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47
48화〉
계약 이행자
HMCS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홍보 마케팅에 참석했던 시우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백건호의 간절한 부탁이더라도 어지간하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앞으로 1년간 보고서 작성을 안 하겠다는 조건으로 거래를 마무리했다.
“영감은 괜찮은 거야?”
“푹 쉬면 될 거라고 합니다.”
운전대를 잡은 볼크가 대꾸했다.
적귀는 구울과 굴라한을 저지하기 위해 주구를 무리하게 사용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마력이 고갈되어 기절해 있는 걸 시우가 발견했다.
‘주구야 새로 만들어 주면 되는데···.’
연장자이니 적당히 부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싱싱한 놈이 있는데 구태여 나이 먹은 사람을 괴롭힐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음부터는 볼크 위주로 해야지. 여차하면 추하민이나 황정구도 같이 시키고.’
운전하던 볼크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
대한민국 헵타그램 중 하나인 [제국 길드]의 수장 민시준.
“다, 단장님? 단장님?”
비서 윤승규는 선배이자 상사인 시준을 몇 번이나 불렀다.
그러나 시준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시선이 꽂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저택에서 이뤄진 이번 국제 HMCS 회의에 어마어마한 구울 떼가 출몰하여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독일 당국은 이번 사건의 배후로···」
백건호 지부장이 직접 호명해 따라간 그의 형.
민시준은 곧장 〈독일 헌터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현재 독일은 헌터 협회를 비롯해, 정부, HMCS, 외교부 할 거 없이 초비상사태였다.
그 사달이 났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
각국에서 밀려드는 공식 서한과 VIP들 간에 이루어지는 핫라인, 국제 HMCS 기관에서 요청하는 정황 보고까지.
그야말로 공무원들과 말단 직원들이 갈려 나가는 중이었다.
“전화를 안 받는데···.”
“제가 따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연락은 아예 받고 있지도 않은 상황.
윤승규는 몇 시간 동안 전화를 붙잡은 끝에 알음알음 건너서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사상자 명단에 한국인은 없다고 합니다.”
“하아ㅡ 다행이네. 아니, 형은 왜 맨날 저런 일에 엮이는 거야.”
시준은 불만 아닌 불만을 읊조렸다.
‘형이 오고 나서 걱정거리가 더 느는 건 왜일까.’
그리고 다음 날 늦은 오후.
시우가 올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백건호 측에서 무언가를 제시했고 시우가 이를 받아들여 HMCS에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할 거란 내용과 함께였다.
“형이 이런 걸 할 리가 없는데?”
“형님분께서 단장님처럼 자신이 속한 기관 부흥을 위해 희생하시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역시 형제지간ㅡ.”
“응, 절대. 아니야.”
“······.”
“아니야.”
민시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형은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성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경후나 최대수가 길드를 결성할 때도 시우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 견제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르치던 제자들에게만 신경 썼을 뿐.
‘이제 와 속한 조직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것 같진 않고··· 백건호가 어떤 딜을 한 걸까.’
그날 저녁.
식탁 자리에서 시준은 시우에게 곧바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월급 많이 준대. 팀장 자리도 준다는데 그건 거절하려고.”
“······그게 다야??”
“그리고 호형호제하기로 했어. 너도 다음에 보면 형이라고 부르든가.”
“······???”
무언가 엄청난 거래 내용이 오고 갔을 줄 알았는데, 예상한 거에 비해 초라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형은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잖아.”
“응, 그렇지.”
시우는 돈, 명예, 권력 따위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것들을 원했다면, 1세대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 충분히 손에 넣었을 것이다.
최대수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하겠다고 한 거야?”
동생의 질문에 시우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HMCS를 떠날 이유가 없으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어차피 나갈 생각이 없어. 그런데 상대는 내가 나갈까 봐 불안해하잖아. 그러면 상대의 조건을 수락해 주면 되는 거야. 결과적으로 그쪽도 좋고 나도 좋고.”
단순명쾌한 논리였다.
안 나간다고 설득하는 꼴도 이상하고.
또 그리 말 해 봐야 상대는 믿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눈치만 볼 게 틀림없다.
