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56
58화〉
강여화
지유리는 시온을 감싸 안은 채 병동 한구석에 숨어 있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입술은 하도 깨물어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귀신을 찾기 위해 폐병동을 다녔던 무서움과는 다른 차원의 공포.
그녀는 헌터들의 싸움을 수없이 많이 봐 왔었다.
성창원과 하준태를 따라다니다 보니, 싫어도 그런 꼴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HMCS에 속한 헌터였기도 하고 말이다.
‘저 미친놈들은 뭐져···!’
하지만 범죄 현장을 기습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역으로 기습을 당한 적은 없었다.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한 기분은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
반면 시우의 반응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안 싸워, 같이?”
품에 안긴 시온이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물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정체를 알 수 없어 무서워 보였던 소녀였는데,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오히려 귀엽게 느껴진다.
“너를 보호하라고 해서 싸울 수 없어여.”
“괜찮아. 가.”
“호, 혼자 두면 무섭잖아여.”
“안 무서워, 나.”
“······.”
“가.”
다시 보니 그렇게 귀여운 것 같지는 않다.
지유리는 단전에서 마력을 뽑아내 언제든지 싸울 태세를 갖췄다.
격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B+급 헌터인 만큼 나름의 역할을 하긴 해야 할 터.
‘으··· 보스님, 얼른 돌아오세여.’
그렇게 안절부절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데 누군가 어둠을 헤치고 다가왔다.
지유리는 마력으로 신체강화를 한 다음 냅다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빠악!
발차기를 가볍게 제압한 상대는 지유리를 향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꺄악!”
찰싹!
손바닥으로 지유리의 머리를 때렸다.
“그거 맞고 다치기나 하겠냐.”
시우는 한심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보, 보스님! 다 이기셨어여?!”
“당연하지. 시온이는 다친 데 없지?”
시온은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구석에서 빼꼼히 나왔다.
“오빠다.”
“그래, 그래. 언니가 잘 지켜 줬어?”
“하는 거 없다, 언니.”
“아니, 아니! 언니가 안아 줬잖아여!”
“안는 거 오빠가 낫다.”
시온은 쪼르르 달려가 시우에게 폭 안겼다.
자신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자신을 보고 함께 살자고 했던 유일한 사람.
시온은 풋풋하게 파고드는 시우의 따뜻함이 좋았다.
“저기··· 이제 다 끝난 거져? 돌아가도 되는 거져?”
“안 끝났는데.”
“···네??”
지유리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이거 우리 집 주소거든? 내 동생 있으니까 걔한테 대강 설명해 주고 시온이 맡겨.”
“그, 그럼 끝이져?”
“너는 돌아가서 보고서 써야지.”
“그, 그것만 하면 정말 끝이져?”
“아니. 정구랑 창원이 불러서 경위 보고하고 걔들이랑 여기 다시 와서 현장 처리해.”
시우는 마력 조사반을 데려오라거나, 백건호에게 말하면 처리해 줄 거라는 등, 구체적인 지시를 몇 개 더했다.
지유리의 표정이 어두워갔지만, 원래가 어두운 곳이라 시우는 알 수 없었다.
“······저한테 일거리 다 맡기시면 보스님은 뭐 하시는데여?”
“나는 볼 일이 있어.”
“언제여?”
“지금.”
***
눈발이 펑펑 흩날리는 설원.
모든 것들이 새하얀 눈에 파묻혀 빼곡한 여백으로 가득한 이곳.
불꽃마저 얼려 버릴 것 같은 한랭 속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최대수 이 개새끼.”
강여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몬스터 가죽을 두른 채 정처 없이 산길을 헤맸다.
지독한 폭설이 시야를 가리고 살얼음 같은 바람이 사방을 할퀴는 중에도 걸음은 쉬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가죽을 세게 여몄다.
스승님에게 배운 몬스터들의 다양한 활용.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구분하고 피와 내장, 가죽, 코어를 다뤄 게이트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던 수업.
‘그때는 정말 하기 싫었던 것들이었는데.’
10대 후반의 소녀가 트롤의 눈알을 파내서 약초와 섞어 상비약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징징거리고 떼쓰고 드러눕고.
온갖 방법으로 스승을 귀찮게 하며 애를 먹이곤 했는데.
시우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인상을 쓰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ㅡ
‘겨루기를 했지.’
어차피 다쳐도 치료해 주면 되니까 말이다.
강여화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매일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매번 생각할 때마다 아프다.
그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진작 애달픈 마음이라도 표현하는 건데.
