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acle of the Villainous Baby RAW novel - chapter (86)
악당 아기님이 예언을 함 87화(86/125)
키리엘은 손을 들어 아이의 작은 등을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버니가 칭얼거리듯 키리엘의 가슴팍을 꼬물거리며 파고들었다.
“따님, 가기는 어딜 가겠다는 거니.”
“…….”
“아무 데도 안 보낼 거다. 버리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쓸모가 없어도 되고, 그런 정보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괜찮아. 고대 엘프어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빠가 황실 가서 황제 앞에서 다 뒤엎고 오마.”
언제나처럼 나른하고 언제나처럼 고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버니의 눈이 한껏 커졌다.
“떼를 써도 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얼마든지 어리광을 부려도 된단다. 혼자서 뭐든 하지 않아도 돼.”
“…….”
“아직 아가잖니. 아빠한테 좀 더 의지해 주렴. 나는… 네가 어린아이처럼 그냥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거든.”
“하지만… 그러면 훌륭한 어른이 대지 못해서 왕 큰 대마앙이 안 대면 어떡해여?”
버니의 말에 키리엘이 나직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니의 뺨이 기쁨에 젖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땐 조금 덜 훌륭한 아빠 딸이 되는 거겠지. 안 되면 아빠가 되게 해 줄게.”
눈을 두어 차례 깜빡거린 버니가 킥킥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대로 키리엘의 목을 냉큼 끌어안았다.
“아빠, 조아여!!”
“나도.”
키리엘이 버니의 등을 토닥거리며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시선을 내려 수첩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우리 따님은 좋단다.”
* * *
“버니! 어서 와.”
“어? 노엘이다. 건강해?”
“노엘 아니고 로엘. 덕분에 괜찮아졌어. 건강해. 아바마마께서 오늘 네가 온다고 하시길래 내가 마중 나왔어.”
활짝 웃은 황태자, 로엘이 순식간에 버니의 앞으로 다가와 환영한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웅. 안냥, 아니고 안녕.”
버니가 달려온 로엘을 보곤 그다지 흥미 없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키리엘의 다리에 답삭 달라붙더니 그대로 나무늘보처럼 덜렁 매달렸다.
“앗, 나랑 손잡고 가자. 내가 안내해 줄게, 버니.”
“버니, 오늘은 언숭이 같은 기부니.”
“원숭이? 그래서 매달리는 거야? 으음, 내가 ‘장인어른’의 다리에 매달릴 수도 없고…….”
장인어른?
키리엘이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 황태자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황태자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가 한낱 작위도 없는 공작가의 공자에게 말이다.
‘황제 핏줄 아니랄까 봐 영악한 여우 같기는.’
예전에는 적당히 고개를 까딱여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게 전부였던 소년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씌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예의 바르게 보였다.
제 딸이 귀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딸 좋다고 달려드는 어린애와 기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마찬가지로 황태자를 따라 나왔던 시종들이 보이지 않게 숨을 크게 삼켰다.
‘황태자 전하가…….’
‘웃으셨어?!’
‘그것도 저렇게 크게 웃으시다니…….’
그들이 기억하는 황태자는 오만불손 그 자체인 소년이었다.
황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누구도 불만을 가지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또래에 맞지 않게 무뚝뚝하고 엄숙한 느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보라.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두 팔을 활짝 벌리고도 무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니를 다리에 매달고 무심하게 걸어가는 키리엘의 옆을 졸졸졸 쫓아가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마치 제 또래의 무해한 어린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키리엘 유디아라니…….’
‘키리엘 유디아가 아이를 다리에 매달고 걷고 있어…….’
‘이번에 딸을 입양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오늘만 몇 번을 경악하는 건지.
사용인들은 떡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며 숨을 삼켰다.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신전에 틀어박힌 채 황제가 백날 불러도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던 남자가 다리에 혹 덩어리 같은 여자애 하나를 달고 무심하게 걸어가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버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치니까 혹시 힘들면 말하렴.”
“네엥.”
게다가 아이를 대하는 게 익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버니, 저번에는 미안했어. 나 때문에 곤란했지? 아바마마께도 많이 혼났어. 그리고 구해 줘서 고마워.”
“노엘 구해 준 거 버니 아니고 아빠.”
버니가 손가락으로 키리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키리엘은 다리에 잘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버니를 내려다보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엘이 냉큼 몸을 돌려 키리엘을 보았다.
“아! 장인어른도 감사합니다.”
“…그저 딸을 구하러 간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좀 고치면 좋겠군요.”
키리엘이 미간을 좁힌 채 다소 불만을 토하자, 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인어른이 불편하시면 아버님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하세요. 약혼 예정인 친구 아버지에게 경어를 듣고 싶지 않거든요.”
“…….”
영악한 로엘의 말에 키리엘이 낮게 침음했다.
그러나 겨우 뭣도 모르는 5살과 9살짜리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기는 했다.
“폐하께서는?”
“아바마마께서는 응접실에 계십니다. 오늘 아버님과 버니는 그저 저희와 다과를 하러 오신 거니까요.”
눈꼬리를 둥글게 휜 로엘의 말에 키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논의한 결과, 이 일은 아주 비밀리에 진행하고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참관하는 것도 황제와 키리엘, 그리고 버니뿐이다.
더불어 입이 무거운 황제의 그림자들까지.
어째 보아하니 황태자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버니.”
“넹?”
“원숭이가 되고 싶은 기분이 끝났으면 이만 내려오렴.”
묵직한 아이 하나를 한쪽 다리에 매단 채로도 덤덤하게 걷던 키리엘은 황제와 만나기로 한 응접실에 도착하고서야 제 다리에서 폴짝 뛰어 떨어지는 버니를 보았다.
버니는 정말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른스러운데 동시에 엉뚱했다는 말이다.
키리엘이 버니의 손을 잡고 고개를 까딱하자, 황제의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두 사람의 방문을 알렸다.
“들어오게.”
황제의 허가와 함께 버니가 키리엘과 손을 꼭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다가온 로엘이 버니의 다른 쪽 손을 살짝 잡았다.
“이런, 먼 길을 오게 했군.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
“힘들었습니다.”
“자네한테 안 물었다네, 유디아 공자.”
황제가 웃는 얼굴로 화려한 디저트와 쿠키가 가득 놓인 소파 테이블을 가리키며 버니를 보았다.
“태자와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이것저것 준비해 뒀단다. 이리 와서 먹고 싶은 만큼 먹으렴.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구나.”
웃는 얼굴의 황제를 본 버니가 힐긋 키리엘을 보았다.
‘역시 인간 대빵이 더 번쩍번쩍해.’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
아빠가 조금 덜 번쩍거려도 사랑해 주는 것이 바로 버니가 할 일이었다.
버니의 시선을 느낀 키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친 버니가 눈을 깜빡이더니, 돌연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린다.
“걱정 마세여, 버니 의리남.”
훗.
시니컬하게 웃은 버니가 당당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리엘이 입을 열었다.
“…버니는 여자니까 의리녀겠지.”
어떤 맥락에서 흘러나온 의미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의리가 있는 여자라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키리엘은 버니를 달랑 들어 소파에 앉혀 주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