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324
329화〉
또 다른 세상2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작 삼십 년도 채 살지 않은 곳과 일백 년을 넘게 산 곳을 비교하면.
어디가 고향일까.
시간상으로만 따져도 무려 네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가득 쌓이는 추억의 무게와 기억의 총량도 일백 년의 기간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단순히 먼저 살았거나 태어난 곳인 걸 따져 고향이라 칭한다면, 지구는 고향이 맞을 거다.
무언가 아련한 감각과 절로 드는 마음의 울렁거림을 생각하자면, 그것 또한 지구가 고향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시우는 새까만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다.
그를 스치고 지나는 유성우들이 보인다.
그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빠르게 앞서는 것일까.
고향에 대해 어렴풋이 기준을 세우려는 찰나, 마지막 조건이 파문처럼 떠오른다.
소중한 사람.
아, 확실히 그거라면.
시우는 픽 웃음 짓고는 생각나는 이들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문제는 그 얼굴들이 양쪽 다 있다는 것이었지만.
***
“각하, 오늘도 수색했지만 별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꺄하하하. 그런가요? 참으로 안타깝습니 다. 우리 폐하께서는 어디로 사라지신 걸까요.”
커다랗고 화려한 소파에 드러누운 여자는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대강 대답했다.
“각하···. 그래도 걱정하는 티는 내셔야 하지 않을까요.”
보다 못한 〈제국 흑룡 기사단〉의 단장 키클이 그녀를 향해 꾸짖듯 말했다.
“뭐야아, 키클. 폐하 대신인 이 몸에게 반항하는 겁니까?”
“르누아 각하. 그렇다면 폐하를 찾는 일에 더 열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누워서 세금만 낭비할 게 아니라.”
지긋한 나이로 보이는 키클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의 태도를 못마땅한 듯이 바라봤다.
종일 누워서 과자나 먹고, 호화로운 음식과 술은 물론 다달이 여는 연회까지.
아무리 폐하가 아끼던 재상이라고는 하나, 지금에 와서는 그냥 놀고먹는 암군(暗君)이나 밥벌레에 가까웠다.
“폐하··· 저도 너무 보고 싶네요. 꺄하하, 그런데 이 과자 너무 맛있습니다. 키클도 먹어 봐요.”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각하. 폐하만 생각하면 입맛이 없거든요.”
“우아아. 그래요? 나는 폐하 생각해도 밥만 잘 넘어가던데.”
르누아는 착 달라붙는 원피스 차림에도 개의치 않고 누운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관능적으로 보일 자세였지만, 키클에게는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아끼던 재상··· 각하이지 않습니까. 폐하를 찾는 데 조금 더 열의를 쏟으시죠.”
“아니, 뭐, 저도 그러고는 싶어요. 그런데 꼭 저한테 각하라는 호칭을 고집해야 하나요? 폐하가 돌아오시지 않으니 이참에 제가 폐하에 오르···.”
“르누아아!!!”
키클이 새까만 꼬리와 날개를 활짝 펴고는 그녀를 향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그 위세와 격이 거대한 성을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크르으윽!!”
이에 질세라 르누아 역시 은빛 날개를 뒤로 치켜들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밀었다.
그녀의 동공이 파충류의 안광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이게 무슨 짓인가, 키클 단장!! 폐하 대리인 이 몸에게 무례하지 않으냐!!!”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카랑카랑한 외침이 드넓은 방 안을 울렸다.
그녀의 날 선 태도에도 불구하고 키클은 자신의 기세와 분노를 조금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흉흉한 아우라가 팽팽하게 당긴 활처럼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겨누어졌다.
“이 제국의 폐하는 ‘그분’뿐임을 명심해라!! 네 신분은 ‘대리’이지 황제가 아니다!! 한 번만 더 그 같은 망발을 내뱉으면 내 피와 뼈를 걸고 네년을 찢어 죽일 것이다!!”
실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태도.
우직한 성격의 키클이 던진 말이니만큼, 저 문장엔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것이었다.
르누아는 혀를 쯧 차며 적개심을 거두었다.
그녀 역시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전사였지만, 키클을 상대로 무용을 떨칠 만큼의 어리석음은 없었다.
“···흐응. 나도 기다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총애를 입었던 몸인데, 당연하지요. 조금 전의 발언은 헛소리였으니 잊어 주시길.”
르누아는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눕더니 먹던 과자를 마저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참으로 뻔뻔스러운 낯짝이군.’
키클은 그 모습을 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해 본 게 아닌 사이였으나, 저런 성격은 좀체 용납되지를 않았다.
“어쨌든 폐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진 재상, 당신이 폐하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꺄하하. 알고 있다니까요, 키클. 아이참, 우리 폐하는 왜 갑자기 사라지셔서.”
“르누아. 종족의 프라이드를 잃지 마십시다.”
“걱정도 팔자시네. 나도 용족 중 하나라고요.”
그녀는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엄지로 매만지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용족(龍族).
그들은 수많은 아인종이 사는 이곳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종족이었다.
가장 호전적임과 동시에 용의 힘까지 사용하는 최강, 최악의 전사들.
용족이 지나간 자리엔 풀조차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무위는 대단했다.
오죽하면 진짜 용도 그들의 부족은 비켜 지나간다고 할까.
그러나 용족은 그 악명에 비해 세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항상 개인플레이를 하며 ‘전체’보다는 ‘각자’를 우선시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드높은 자존감이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게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용족은 그 내부에서도 여러 파벌이 존재해 하나로 규합되기 어려운 무리라 일컬어지곤 했으니.
오만하고 폭력적인 전투광들은 그렇게 강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소수 부족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오랜 시간을 살아와야만 했다.
