의를 열 때는 한 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대체로 멀린이 발의하고는 했는데 이번에 소집한 목적은 단순했다.
시간 끌기.
‘미스틸 테인’은 딱히 누구를 우두머리라고 부를 수 없는 가루 같은 조직이다.
한데 모으면 뭉쳐 있는 것 같지만, 작은 콧김에도 여기저기 흩어질 수 있는 그런 가루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멀린이 은근슬쩍 ‘미스틸 테인’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무도 우두머리 행세를 하지 않고, 아무도 나시지 않기에 연로한 노인이란 점을 앞세워 회의도 진행하고 의견도 피력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말에 따라 주고는 했다.
거기다 바바 야가나 생 제르맹이 슬쩍 동조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동의하는 터라 운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들이 최고라 생각하며 타성에 젖어 사는 것들이니 가능했던 일.
그러나 요즘의 ‘미스틸 테인’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곳에서 멀린의 말은 먹힐 틈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고, 심지어는 〈판데모니엄〉의 뿌리가 ‘미스틸 테인’ 내부에 있다는 것마저 알게 되었다.
현재 ‘미스틸 테인’의 우두머리는 민시우다.
본인들은 전혀 자각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할 수 있지만, 멀린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미스틸 테인’ 내에 민시우의 사람이 는 덕분이 컸다.
최대수, 간다르바, 로키.
이미 생 제르맹이 죽은 탓에 수적으로도 〈판데모니엄〉이 열세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선수 필승. 민시우가 개입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작전을 실행한다.’
따라서 멀린은 각오를 다잡고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차원의 문이 완전히 열리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상황.
그때까지 이 게이트 사건을 지지부진하게 끌어 세계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을 셈이었다.
게이트 발생 지역을 ‘미스틸 테인’을 배출하지 않은 국가 위주로 한 것도 그 이유였다.
S급 난도의 리버스 게이트는 쉽게 클리어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터라 각 국가들은 서로 병력을 보내지 않으려 할 테고, 그런 상황에서 ‘미스틸 테인’ 회의를 질질 끌어 사고 수습을 최대한 늦춰 일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함.
멀린은 흠족한 미소를 지으며 휴게실에 앉아 다른 멤버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바바 야가가 들어왔다.
“어머나, 일찍 오셨네요?”
“내가 발의한 긴급회의이니 빨리 와서 기다려야지.”
“요즘 바빠 보이시더니, 이런 걸 준비할 줄은 몰랐네요.”
“어허. 입조심하게.”
멀린이 그녀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진작 다 모이고도 남았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멀린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간다르바와 아누비스.
그리고 반갑지 않은 얼굴이 하나 섞여 있었다.
“민시우 헌터···. 이건 ‘미스틸 테인’ 긴급회의인데 왜 자네가 여기에 참석하는 것인가.”
멀린이 노골적으로 불편하단 기색을 내비쳤다.
시우는 앉아 있는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멀린. 그리고 바바 야가.”
“후후후. 저도 오랜만이에요, 시우 헌터.”
바바 야가는 붉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희 회의에 참석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물론이죠. 저도 바쁜 몸이거든요.”
“미안하지만, 민시우 헌터. 자네의 볼일은 ‘미스틸 테인’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해 주게나. 지금 게이트 문제로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닌가.”
멀린의 말에 시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웃는 것인가?”
“그 문제는 굳이 회의까지 할 필요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멀린이 의아하단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시우는 별거 아니란 듯이 천연덕스럽게 멀린을 보며 대꾸했다.
“다른 ‘미스틸 테인’ 멤버는 이미 제 명령으로 다 게이트에 출동했거든요.”
“뭐, 뭐라!!”
멀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우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