잘못하면 그 이상으로 족쇄를 채우려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상대가 제시하는 거래에 응해 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 우수한 ‘조건’으로 붙잡았다는 생각 덕에 마음을 놓게 되며,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시우가 돈, 명예, 권력을 탐하진 않았지만, 거저 준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제 그만 떠들고 치킨을 내놓아라! 죽인다, 식량!】
부연을 더 하려던 시우는 프레의 말에 음식을 집어 먹게 해 줬다.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치킨과 족발의 흔적들.
시준은 형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혹시나 이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백건호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건 아닌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형, 그리고 독일에서 있었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뉴스와 길드에 나도는 찌라시로 소식을 접한 시준에게는 정보의 한계가 있었다.
가장 좋은 건 현장에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
“···그래서 새벽에 라일라랑 둘이 지붕에서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마기가ㅡ.”
“라일라?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독일 [슈타이 길드] 길드장. 한스 슈뢰더라고 알아? 걔 조카야.”
시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강대강 핵심만 짚어 얘기했다.
하지만 [제국]의 수장인 시준에겐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다.
“슈, 슈타이? 독일 3대 길드잖아! 거기 길드장 엄청 예쁘기로 유명한데? 그리고 한스 슈뢰더라면 독일 영웅이고!”
“그래? 나 걔랑 같이 게이트 돌고 그랬는데. 애 착해.”
“······???”
어제 친구랑 편의점 다녀왔어, 하는 말투로 얘기하는 시우.
“그러다가 구울이 수백 마리? 잘 모르겠네. 아무튼 나오길래 좀 죽이고 사령술사 찾으러 갔지.”
시우는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선 그 어떤 자랑이나 잘난척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게 얘기해서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벅찰 정도였다.
시우는 느긋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원흉을 찾다가 숲에서 이반을 만나게 된 부분에 이르자 동생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시준도 한국의 대마도사라 불리는 인물.
마법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던 것이다.
“정말 단 한 명이 그 많은 구울을 만들었다고? 무덤에서 일으킨 것도 아니고?”
“어. 마기가 끝도 없이 나오더라.”
이반의 능력은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지독한 괴물의 아우라.
반마족이기 때문에 그런 자질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재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이반과 크로우의 존재만으로도 IZIZ는 시우에게 가장 위험한 단체로 각인됐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IZIZ에 대한 대응을 준비한다고 하더라고.”
“요즘은 국제적으로 그런 추세인가 봐. 우리나라 헌터 협회에서도 대응반 따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대. 길드에서 몇 명씩 추려서 하자고.”
HMCS에서는 대표적인 국제법 위반 테러리스트들이나 거대 조직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상시 관찰하고 있었다.
IZIZ도 대표적인 테러 조직.
그러나 시우는 이전까지 그곳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정민준의 암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
‘그래 봐야 띨빵한 애들이 모여 있는 소꿉놀이라 생각했는데.’
이반 같은 놈들이 있다는 걸 안 이상 가만히 좌시할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헌터 협회에서 만들든 안 만들든 간에, [제국]에서 괜찮은 애들 뽑아다가 훈련 좀 시켜. 몬스터랑 싸우는 거랑은 다르니까.”
시우의 잔소리에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다.”
“뭐가?”
“네가 걱정돼서 내가 애들을 훈련시키라고 한 거잖아.”
“그렇···지?”
민시준은 매우 불안한 눈빛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럴 게 아니라 너를 훈련시키면 되잖아.”
“······응?”
“조만간에 대련 한번 하자.”
“아니, 형, 잠깐만···! 가, 갑자기ㅡ.”
“십 년간 얼마나 성장했을지, 형으로서 기대가 되네.”
“혀, 형! 내, 내가 이번 주에는 밀린 업무가 많아서ㅡ.”
“어차피 네가 질 건 뻔하지만 내기가 있어야 재밌지. 10분 이상 버티면 거기서 종료.”
“···못 버티면?”
시우는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일주일에 1회씩 강제 훈련.”
***
독일 오베르스트도르프에 있는 산맥.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 있는 한 동굴이 사람들로 북적였다.그곳엔 잘 무장된 삼십 명 이상의 헌터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개 같은··· 거너 이 미친 새끼 왜 지 혼자 일을 벌이고 지랄이야!”
〈알마흐트〉의 수장 헬무트 하베크.
