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utcast Writer of a Martial Arts Visual Novel RAW novel - Chapter (381)
무협 미연시의 오랑캐 글쟁이-381화(382/674)
EP.382 투문 – 11
“여기가 투문향주 추대를 위한 의식이 치러질 곳이래요.”
하연 소저의 안내에 따라, 투문 향주 추대 의식이 열릴 장소로 가니, 전혀 의외의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는 가끔 왔었던 전각 아니오?”
하연 소저와 밤 산책을 하러 오거나, 그녀가 가출했었을 때 왔었던 전각 아닌가.
도둑들의 소굴이라더니. 열려라 참깨를 외치면 포쾌에게 40인의 실적이 떨어지는 비밀장소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공교롭네요.”
“투문에서도 이 전각이 경치 좋은 건 알았나 보군.”
전각 지붕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시야가 탁 트인 것이 정찰하기에도 산책하기도 최적의 요충지였다.
“시간은 조금 남은 것 같네요.”
너무 서둘러서 왔나. 태양은 냉탕에 조심히 발가락을 가져다 대는 아이처럼, 장강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추대 의식에 대해 따로 들은 건 있소?”
“무슨 시험 같은 거라고 들었어요.”
“설마? 인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쪽지 시험을 들이밀며 성적에 반영한다는 교수만큼 질색이라고.
“마문이랑 마찬가지로, 의례적으로 하는 건가 봐요.”
시험이라기보단, 새 학기에 하는 자기소개의 도둑 버전 같은 건가.
자기소개도 괴롭긴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겐 관심이 없다라느니. 이중에 미래인, 초능력자가 있으면 친구 하자느니만 말하지 않으면 무난한 도둑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긴장되오?”
하연 소저의 얼굴이 단단히 경직되어 있네. 시험이고 의식이고 결국 마지막 한 계단만을 남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나.
“아니, 뭐 그런 거까진 아니고요.”
“아니면 혹시 제갈 소저 일로 기분이 좀…….”
“그런 걸로 안 삐지거든요!”
하연 소저는 어이없다는 듯, 내게 답했다.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닌데.”
긴장을 풀어줄 겸 웃자고 농담한 건데.
“제갈 소저도 나 때문에 많이 참았으니까요. 겨우 그 정도로 양보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상황에서 당신이 몇 마디 말밖에 안 했다면, 내가 뭐라고 했을 거예요.”
하연 소저의 눈에서 제갈 소저에 대한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하하. 그렇소?”
내가 봐도, 요새 부쩍 두 사람이 친해지긴 한 것 같다. 서로 어려워하던 것이 사라지고, 누가 보면 자매 같아 보이기도 했으니까.
“단지…….”
“단지?”
“자연스럽게 나오는 기분까진 어쩔 수 없더라고요…….”
하연 소저는 부끄러운 듯, 지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으읏! 내가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하연 소저는 내 수작에 당했다는 듯,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이리 오시오. 우리 시간 될 때까지 앉아서 노을 구경합시다.”
나는 지붕에 앉아 왼쪽 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연 소저는 내 옆자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하연 소저의 머리는 어느새 내 어깨에, 내 손은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가 있었다.
**
노을이 지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말없이 태양이 저물어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쩌면 많은 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연인과 말없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에 들어차 있는 긴장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만족감과 행복함을 채우기도 하는 법이니까.
“여기서 야경은 봤어도 노을이 지는 건 처음 보는군.”
남자는 여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보이자, 그제야 말을 꺼내었다.
“나도 처음 봐요.”
석양은 장강을 붉게 물들이고, 햇빛은 강을 타고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다.
임하연은 연인의 어깨에 기댄 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을 눈에 새겨넣고 있었다.
“이제 끝이네요.”
길었다.
우산 교방에서 의창 다서각을 지나, 무한 객잔에 이르러 무영신투 생활까지. 기녀의 신분을 벗어던지기 위했던 여정이 끝을 보이고 있다.
“이제 시작이요.”
임하연은 자신의 손등 위로 느껴지는 연인의 손길에,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언제나 그렇듯 안심하라는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이요?”
“나와 하연 소저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요.”
“읏.”
어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파고드는 말만 하는 건지.
그녀의 마음에 또다시 분홍빛 화살이 날아와 박혔으나, 상관없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한 남자를 위한 과녁이었으니까.
“당신 덕에 여기까지 어떻게든 왔네요.”
“하연 소저니까 여기까지 온 거요.”
