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acle of the Villainous Baby RAW novel - chapter (3)
악당 아기님이 예언을 함 3화(3/125)
“그리고 여기가 아가씨께서 앞으로 지내실 유디아 공작가의 별채입니다.”
“에…….”
어느새 멈춰 선 로덴 하이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택을 본 버니의 눈이 죽 찢어졌다.
‘안 하얗고 안 번쩍하고 심지어 저기보다 작아.’
그러고 보니 주변도 한결 조용해졌고, 번쩍번쩍함도 줄어들었다.
“오늘부터 버니 아가씨는 유디아 공작가의 52번째 방계이십니다.”
“…오십이?”
“네.”
숫자인가?
단풍잎같이 오동통한 두 손을 펼친 버니가 하나둘 숫자를 세어 보다가 고개를 툭 기울였다.
“로뎅, 오십이는 이십이보다 커여?”
“아, 이십이 두 번 있고 거기에 또 열두 개가 더 있는 겁니다.”
휘이이잉—
싸늘한 바람이 버니와 로덴 하이너 사이를 스쳐 지났다.
‘이십이 두 번이구 열둘이구…….’
버니의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썼지만 아무리 여러 번을 써도 부족했다.
아무튼, 엄청 큰 숫자!
“버니, 공자까 아가씨……?”
“네, 버니 아가씨는 52명의 아가씨와 도련님 중에 16번째 아가씨이십니다.”
와장창!
짱짱 센 악마 아빠와 하하 호호 웃으며 악마 아빠의 품에 안겨 뱅글뱅글 돌던 상상이 큰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이상하다. 동화책에선 대부분 주인공이 혼자서 악마 아빠를 호구 잡아 사랑을 독식해서 짱 귀여운 아가 시절을 지나 왕 큰 대마왕이 됐는데…….
52명 아기……?
악마 아빠 허리 휘어…….
일단, 52명이나 있으면 버니는 눈에 띄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버니, 인생 개폭망……?!’
루리엘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자주 했던 말버릇을 떠올린 버니가 털썩 바닥에 무릎 꿇었다.
“아가씨?”
놀란 표정의 로덴 하이너가 달려와 급히 버니를 부축해 바로 세워 주었다.
버니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 * *
“로뎅.”
“네.”
“버니두 저기 살구 시퍼여.”
찾아온 울적함을 한 차례 떨쳐낸 버니가 손가락을 들어 번쩍번쩍하고 새하얀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버니의 눈을 보던 로덴 하이너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는… 서열 5위 안으로 들어가시면 가실 수 있는 곳입니다.”
“서열… 5위?”
“네. 아가씨께선 오늘 오셨기 때문에 서열 52위이십니다.”
“그게 몬데……?”
“서열은 음…….”
로덴 하이너는 잠시 망설인 끝에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가장 공부를 잘하는 사람 순위입니다.”
“곤부……?”
“네.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생필품… 그러니까 식사와 옷, 집 그리고 최소한의 용돈은 제공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가씨께서 직접 구하셔야 합니다.”
로덴 하이너가 버니의 뱅글뱅글 도는 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롱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그는 한결 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이해가 되셨을까요?”
“웅……. 버니, 거지니까 일해?”
“예? 아…….”
노골적인 버니의 언사에 로덴 하이너가 멈칫했다.
“아뇨. 여기서는 수업에 잘 참여하시고 공부하셔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시면 됩니다. 점수를 많이 받아서 서열이 높아지시면… 용돈도 늘어나고, 나중에는 개인 기사와 하녀까지 고용할 수 있습니다.”
기사, 하녀!
공작가 아가씨!
눈을 반짝 빛낸 버니가 작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주먹을 꼭 쥐었다.
“버니 똑또캐!”
루리엘이 항상 버니는 천재라고 했다.
왜냐하면 버니는 뭐든지 보면 단번에 따라 할 수 있는 왕 큰 대박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리엘도 항상 버니에게 뭔가를 많이 가르쳐 줬다.
용기를 얻은 버니의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분홍빛 눈동자에, 결국 로덴 하이너의 딱딱한 얼굴이 흐물흐물하게 풀리더니 옅은 호선을 그렸다.
“…….”
머뭇거리던 그가 손을 뻗다가 아차 싶었는지 멋대로 올라가던 손을 내리려는데, 버니가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쓰담쓰담 조아여!”
“크흠. 그, 그렇습니까?”