그래서였을까.
최대수의 제안은 달콤하다 못해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단 0.1%의 가능성만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거기에 모든 걸 걸었을 것이다.
‘스승님 덕분에 연명하는 삶, 스승님 없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여화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불어닥치는 차디찬 겨울이 마치 자신이 마주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끝없는 비난과 모욕, 주변 헌터들의 냉대와 조소까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말은 ‘최대수의 개.’
스승님과 최대수의 달갑지 않은 관계를 생각하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별명이지만ㅡ
참았다.
참아 보이겠다.
‘그때까지는 원하는 대로 개처럼 굴러 주마.’
자신이 채운 족쇄라 여기고 기꺼이 그 버거움을 짊어지기로 했다.
이 치욕과 설욕을 평생 잊지 않기 위해서.
“최대수··· 너는 내 진짜 주인이 아니야.”
강여화는 옷깃을 다시 여몄다.
시린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훑었다.
귀때기가 뜯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이거 나 혼자 찾을 수 있긴 한 건가.”
강여화는 숨을 헐떡였다.
추위와 시린 바람 때문에 단 10m만 움직여도 체력이 엄청난 속도로 소진되는 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에너지가 바닥나면 아티팩트는커녕 목숨도 장담할 수 없게 될 터.
하지만 게이트에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잠깐ㅡ 뭔가 이상한데?’
강여화는 자신의 오감과 몸을 점검했다.
‘이건 멀쩡하고. 그렇다면···.’
뿌옇게 흐려진 기억의 끄트머리를 잡아 억지로 끌어올렸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지.
게이트에 들어오고 지난 시간은 얼마지.
내가 쓰러트린 괴물의 숫자는 몇 마리지.
머릿속에 물이 차오른 것처럼 모든 기억이 부유하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빌어먹을, 게이트에 먹히고 있잖아!”
그녀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찰싹, 소리가 나며 그녀의 한쪽 볼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게이트는 말 그대로 ‘다른 세상’을 여는 문이다.
그 속에 들어가서 마주한 세상은 지구와 닮았지만, 지구가 아닌 곳.
날씨도, 시간도, 생물도, 자연도, 몬스터도 이 세상의 규칙과 조금씩 다르다.
즉, 어느 게이트는 엄청난 재해 그 자체이지만 잘 찾아보면 낙원인 게이트도 존재한다는 것.
하지만 인류는 게이트로 이주하거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멈췄다.
사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게이트에서 얻어올 수 있는 수많은 자원과 보물, 미증유의 생물이 있듯이, 게이트 또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
게이트 안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면 보낼수록 사람들은 저마다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기억, 오감, 신체, 자아, 감정.
무작위의 강탈이 이뤄지며 심한 경우엔 저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텅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일명 ‘게이트 증후군.’
지금 강여화는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서서히 잃어 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어.”
그녀의 머리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허공에 사라졌다.
파편화된 기억 일부가 또 하나 사라진 것이다.
강여화는 발을 박찼다.
이딴 곳에서 병신이나 되자고 지금껏 노력해 온 게 아니었다.
‘아티팩트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최대수 새끼가 또 지랄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드넓은 공간 안에서 혼자 아티팩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임무였다.
차라리 입 무거운 용병 헌터라도 데려와 함께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
그렇게 정신없이 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던 와중,
강여화는 음산한 기운 하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몬스터··· 아니, 사람이다.
달리던 것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는 찰나,
슈ㅡㅡㅡ웅!!
기다란 스피어 하나가 공기를 찢고 그녀에게 날아왔다.
강여화는 이를 꽉 깨물고 발차기로 창의 궤도를 틀었다.
콰아아앙!
다른 각도로 날아간 창이 나무를 꿰뚫고 바위에 처박히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냈다.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
그러나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단 맞받아치는 게 더 나은 전략이었다.
“와아ㅡ 누나 대단하네.”
그때 누군가 박수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덩치가 최대수만큼은 될 법한 몸이 다부진 남자였다.
“넌 뭐냐.”
강여화는 적의를 감추지 않고 놈을 경계했다.
“역시 S급은 다르다니까. 이런 상황에서 쫄지도 않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ㅡ 아, 이름 말하면 안 된다! 그냥 4호라고 해! 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
“누가 보냈냐.”
“와아ㅡ 누나 멋지다. 내가 데려가서 키우면 안 되나?”
4호는 바위산 꼭대기를 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두 명의 사람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읍 읍읍읍 읍읍.”