해가 지고 밤이 오면, 이제 끝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다시 태양은 뜨니까. 평생을 괴롭힌 신분을 벗어던진 뒤에도, 자신의 옆에는 연인이 있으니까.
임하연은 그의 손길을 느끼기 위하여, 조심히 그와 깍지를 꼈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어, 그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빨라지고 있다.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날.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에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두려움에 떨며 세상에 처음 나와, 처음 만난 남자. 자신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준 남자. 손을 뿌리쳐도, 별거 아닌 양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어주었다.
다정하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별거 아닌 양 선물을 주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준 남자.
모두 이 남자였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인생이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임하연은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찬 남자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나도 하연 소저와 함께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하지만 아직 마지막 계단이 남았소.”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 분위기를 더 잡아주면 좋을 텐데. 사람 마음을 엉망으로 흔들어놓고 빠져나가는 솜씨는 천연인지, 의도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남자에 대해 수없이 방황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사랑했던 날이 얼마였던가. 이제 남자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법쯤은 알고 있다.
임하연은 살짝 분한 표정으로 애정을 갈구하듯, 그에게 양팔을 펼쳤다.
“나 역시 질투 나요. 안아줘요.”
그는 놀란 듯, 잠시 자신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듬직한 가슴을 벌려 자신을 안아주었다.
좀 더 빨리 안아달라고 할걸. 임하연은 그의 품을 만끽했다.
**
역시 긴장되는 걸까.
하긴,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 그녀의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어깨가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으…….”
그녀는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었는지 자연스레 몸에서 떨어졌다.
“음?”
“왜, 왠지 아까 제갈 소저의 마음이 이해될 것 같아요.”
하연 소저는 고개를 돌리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 소저. 이제 한 가지 시련만 남았소.”
“그러네요.”
하연 소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망울이 눈 한가득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같은 눈을 가진 분홍 머리의 무영신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기 힘든 미모. 원래라면 호북성의 제일가는 기녀가 되었을 그녀의 아름다움을, 내 눈으로 독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전각 위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오?”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우리에게 문제가 너무 많아서, 마음에 답을 주기 어렵다고 한 거요?”
“그 말은 얼마 뒤에 답을 주었잖소. 그 말 다음 말이요.”
서로의 마음을 나눈 뒤에 하려고 했던 것이 있잖아.
“그 말 다음이요? 아?!”
깨달은 걸까.
하연 소저의 푸른 눈이 일순간에 커졌다.
“생각났소?”
서로의 터질듯한 마음을 교류하려다가, 어이없는 오해가 밝혀져 멈춘 일 말이야.
조금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그, 그게 왜요?”
하연 소저는 점점 가까워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떨었다.
나라고 마음을 준 여인의 손만 잡고 싶었겠는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왜 포옹 한번 안 했겠는가.
‘한번 자제심이 무너지면, 끝도 없이 무너질 테니까.’
도주 기녀이니 손대지 말거라. 괜히 서로 힘들어질 수 있다. 나도 더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하고 싶어도, 하연 소저의 미래를 위해 참았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한 가지 관문만이 남아있다.
어느새 서로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조선에서 사용하는 용기의 주문이 있는데 한번 받아보겠소?”
“어, 얼마나 걸려요?”
“하연 소저가 원하는 만큼.”
“그럼……. 오래 해줘요.”
서로의 숨결을 품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크흠.”
도무지 끝날 줄 모를 것 같은 용기의 주문은 뒤에서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두 사람 다, 전에 보았던 투문의 간부가 와있다는 사실은 옛저녁에 알고 있었다. 단지 이미 불이 붙은 두 사람을 떨어트리려면, 투문의 간부가 직접 찬물을 끼얹어야 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아쉬운 시선으로 서로의 것으로 번들거리는 연인의 입술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끝낼 시간이었다.
“…….”
연인은 서로 굳이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서로의 얼굴이 붉은 노을만큼 붉었으니까.
“해가 지면 바로 시작하겠소. 향주 대리께선 사람을 따라 추대식장에 먼저 가 있으시오.”
말 안 하면 추대 의식보다 다른 걸 먼저 할 것 같군. 투문의 간부는 굳이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연 소저.”
“용기는 충분히 받았으니까. 기다려줘요.”
“기다리고 있겠소.”
강윤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투문의 사람을 따라갔다.
용기는 충분히 받았다. 임하연은 굳이 강윤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는 앞을 볼 차례였으니까.