그는 며칠간 이어지는 소식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국제 HMCS 회의장이 테러를 받은 것까진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알마흐트의 목적은 독일 헌터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길드를 무너트려 뒤에서 자신들이 그림자로 군림하는 것.
그런데 거너가 일을 망쳐놓는 바람에 알마흐트의 존재가 일찌감치 세상에 까발려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IZIZ와 손을 잡은 테러 단체로서 말이다.
“이 씨발, 염병할 놈의 새끼가! IZIZ와 손을 잡은 건 어떻게든 들키지 말았어야지··· 혼자 뒤져버리면 남은 똥은 우리 보고 치우라는 거야, 뭐야!”
헬무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컵을 벽에다 내던졌다.
IZIZ는 알마흐트와 급이 다른 조직이었다.
훗날 IZIZ가 독일에서 일을 벌이면, 그 뒤를 길드로서 수습해 주거나 핵심 정보를 흘려 주는 조건으로 힘겹게 맺은 체결.
물론 막대한 지원금을 낸 건 덤이었다.
‘그 천금 같은 지원을 거지 같은 계획에 낭비하다니···!’
이번 일은 헬무트의 의사와는 전혀 달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처음부터 국제회의에서 난동을 피운다는 어리석은 계획을 누가 짜겠는가.
물론 거너의 목표는 국제회의를 망치는 게 아니라, [슈타이 길드]의 종말이었지만 말이다.
“헬무트님. 이 거처도 그리 안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 있는 동안엔 괜찮지만, 독일 당국에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계획하고 있답니다.”
“당연하겠지! 국제적으로 개망신을 당했는데, 협회장 롤프 방겐하임이 그냥 있을 것 같나?!”
〈독일 헌터 협회〉현 회장인 롤프 방겐하임.
현역 시절 별명이 도베르만일 정도로 지독한 독종이다.
그가 이번 테러에 대해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하겠다 약속했으니, 분명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헬무트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과거 롤프가 싸우는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있었다.
헌터의 급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을, 헬무트는 그 당시 깨달았다.
“우선 다음 주 내에 리히텐슈타인으로 넘어갔다가 스위스로 간다. 중립국이니 독일 당국과 협조해서 우리를 수사하진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단원들에게 그렇게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콰과과과광!
그때 엄청난 굉음이 동굴 내부를 뒤흔들었다.
“뭐, 뭐냐! 무슨 일이야!”
“헬무트님, 기, 기습입니다!”
“전원 마력 운용하고 날 따라오도록!”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음이 일어난 입구로 향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수색이다.
여긴 마력이 들쑥날쑥한 곳이라 수색 헌터조차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부 조직이나 HMCS가 왔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야호ㅡ 오랜만이얌!”
“라펠, 그게 무슨 말투입니까. 정중히 인사하세요. 헬무트 씨발아, 안녕? 이렇게요.”
IZIZ가 와 있었다.
“오, 오랜만입니다, IZIZ 여러분··· 라펠, 그리고 칼레오였나요?”
헬무트는 느닷없이 쳐들어온 그들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대체 이들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대강은 예상하고 있지만··· 설마.
“웅! 라펠이 직접 왔어염!”
“라펠, 그런 말투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헬무트 씨발아, 찾는데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헬무트 찌발아!”
이 동굴은 둘이서 찾을 수 있을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게다가 [인식 방해 마법]은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으로, 앞으로 사나흘은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부 조직도 못 찾은 것을 고작 둘이 찾아내다니?
그것도 이렇게 빨리?
“그, 그것은 저희가 독일 정부로부터 도망치느라··· 절대 IZIZ와 거래를 끊을 생각은 없습니다!”
헬무트는 간절한 목소리를 담아 그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당신들과 계속 거래를 해도 괜찮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칼레오님, 감사합니다!”
“다만ㅡ.”
칼레오는 문서 한 장을 소환해 그에게 건넸다.
“이번 의뢰에 ‘그쪽’ 소속인 거너가 계약한 내용입니다.”
“계, 계약이라뇨.”
헬무트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며 문서를 펼쳐 읽었다.
한줄 한줄 읽는 그의 표정이 점점 사색으로 물들어 갔다.