로덴 하이너가 부들부들한 버니의 물빛 머리카락을 두어 차례 살살 쓰다듬었다.
“똑똑하시면 금세 순위를 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웅! 로뎅은 버니 거에여?”
버니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로덴 하이너가 멈칫했다.
“아뇨. 저는 40위부터 52위 순위에 계신 아가씨와 도련님들이 필요하실 때마다 도와드리고 있는, 이른바 공동 기사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콰과광!
‘로뎅, 버니 거 아냐.’
충격받은 버니가 휘청휘청 로덴 하이너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기사도 없어?’
그럼, 버니 진짜 거지…….
“이쪽은 식당입니다.”
로덴 하이너는 새하얀 건물보다는 다소 작지만 그래도 커다란 저택 내부를 안내해 주며 필요한 생필품을 받아 버니를 2층에 있는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며 가며 여러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버니보다 큰 아이들이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는 혼자 생활하시게 될 테지만,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여기 계시면 조만간 담당 하녀도 인사를 드리러 올 겁니다.”
“하녀는 버니 거?”
“아뇨, 마찬가지로 40위부터 52위 순위에 계신…….”
시무룩.
로덴 하이너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버니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공작가 아가씨의 길, 너무 멀어…….’
로덴 하이너가 말을 하다 말고 뚝 멈췄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할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방계인 아이를 데리고 온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장 한쪽이 콕콕 찔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뎅, 안냥히 오세여…….”
버니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푸욱 한숨을 내쉬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쏙 들어갔다. 로덴 하이너가 빼꼼 열린 문을 좀 더 활짝 열고서 입을 열었다.
“네,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언제든 찾아 주시고, 저도 자주 살피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푹 쉬십시오. 저녁 식사는 시간 맞춰서 아까 식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엥…….”
탁.
문이 닫히자 버니는 작은 발을 뽈뽈뽈 움직여 작은 방을 둘러봤다.
반짝반짝한 보석도 없고!
침대 위에 샤르르 하는 하늘하늘한 예쁜 장막도 없고!
“킁킁. 꾸링내.”
뭔가 구린 냄새도 났다.
그래도 혼자만 쓸 수 있는 방이다. 보육원에선 항상 친구들과 함께 방을 써야 했기 때문에 사실 지금도 꽤 좋은 일이었다.
“우음.”
버니가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저었다.
루리엘의 ‘어린이 마족을 위한 로판 28선’에 의하면 대마왕이 되는 아기들은 전부 힘든 환경에서 자라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짱 센 악마 아빠가 발견하는 수순이었다.
<고아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황녀?!>라든가, <사실은 내가 진짜의 진짜의 진짜였다>라든가, <마족 서열 꼴찌인 내가 사실은 대마왕이었던 건에 관하여>라든가.
“아기님, 원래 대마왕이 되려면 시련이 많은 법이에요. 하지만 괜찮아요. 루리엘의 수첩만 있으면 시련 따위 단숨에 해결!”
“당숭이 해결!”
“네. 그러니까 아기님, 이 루리엘이 없어도 잘하고 계셔야 해요.”
착한 아기는 머리 쓰담쓰담.
슬쩍 짤막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버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버니, 시련 중!’
꼬물꼬물 토끼 가방을 벗어 다리 사이에 내려 둔 버니가 단풍잎 같은 작은 손으로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불룩불룩한 근육질 토끼의 안에서 용기가 샘솟는 대마왕 곰돌이 인형과 나쁜 꿈을 쫓아 주는 토끼 인형 토토가 나왔다.
버니는 코끼리가 금화를 끌어안고 앉아 있는 모양의 저금통까지 꺼내 줄지어 늘어놓았다.
그리고 한층 잘록해진 토끼 가방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어 휘적거리며 어린이용 도마와 식칼, 그리고 루리엘의 비법 수첩까지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까 용돈이라고 생필품과 함께 받았던 천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이윽고 천 주머니를 연 버니의 눈이 한껏 가느다래졌다.
버니가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툭, 데구루루.
“…공자까 쪼잔.”
데굴데굴 떨어진 것은 겨우 금색 동전 하나였다.
“버니가 더 부자야.”
코끼리를 양손으로 들어 짤짤 흔든 버니가 한숨을 푹 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실 버니의 저금통에 든 것은 전부 거무튀튀한 동색 돈이었고, 공작가가 내준 것은 번쩍번쩍한 금화로 그 값어치가 현저히 달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