————–
“의식을 거행하겠소.”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다. 지금이라면 하늘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임하연은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누구?”
어느새 무한에 어둠이 깔렸다. 전각 위에는 익숙한 얼굴의 간부 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열 명의 무인이 자리에 서 있었다.
“투문의 간부 10인이요. 가장 경공이 뛰어난 10인이기도 하지. 이들이 흰 머리띠를 한 채, 무한의 밤을 누빌 거요.”
간부의 말대로, 무인들의 머리에는 흰 머리띠가 씌워져 있었다.
“내가 뭘 하면 되죠?”
“흰 머리띠를 빼앗으시오. 빼앗긴 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충성 맹세를 할 것이오.”
“통과 조건 같은 거라도 있나요?”
“없소. 해가 뜰 때까지 아무 머리띠도 못 잡는다면, 투문 향주가 된 이후에도 충성이 아니라 불신의 시선을 받을 뿐이요.”
탈락은 없다. 단지, 새로운 투문 향주의 능력을 간부들 앞에 보여주는 자리일 뿐.
“시작은 바로 하나요?”
“동전을 튕기는 즉시 여기 있는 자들이 움직일 거요. 투문향주는 동전이 전각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닿는 즉시 움직이시오.”
임하연이 있는 곳은 무한의 전경이 보이는 높다란 전각의 지붕. 동전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니. 그 사이에 경공의 고수들은 아득히 멀어질 것이다.
하나라도 잡는 게 기적인 시험이니, 다 못 잡아도 괜찮다. 그러나 새로운 투문향주의 능력을 입증하기엔 제격일 것이다.
과연 투문의 의례라고 할만한 시험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임하연은 주변의 간부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물어보시오.”
“전대는 몇 명이나 잡았죠?”
전대 투문 향주이자, 전대 무영신투. 임하연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물었다.
“여덟. 투문 역사상 가장 많은 수였소.”
대도시 무한에서 두셋을 잡아내도 기적이건만. 전대는 여덟을 잡아내었다.
괜히 투문의 사람들이 10년의 잠적 동안에도, 향주에게 충성하며 그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요?”
임하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전대에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간부 몇 명이 그 미소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투문에 역사를 남기신 분이다. 그 딸이라고 하나, 아버지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야 한다.”
“예비 향주의 업적은 인정하나. 어디까지나 그분의 딸이기에 동의한 것을 잊지 말도록.”
“10년 만에 추대된 투문향주님이시다. 어딜 무례하게!”
“흥!”
투문의 간부 대부분이 임하연의 향주 추대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전대에 대한 충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임하연은 그 말에 대꾸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을 뿐이었다.
마지막 시험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자처럼.
그 모습에 누군가는 새로운 향주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하기도, 아비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모습에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전각 위가 고요해지고, 모든 준비를 끝마친 간부가 동전을 들어 올렸다.
“시작하겠소.”
동전이 튕겼다.
무한을 도도히 가로지르는 장강의 물결처럼, 뒷물에게 밀려날 바엔 먼저 나아가겠다는 앞 물과 같이, 간부들은 전각을 박차 올랐다.
임하연은 떨어지는 동전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주 기녀로서 잡혔을 것이다. 도문향주가 망주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자신은 평생 도주 기녀로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녀로서 만족하며 살았을까. 아니.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저주했을 것이다.
어쩌면 진상을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도주 기녀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한 기녀이자 도둑. 자기 자신을 혐오하며,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동시에 하게 되지 않았을까.
임하연의 생각은 옳았다. 강윤호와 만나지 못한 미래, 그녀의 운명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청산했다. 싫어하던 도둑이 아니라 의적이 되었다. 연인과 같이 위기를 겪으며, 자신이 익힌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의 임하연은 모든 미혹을 떨쳐버린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그러면 말이에요.”
동전은 아직 떨어지고 있다.
“질문은 끝이다! 이미 시작했다!”
길고도 긴 짧고도 짧은 시간. 동전이 땅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 적응한 그녀의 눈이 떠졌다.
미혹을 떨친 여인의 발이 움직였다.
“무, 무슨?”
임하연의 손에는 이미 머리띠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전부 잡으면, 바로 추대식을 시작하는 거겠죠?”
달밤에 꽃 한 송이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었다.
원래라면 피지 못했어야 할 꽃의 이름은.
무영신투. 임하연.
세상이 인정한 신투의 재능을 가진 여인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