〈49 화〉
각인된 공포
“이ㅡ 이ㅡ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거너는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독단적으로 IZIZ와 계약한 것입니다! 저희는 전혀 몰랐던··· 이, 이 계약은 무효입니다!”
헬무트는 손까지 덜덜 떨어 가며 소리쳤다.
하루아침에 채무자가 되어 온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빚보증을 잘못 서서 얻은 결과로 말이다.
“헬무트 씨발아, 당신네 사정 따위를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거너가 알마흐트의 간부였기에 힘을 빌려준 것인데.”
“하, 하지만··· 이, 이 금액은···!”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번 테러를 위해 IZIZ 이반의 능력을 빌리겠습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
다만 문제가 된 것은 이 이후였는데,
구울 한 마리 소환당 책정된 비용.
이반이 적과 직접적인 전투를 할 시에 내는 추가 수당.
이번 작전 테러 명단에 IZIZ의 이름이 거론될 때의 손해 배상액.
IZIZ의 조직원이 부상을 입게 될 시에 부담해야 할 치료비 전액.
“총 9,000만 유로(한화 약 1,230억) 내시면 되겠습니다.”
주위에 있던 알마흐트 조직원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건 조직이 가진 모든 자원을 매각해도 갚을 수 없는 비용이었다.
“일시불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할부로?”
칼레오는 평소처럼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동그란 로이드형 테 너머로 싸늘한 시선이 전해졌다.
헬무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희와는 상관없는 계약입니다. IZIZ의 수장님을 만나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박을 던졌다.
IZIZ의 수장을 만나 본 적도 없고, 대화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존재에 관해 들어 본 적조차 없지만,
어떻게든 만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질질 끌어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말이다.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겠다는 말이군요. 이해합니다.”
칼레오는 안경을 벗어 웃옷 소매로 안경알을 닦았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수장님께 깔끔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헬무트는 전략이 먹힌 것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라펠 어떻게 해염?”
10대 중반으로나 보일 법한 여린 얼굴의 소녀.
작고 왜소한 몸을 지닌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칼레오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하긴요. 라펠.”
칼레오는 안경을 다시 쓰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씨발, 다 먹어 치우세요.”
와ㅡ 그작ㅡ!
라펠의 배에서 거대한 이빨이 튀어나와 헬무트의 상체를 씹어 삼켰다.
푸슉ㅡ
그의 남은 하체에서 피가 분수처럼 흘렀다.
“끄··· 끄아아악!”
“뭐, 뭐야 저것들은!!”
“씨발!! 공격해!!”
잠시 넋이 나갔던 알마흐트의 조직원들은 부리나케 공격을 감행했다.
그건 일종의 광기에 가까웠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그것에 기인한 어리석음.
여기서 그들의 정답은 공격이 아닌 도망이었다.
물론 그것도 가능할 때의 이야기지만.
“야호ㅡ 잘 먹겠습니댱!”
콰드득! 와직! 와그작! 와그작! 와그자악!
뼈와 살점이 으깨지고 처참하게 씹히는 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다들 너무 맛이쪄요! 라펠 행복행!”
곳곳에 피가 튀며 그녀가 지나간 통로는 온통 새빨간 흔적만이 가득했다.
“미, 미친 괴물 같은 년!”
“썅! 옆에 있는 안경 새끼를 노려!”
조직원 중 하나가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리며 칼레오에게 덤벼들었다.
저 작은 여자는 괴물이다.
귀엽게 생긴 외모 속에 감춰진 악의 덩어리.
뒤늦게 그녀의 막대한 격(格)에 눌린 사람들은 감히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명령 내리는 안경잡이 놈만 죽이면 탈출할 수 있어!’
비록 IZIZ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모든 이들이 전투형 헌터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아마 공격은 라펠이, 칼레오는 보조로 이곳에 왔을 터.
“뒈져라, 이 새끼야!”
조직원은 칼레오를 일격에 죽이고 동굴에서 탈출하려 했다.
어차피 이곳은 리히텐슈타인 근처의 국경 지대.
발을 빨리 놀려 국경만 넘어 사라진다면, 독일 정부이건 IZIZ이건 알마흐트의 말단 조직원 따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런 곳에 돈 받으러 온 놈이 IZIZ의 간부일 리도 없고.
짓쳐들어오는 마력의 예기.