“썩을 놈. S급 앞에서 장난치면 턱에 빵꾸나는 기라.”
재갈을 물고 구속복을 입은 여자.
그리고 눈을 가린 채 지팡이를 짚은 중년의 남자.
강여화는 이들이 숙련된 암살자임을 눈치챘다.
‘시간을 끌면 내게 불리하다.’
“3호 아저씨. 지금까지 내 몸에 상처 낸 사람은 1호밖에 없ㅡ 으앗!”
4호는 실실거리며 웃다가 강여화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둥지둥했다.
“우이 씨! 이 년이 비겁하게 말하는 중에!”
“여자 하나를 상대로 세 명이 덤비는 건 안 비겁하냐?!”
“어······ 그건 그렇지.”
강여화는 손가락을 꺾어 뚜두둑 소리를 냈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따라 하다 보니 생겨난 그녀만의 버릇.
“그런데 활잡이 주제에 나랑 몸으로 떠보겠다고? 아니면 내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 거야?”
“미친놈, 지랄하네.”
강여화는 대중들에게 신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500m 밖에서도 목표물을 날려 버리는 무시무시한 사격 실력.
이성계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솜씨.
그러나 그건 스승님의 도움이 되고 싶어 연마했던 보조 능력일 뿐.
‘오랜만에 쓰는구나.’
옛날부터 수업 시간에 강여화가 가장 잘했던 게 하나 있었다.
잘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스승을 너무 좋아했기에, 스승의 시그니처 기술을 따라 한 것이다.
샤오롱조차도 쉽게 이기지 못했던, 그녀만의 특기.
맨몸으로 겨루는
[박투술]강여화가 몸을 박찼다.
4호는 커다란 근육 곳곳에 마력을 때려 박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공격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와 봐라’하는 듯한표정.
그러나 강여화는 그런 도발이 기꺼운 듯 미소까지 지었다.
왼발이 번개 같은 속도로 적의 머리통에 쏘아졌다.
4호는 머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흘려보냈다.
‘이 누나 공격 매섭네!’
곧바로 강여화에게 달려들어 파운딩을 하려는 순간,
빠가아아악!
그녀의 뒤돌려차기가 4호의 턱에 내리꽂혔다.
“크어억···.”
강여화는 재빨리 그의 머리를 붙잡고 무릎으로 얼굴을 찍었다.
퍼어억! 뻐억! 뻐어어억!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고 그녀의 바지도 빨갛게 물들였다.
강여화는 주먹에 마력을 가득 그러모아 4호의 턱에 어퍼컷을 날렸다.
빠ㅡㅡㅡ악!!
커다란 덩치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더니 곧 눈밭에 쓰러졌다.
“너네도 뒈질래?”
그녀에게서 뿜어진 살기가 멀리 있는 3호에게도 선명히 전해졌다.
“썩을 놈···! 턱에 빵꾸 난다고 안 캤나? S급은 사람이 아닌 기라.”
“읍읍읍! 읍읍! 읍읍읍읍!”
수백 개의 선과 도형, 정갈한 문자가 진을 이루고, 그 회로를 따라 마력이 스며간다.
선명한 빛이 눈밭을 적시며 광활한 마법진 속에서 그녀의 무기가 구현된다.
검은 용의 불과 고래의 힘줄로 만들어졌다는 흑각궁.
[풍화랑 : 뇌전의 살]거기다 스승님에게 배운 전격 마법을 응용해 뇌전의 화살을 만들어 장전했다.
강여화는 망설이지 않고 활을 겨눈 뒤 시위를 거침없이 당겼다.
투웅ㅡㅡㅡ 퍼억!
공기를 찢어발기고 날아간 화살이 목표물의 몸을 꿰뚫고 맞닿았던 부분을 전뇌로 지져 버렸다.
“으프읍··· 으브브.”
“2, 2호야.”
눈을 가리고 있던 중년 아저씨가 2호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꿰뚫린 어깨에서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하지만 고작 1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신궁이 실수할 리는 없는 법.
분명 머리를 겨눴는데,
“이 새끼가···.”
강여화는 매서운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봤다.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와 활의 진로를 방해한 놈.
파란 머리에 가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늙었는지 어린지도 알 수 없는 상대.
그 기묘한 상대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1호라고 하는데요.”
아주 고운 미성의 목소리.
암살자라기엔 너무 티 없이 곱고 맑은 목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당신의 목을 내 방에 전시해도 될까요?”
애처롭게 묻는 목소리 사이로 빨간 살기가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