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acle of the Villainous Baby RAW novel - chapter (117)
악당 아기님이 예언을 함 118화(117/125)
둥실둥실 떠 있는 수첩이 이윽고 조금씩 스파크를 내보내는 걸 멈추기 시작했다.
수첩이 점점 잠잠해지자 벨리알은 재차 입을 열었다.
“네가 없어지고 나서 많이 생각해 봤거든. 너는 늘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뜬구름 잡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곧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굴었지.”
파지직.
수첩은 이윽고 아주 미약한 정전기만을 흘리며 벨리알의 손바닥 위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남들이 모르는 걸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벌어지지 않은 일을 마치 읽어 낸 것처럼 읊어 대고, 왕께도 우리에게도 목숨이 열두 개쯤 되는 것처럼 서슴없이 조언하는…….”
벨리알의 날카로운 손톱 끝이 수첩의 가죽으로 된 겉 부분을 드드득, 긁어내렸다.
조금씩 상처가 났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는 가죽을 보며 그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건방지고, 주제도 모르고, 약해 빠진…….”
벨리알이 느긋하게 마술을 풀어 둥실둥실 떠 있던 수첩을 붙잡았다.
“거슬리는 계집…….”
이번에는 스파크가 튀지 않았다. 격렬한 거부도 없었다.
벨리알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닫혀 있던 수첩을 펼쳤다.
팔랑팔랑 제멋대로 넘어가는 수첩은 마치 단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것처럼 전부 백지였다.
팔랑팔랑 넘어가던 종이가 이윽고 마지막 장에서 뚝 멈췄다.
사각사각.
새하얀 백지 위로 글자가 적히기 시작했다.
* * *
“…하여, 유디아 공작가의 버니 유디아와 내 아들인 로엘의 약혼을 발표한다. 조만간 성대한 약혼식을 열 것이다.”
연회의 시작 전,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며 운을 띄운 황제의 공표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탄식과 함께, 여기저기서 울먹거리는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실상 황태자 로엘을 주인공으로 열린 공식적인 첫 연회였기에 황태자와 자신의 여식을 어떻게 엮어 보려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런데 도전은커녕 돌연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임자 있으니 쓸데없는 접근은 하지 말라며 못을 박아 버리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두 황실과 공작가의 경사를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군.”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황제가 가벼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마저 입을 열었다.
“경사스러운 연회일세. 모두 편히 즐겨 주시게나.”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쪽에 있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우아한 선율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버니에게로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버니가 눈을 깜빡이다가 훗, 웃음을 터뜨리곤 코 밑을 쓱 문질렀다.
“아빠, 다들 버니에게 시선 집중. 버니 완전 인기쟁이 됐어여.”
“그래, 그렇구나.”
“근데 이제 버니도 친구 사겨도 돼여?”
“상관없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 친구를 해 줄 아이가 있기는 할까?
최소한 오늘 참석한 또래의 영애들은 대부분 황태자나 황자를 노리고 온 것이 뻔할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말로 말린다고 버니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생각을 마친 키리엘은 순순히 아이를 놓아줬다.
어차피 아이들의 괴롭힘이나 영애들의 날 선 말 한두 번에 상처 받을 버니가 아닌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래, 편하게 하렴. 대신 연회장 밖으로 멋대로 나가진 말고. 무슨 일 생기면 아빠 부르고. 사고 치지 말고. 알겠니?”
“네엥.”
합법적으로 자유가 되어 키리엘의 품에서 벗어난 버니가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로엘의 근처에는 사람들이 엄청 몰려 있었다.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던 로엘이 버니를 보더니 돌연 꽃이 피듯 화악 밝아진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마주 손을 흔들어 준 버니가 연회장을 쓱 훑어봤다.
‘친구, 친구.’
인간 친구를 엄청나게 많이 사귀어서 나중에 버니가 왕 큰 대마왕이 되어도 친구로 지내야지.
버니는 종종걸음으로 키리엘에게서 벗어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또래 중 자신과 비슷한 눈높이의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버니가 폴짝폴짝 뛰어 연회장을 가로지르는 때였다.
“저, 저, 저기……!”
문득 뒤쪽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버니가 걸음을 뚝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옅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더벅머리 소년이 바짝 긴장한 채 제 옷의 앞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꾹 깨문 아랫입술, 바르르 떨리는 어깨가 퍽 안쓰럽게 보였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바닥으로 치켜올린 소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버니를 보았다.