몇십 년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던 중 무소불위의 힘으로 모든 용족을 굴복시켜 하나로 통합시킨 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황제였다.
“우리의 번영은 모두 그분의 덕이다. 르누아 각하, 당신의 이 게으른 모습을 보면 폐하께서···.”
“허어어어! 폐하께서는 날 자랑스러워하실걸?”
그녀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간이 테이블에 놓은 칵테일을 후루룩 마셨다.
매번 똑같은 도돌이표이지만, 오늘따라 키클은 그녀의 모습이 마뜩잖았다.
“부디 이 모습을 폐하께서 보셨어야 하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그렇죠, 폐··· 폐하?!!!”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를 보며 키클이 기함을 토했다.
“꺄하하하, 기사단 단장이 농담도ㅡ 허억!!!”
빈둥빈둥 누워 있던 르누아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가 심장 마비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폐, 폐, 폐, 폐, 폐, 폐, 폐하아아!!!”
르누아가 서둘러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섰던 키클도 그녀를 따라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무척 피곤한 듯한 표정의 황제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내 방이 돼지우리가 되었네.”
황제가 르누아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예··· 예? 아, 이건 그··· 키클과 함께 폐하를 찾으려 회의를 했더니··· 으갸갸갸갹!!”
황제, 즉 시우가 르누아의 얼굴을 한 손으로 쥐고 들어 올렸다.
“르누아야, 거짓말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아, 아파요! 아파요!! 폐, 폐하! 으갸갸갹!!”
“다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최소한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는 털고 말해라.”
“네, 네넵!! 넵!! 놔, 놔주세욧!!”
시우가 손을 휙, 놓자 르누아가 뒤로 나자빠지며 또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아악! 내 관자놀이!! 내 꼬리!! 흐아아앙!!”
르누아가 엉덩이 대신 꼬리를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뒤로 넘어지면서 꼬리를 삐끗한 모양이다.
“폐하···!! 그동안 저희가 얼마나 애타게 폐하를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키클이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시우를 향해 절절히 토로했다.
사실 시우 입장에서는 원래 목표가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이계에서의 모든 일은 그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를 추종하던 무리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시우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나, 이만한 제국을 건설하고 홀연히 사라질 줄은 몰랐던 것.
따라서 시우가 자취를 감췄을 당시 이계에는 엄청난 소란이 매일 벌어졌었다.
시우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던 세력들이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곤 영토를 침공했던 것.
“밤이고 낮이고 할 거 없이 정예병들이 폐하를 찾으러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한가? 미안하게 됐구나, 키클이여.”
시우는 충신이었던 키클의 어깨를 다독였다.
평소에도 곧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 얘기한 시우였지만, 그럼에도 그가 사라진 건 신하들에겐 큰 아픔인 모양이었다.
···르누아는 제외하고 말이다.
“하하하항! 폐하, 폐하를 사모하고 존경하던 저는 밤잠을 설쳐 가며 폐하를 그리워하ㅡ 으갸갸갸갸갹!! 아, 안 할게요!! 거짓말해서 죄송합ㅡ 으갸갸갹!!”
그녀는 관자놀이를 문대며 입술을 비죽였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 소식을 서둘러 대륙 전체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에 속한 왕들과 제후들이 폐하의 복귀를 기뻐하며···.”
“아니, 그건 됐다.”
” 폐하···?”
시우는 손사래 치며 키클의 의견을 거절했다.
이계에 있는 자들은 수명이 길어서 그런진 몰라도 뭐 하나 공표하고 실행하려 하면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
빨리빨리의 민족성을 지닌 시우에게 그러한 짓은 고문에 가까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직접 두 발로 뛰어 실행하는 게 훨씬 더 빨랐다.
“그것보다는 현재 제국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성내에 있는 문무 대신들 전부 소집시켜.”
“예···? 지, 지금 말씀입니까?”
“당장. 30분 준다.”
“아, 알겠습니다!!”
키클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꺄하하항···. 저도 그럼 이만 나가 보도록··· 으갸갸갸갹!! 또 왜요!!”
“너는 어디 가. 얼른 내 방부터 치워.”
“시종들 불러서 치우ㅡ 아파, 아파요!!”
***
“아따,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 븐 것이여.”
아자젤의 목을 잘라 낸 진도화가 얼굴에 묻은 검붉은 핏물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하나하나 접근하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격과 기세가 연구실 방향에서 미친 듯이 나부끼더니, 이제는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오싹한 기운이 악몽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서늘함.
“이거 장난이 아닌디···?”
진도화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이 씨발!! 이 새끼는 2분만 버티라고 해 놓고서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류지환이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그와 크로우는 바알제불과 5분 가까이 싸우는 중이었다.
치명상에 가까운 공격을 몇 차례나 먹였지만, 바알제불은 현현 상태라 그런지 아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때 연구실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을 느낀 바알제불이 더듬이를 그쪽으로 향했다.
『크르르르륵ㅡ! 차원의 문이 열렸다. 너희에게 볼일은 없다, 이제.』
바알제불은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수천 마리의 벌레로 분화해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기랄···. 민시우가 말한 1차 작전이 실패한 모양이군.”
류지환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 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전에 민시우는 여러 경우의 수를 설명하고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법을 그들에게 일러두었다.
지금 상황은 1차 작전이 실패하고 ‘차원의 문’이 열린 거지 같은 경우.
“싸게 도망가야 쓰겄다. 저건 상대하기 까다로워야.”
진도화가 부적을 꺼내 들었다.
“뒤에!!!”
그 순간 류지환이 진도화를 향해 소리쳤다.
어느새 진도화의 등 뒤에 나타난 커다랗고 검은 달걀이 껍질을 부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