칼레오는 그 공격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들이닥치는 상대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툭, 쳐냈다.
“뭐야,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ㅡ.”
말을 다 잇기도 전,
퍼ㅡㅡ 엉!
오른발이 산산조각 터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저는 전투가 서툴러서요. 알마흐트 씨발 버러지들아.”
접촉 후 상대의 신체에 무작위로 생기는 마기 폭탄.
마기를 더 많이 불어넣을수록 더 크고 더 강한 폭탄이 생성되고, 제한 시간 내에 폭탄을 찾아 해제하면 폭발을 막을 수 있다.
제한 시간을 넘기면 자동으로 터진다.
단, 해제에 성공하면 스킬 시전자에게 폭탄이 돌아간다.
그의 손끝에서 진한 마기가 따리를 틀며 괴상망측한 마법진을 연성했다.
칼레오는 비명을 꽥꽥 지르는 상대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째깍, 째깍ㅡ
“이, 이게 뭐야!! 씨발 무슨 소리인데!!”
방금 발에 터진 폭탄은 가장 위력이 적은 대신 제한 시간도 짧은 것.
하지만 지금 설치한 건 3초의 시간만큼 더 강한 것이었고,
뻐거엉ㅡㅡ!!
스킬을 파훼하지 못한 상대는 온몸이 믹서기에 갈리듯 저며졌다.
투두둑.
사방으로 쏟아지는 인간의 형체’였던’ 것.
“라펠··· 얼른 먹어 치우세요. 안 그러면 제가 다 죽입니다.”
칼레오는 주춤거리는 적들을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
며칠 뒤.
동굴 입구에 쳐진 폴리스 라인.
안에서 수사하던 사람들은 역한 썩은 냄새에 구역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알마흐트 테러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협회 헌터들은 갖가지 스킬과 나름의 경험으로 수색 범위를 좁혀 갔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오베르스트도르프에 있는 산맥에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문제는 마력 파장이 오락가락하는 곳이라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
결국 인근 경찰들과 산림관리자, HMCS 헌터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탐지 끝에 커다란 바위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인식 방해 마법]이 있던 탓에 바위산에서 한참의 시간을 허비했고,마침내 동굴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일백에 가까운 헌터가 동굴 앞에 포진하다 신호에 맞춰 차례대로 진입했다.
“우욱ㅡ!”
“웨에엑!!”
“이 미친··· 염병 이게 다 뭐야.”
“진입 중지! 진입 중지!”
그곳은 한 폭의 지옥도였다.
기다란 동굴 가득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피와 살점, 내장, 뼈 따위가 사방팔방에 즐비했다.
어지간한 꼴을 다 겪어본 헌터들도 그 참혹한 광경엔 적응할 수 없었다.
협회장 롤프 방겐하임은 알마흐트의 거처가 발견됐단 소식을 듣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구더기와 파리가 득시글한 동굴은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이건 인간의 짓이라고 볼 수가 없군. 얼마나 된 거지?”
“수사 헌터들 말에 따르면, 120시간 전후라고 합니다.”
“닷새 전이로군.”
롤프는 인상을 구겼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갈며 찾아도 이만큼이나 걸렸는데.
대체 누구길래 그 이른 시간 안에….
“그런데 저게 알마흐트인지 구분은 할 수 있나. ‘형체’가 아무것도 없는데.”
“전부는 아닙니다. 하체만 있는 시신 한 구를 조사한 결과 헬무트 하베크라는 자로 밝혀졌습니다.”
롤프는 낯익은 이름에 머릿속 기억을 뒤적였다.
“헬무트 하베크? 교도소에 들어간 놈 아니었나?”
“예, 조사해 보니 4년 전쯤 출소했는데, 교도소 안에서 다른 범죄자들과 조직을 만들었단 증언을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이 알마흐트라 이거지?”
“맞습니다.”
그때 독일 HMCS 뮌헨지부 팀장 미하엘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조사했는데 결과가 기가 막힙니다.”
“뭔데 그러나?”
“마력흔을 근거로 조사했는데 말입니다···.”
마력흔(魔力痕).
마력을 사용했을 때 주위에 남는 마력의 흔적과 패턴의 자국을 뜻하는 말.