“킥킥…….”
“저 꼴을 보라지.”
“저기 주제를 모르는 것들끼리 제법 잘 어울리지 않아?”
뺨에는 주근깨가 가득 박힌 수수한 인상의 소년 몇 걸음 뒤에는 수려하게 생긴 소년 하나를 필두로 소년 소녀 무리가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조금 전 샬로네에게 시비를 걸었던 소녀와 함께 있던 영애도 보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소년이 힐긋 뒤쪽의 눈치를 살피자, 중앙에 있던 소년이 주먹을 쥐고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인다.
“흐익!”
어깨를 크게 떤 소년은 버니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다.
“나, 나, 나랑 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소년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춤, 춤추지 않을래……?”
“춤?”
“…으응. 미, 미안해. 저기 싫으면 괜찮은데…….”
“버니, 춤 잘 모르는데…….”
고개를 돌리니 음악이 시작되고 조금씩 연회장의 중앙이 비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버니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소년 소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미, 미안. 내, 내가 주제넘게……. 그게… 저기…….”
“좋아.”
버니가 물끄러미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소년의 손목을 붙잡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어어……?”
“근데 있지, 우리 세 번째에 추자! 버니, 배워야 해.”
심각한 표정으로 내뱉은 버니의 말에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하곤 고개를 기울였다.
“으응… 배워……?”
“요기.”
버니가 간식을 바리바리 양손에 들고 벽에 툭 기댔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소년 소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버니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이윽고 동공이 아주 조금 길쭉해졌다. 한껏 집중한 탓에 동공이 살짝 가늘어진 것이다.
버니는 한번 본 것을 쉽게 잊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나 몸을 움직이는 건 한번 보면 곧잘 따라 하기도 했고.
왜냐하면…….
‘버니, 어른이지만 여전히 천재 버니.’
손에 쥔 간식을 야금야금 먹으며 버니는 사람들이 추는 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소년, 안드레 필리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늘 만나면 괴롭히는 녀석들이 버니에게 춤 신청을 해 보라고 억지로 떠밀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끔찍한 꼴을 맞이하게 해 줄 거라면서.
짓궂게 구는 무리의 우두머리는 후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후작 부부가 아주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가문에 큰 문제가 생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낱 남작가의 자제인 소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롭힘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직 약혼자와도 춤을 추지도 않은 상대에게 춤 신청을 하는 건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물론, 버니는 그런 사교계의 암묵적인 규칙 따위는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이상한 애.’
아까도 그렇게 소란을 피우더니.
하필 버니에게 당한 영애 중 한 명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 후작가의 영식이 좋아하는 영애였던 터라, 버니도 제대로 찍힌 게 분명했다.
사교계의 영애, 영식들이라면 대부분 저 후작가의 후계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곤 했다.
그는 잘나가는 사교계의 사람들과 무척 친하기도 했고, 소년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으니까.
사교계에서 찍힌다는 건 가문의 작위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고 불합리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가자.”
안드레 필리프가 창백하게 질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벌써 두 번째 곡이 끝나 있었다.
버니가 안드레를 끌어당겨 연회장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너 춤 잘 춰?”
“어……? 그, 그냥… 조금…….”
“버니, 처음이니까 네가 잘해야만 해.”
“어……? 처음? 진짜 처음……. 아니, 그럼 배운다는 게 처음이라 배운다는…….”
한껏 까치발을 든 버니가 코를 쓱쓱 문지르더니 안드레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곤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처럼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틀리면 분명 비웃음을……!”
“괜찮아.”
노래가 시작되고 서로 인사를 시작했다. 버니도 아차 싶은 얼굴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푸핫.”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안드레의 귀에 이명처럼 머릿속을 웅웅 울려 댔다. 그뿐이랴,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고,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안드레는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띌 정도로 새하얗게 질렸다.
‘비웃음당할 거야. 웃음거리로 남을 거라고. 평생 이제 이렇게 놀림이나 받으면서…….’
주춤.
안드레가 한 걸음 물러난 순간이었다.
탁, 안드레를 붙잡은 버니가 음악에 맞춰 소년을 잡아끌며 발을 움직였다.
실상 댄스 수업 때 질리도록 배운 춤이었던 터라 반사적으로 버니를 따라가며 자세를 잡은 안드레의 눈이 확 커졌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