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acle of the Villainous Baby RAW novel - chapter (43)
악당 아기님이 예언을 함 43화(43/125)
“버니, 결혼하기로 한 거 무르기 없기야?”
“우웅.”
해사하게 웃은 로엘이 버니를 달랑 들어 품에 휙 끌어안았다.
9살짜리가 4살짜리를 끌어안은 모습이라 어딘가 조금 버겁게 보였지만 말이다.
“웅. 버니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는 훌륭한…….”
버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인간. 대빵이, 버니 거.”
무사히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한 버니가 코밑을 쓱쓱 문질렀다.
“응, 버니 거야. 그리고 난 로엘이야. 앞으론 로엘이라고 불러 줘.”
“노엘.”
“아냐. 로.엘.”
“웅. 노.엘.”
“음, 발음이 안 익숙한가? 듣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그때 들었던 마족어 같은 언어는 꽤 또렷하게 들렸었는데 말이다.
‘역시 버니는 마족, 이겠지?’
말도 묘하게 어눌하고, 어법도 맞지 않고, 어순도 어긋나 있다.
뭣보다 그때 들었던 독특한 말.
그러나 마족의 특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신수를 소환했다는 건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모든 마족은 그 불길한 색을 품고 있다. 또한 신성력에는 한없이 취약하다.
그럼에도 신성력의 결계로 둘러싸여 있는 유디아 공작가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 신성력이 버니에게 있어서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상관없지.’
어차피 자신은 버니의 것이 되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바랐다.
그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서 누군가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면, 뭐든지 할 거라고.
그날, 버니가 나타난 것은 그에게 구원과 같았다.
마족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버니가 그를 구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는 구원받았다.
어딘지도 모르는 춥고 서늘하고 오싹한, 끝없는 무저갱 속에서 그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끝없이 헤매고 떠돌았을 뿐인데.
잠을 자도 그곳은 지옥이었고, 눈을 뜨면 현실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저주를 받아 황족의 상징인 금발과 황금빛 눈동자를 잃은 그를 사람들은 멀리하고 기피했다.
마치 전염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를 피하고 꺼리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머잖아 죽을 시한부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인 아바마마가 자신을 대신할 사촌을 이미 황성에 들인 것을.
아바마마는 황제다.
한 사람의 부모로만은 있을 수 없는 황제.
적절한 조치였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죽지도 않은 자신을 두고 죽은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그것에 속내가 몇 번이고 뒤집혔다.
알고 있었다.
전부 알고 있었다.
로엘, 자신조차도 죽음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따뜻한 온기가 섞인 작은 손이 닿은 순간, 그간의 모든 아픔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졌다.
정확히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해야겠지.
그 지옥과도 같은 무저갱의 끝에서 로엘은 보았다.
고독과 절망, 그리고 지옥의 냉기를 품은 듯 그저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 한가운데 고고하게 선 채 선명하게 빛나는 어떤 여자를.
새까만 머리카락.
기괴하게 꺾이며 머리 위로 솟은 검붉은 뿔.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
그리고 반짝거리는 짙은 분홍색 눈동자.
소문으로만 들어 봤던 마왕의 형상이 딱 저러할까?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 아름다움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자의 시선이 로엘에게 닿았다.
여자는 손을 뻗었고, 로엘은 땅바닥에 구멍이 뻥 뚫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감각을 느꼈다.
그 깊고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며 로엘은 보았다.
“나도…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야.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보호해 준다고 했으면서……. 왜 나는… 왜, 왜, 왜 나는…….”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폐허가 된 어딘가에 우뚝 서서 무표정한 낯을 한 채 죽은 눈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을.
반쯤 새까맣게 물든 물빛 머리카락과 반쯤 붉게 물들어 일렁거리는 분홍색 눈동자.
공허하게 보이는 그 눈빛이 위에서 만났던 그 여자와 꼭 닮아 보여서…….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불현듯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꿈인지, 아니면 무의식인지, 어쩌면 언젠가의 미래인지 모른다.
로티스 왕국은 태초에 황금용에 의해 세워져, 지금도 황족에게는 황금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구전도 있으니까.
그래서 때때로, 황족 중에선 시간시(時間示)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꿈을 통해서 때때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거나 때때로 이미 일어났었던 일을 훔쳐보는 일.
그 시간시가 제게 발현한 건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너무 힘겨운 나머지 꾸었던 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엘은 그 공허한 곳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여자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우는 소녀를 곁에서 달래 주고 싶었고,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본 것이 언젠가 일어날 미래라면… 로엘은 그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설령 이 작은 아이가 마족이면 또 어떤가.
허공에 아무리 빌고 울부짖어도 누구도 알아 주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을, 이 아이만큼은 알아 주었다.
믿지 않던 신에게 빌어도 들어 주지 않았던 제 외침에 버니만큼은 귀 기울여 주었다.
“이제 갠차나.”
이뤄지지 않았던 소원을 이뤄 주었다.
버니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분명히 그랬겠지.
“버니.”
“웅?”
“고마워.”
로엘의 말에 버니는 말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활짝 웃었다. 오동통한 뺨이 유독 눈에 띄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 * *
“아빠!”
“버니, 슬슬 가자꾸나. 시간이 너무 늦었어.”
키리엘이 피곤한 낯으로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어두운 낯이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었다.
“아빠, 안 번쩍번쩍.”
흐트러진 키리엘의 차림을 훑은 버니의 평가에 그가 멈칫하며 피식 웃었다.
정말 제 딸은 자신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나락까지 처박혀 있던 기분이 이 몰랑몰랑하고 아기 냄새가 나는 것을 품에 안았다고 위로 쭉 올라왔다.
‘이래서 애를 키우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그는 아이의 등을 두어 차례 토닥거렸다.
“아빠. 버니 겨론하기루 해써여.”
갑작스러운 딸아이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키리엘의 얼굴이 한껏 굳었다.
“…결혼? 누구랑?”
“인간 대빵이랑.”
버니가 손가락으로 황태자를 가리키자, 키리엘과 함께 도착한 황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로엘이 활짝 웃었다.
“인간 대빵이, 버니 거 한대여.”
“…우리 딸이 제법 유머 실력이 있군.”
“으잉?”
키리엘이 로엘과 황제를 보았다.
황제도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퍽 즐거운 낯으로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농담은 그만하고 이만 가자꾸나.”
키리엘은 아예 못 들은 척을 하기로 했는지 몸을 돌려 버렸다.
“아, 소공녀. 내가 미처 말을 못 했구나. 로엘을 살려 준 감사의 표시로 뭔가 원하는 걸 주고 싶은데, 혹시 가지고 싶은 게 있니? 뭐든 좋단다.”
황제의 말에 버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인간계!’
버니는 인간계를 정복하는 왕 큰 대마왕이 될 예정이니까, 미리미리 받아 두면 좋을 것 같았다.
“버니 인……!”
잠깐.
지금 인간계라고 말하면 위험한 거 아닐까?
버니가 대마왕을 꿈꾸고 있는 왕 큰 마족이라는 걸 눈치채고 인간 대빵이가 버니를 가루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버니는 입을 꼭 다물더니 재차 눈에 힘을 주었다.
“인?”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버니는 키리엘과 눈이 마주치곤 멈칫했다.
‘버니, 효도해.’
흐흥.
버니가 히죽 웃었다.
“인…형처럼 예뿐 엄마여!!”
버니가 키리엘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쩌적.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