모든 마력 사용자들은 그 마력흔이 전부 달랐고, 그것을 토대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사체와 동굴에 남겨진 흔적을 보면 두 개의 마력흔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말은···?”
“네. 범인은 두 명입니다.”
“사상자는 얼마나 되나?”
“확실하진 않지만 서른 명 이상으로 추측됩니다.”
고작 두 명이 서른이 넘는 헌터들을 상대로 이런 학살을 자행할 수 있을까.
롤프는 그동안 자신이 수사했던 사건들을 회상해 보았다.
거대한 실력 차가 존재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알마흐트 조직원들도 그리 약하진 않았을 터.
지난번 죽은 거너와 그의 부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상당한 양의 마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다들 한 소리치고 다닐 정도의 실력은 된다는 소리.
“알겠네. 일단 언론에 떠들지는 말아야겠군. 혹시 모르니 살아남은 알마흐트 조직원이 있는지 수사해 보게.”
“예, 알겠습니다.”
롤프는 동굴에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와 범인의 수법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그는 헌터의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살육에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는 것을.
원한도, 분노도, 복수도, 후회도, 망설임도.
그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살의와 폭력.
그런 상념에 젖어 있는 와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 나다.”
–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시킨 대로 잘하고.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해. 특히 백건호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 예, 알겠습니다.
롤프는 통화를 마치고 어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만족하면 좋을 텐데.’
***
“선배님 오늘 회식 있는 거 기억하시죠?”
“내가 붕어 대가리냐.”
시우는 황정구를 보며 혀를 찼다.
뭔 엄마도 아니고 한 시간마다 와서 잔소리는.
“이번에 서울에 있는 HMCS 헌터들 다 모인다고 했으니까 꼭 가셔야 합니다.”
“더럽게 귀찮네.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안 됩니다! 지부장님이 특별히 다 모이라고 했기 때문에 불참은 없습니다.”
황정구는 시우만 오면 빠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에 빠지게 되면 자신은 모가지라고, 그렇게 되면 평생 먹여 살릴 거냐는 되지도 않는 협박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날 저녁.
강남에 있는 고급 호텔 연회장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연회장 안에 그야말로 인원이 꽉 찬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람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차려진 뷔페 음식을 오가며 저녁을 즐겼다.
“아··· 오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퇴원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성창원과 하준태.
그들은 어색한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며칠 전 치료를 다 받고 무사히 퇴원했지만, 연차까지 써 가며 복귀를 미뤘다.
‘차라리 어디 먼 곳으로 출장이라도 가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지금은 남는 자리가 없었다.
“씨발, 하필 입원한 게 소문이 나 가지고.”
“애초에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백건호 지부장마저도 그들을 한 차례 방문했었다.
시우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길래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던 그들.
“지유리는 어디 있지? 싸가지 없는 년, 병문안도 한번 안 오고.”
“우리 병문안 금지였습니다. 백건호 지부장님이 특별한 겁니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편지 정도는 써 줄 수도 있잖아!”
“편지 원하면 제가 대신 써 드리겠습니다.”
“······.”
성창원과 하준태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출근 안 하냐?”
황정구였다.
“네가 뭔 상관이야, 씨발 거지 같은 게.”
성창원은 그를 보자마자 으르렁대며 눈알을 부라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A+급 헌터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황정구 이 개새끼. 너 일부러 우리 엿 먹이려고 어디서 사람 데리고 온 거지? 씨발, 그게 후배라니 말이나 돼?”
“아니면 아티팩트를 제공했습니까? 버퍼를 주었습니까?”
황정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개소리들은 골라서 하네. 너네 쥐어 터졌다며 아직도 아티팩트 같은 소릴 지껄이냐.”
“야, 이 씨발··· 어디 가서 우리가 당했단 것처럼 떠들고 다니면 죽여 버린다!”
“맞습니다. 방심해서 불의의 기습을 당한 거지, 패배한 게 아닙니다.”
서로 미약한 기운을 스멀스멀 피워올리던 그때,
“오랜만이다.”
누군가 성창원과 하준태 어깨에 팔을 얹었다.
“내가 변하라고 했을 텐데, 왜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지?”
시우의 물음에 그들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턱을 딱딱거렸다.
몸에 각인된 무자비한 폭력의 공포.
“갱생소ㅡ 다시 들어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