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verly Competent Junior Employee RAW novel - Chapter (533)
말단 사원이 너무 유능함 533화(533/797)
말단 사원이 너무 유능함 533화
“네? 책이요?”
그날 오후, 도경은 업무 마감 보고를 하던 이지훈을 향해 오전에 걸려온 최우진과의 전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한국에서 투자자 서한이 돌고 있나 보더라고요.”
“이것 참…… 그 양반들. 한자리에 있는 양반들이 그걸 유출하고 그러네요.”
아무래도 블라인드 펀드는 법인과 기관투자자를 받은 상품이었기 때문에 이지훈의 말대로 투자자 서한을 받은 사람들은 그 투자를 총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애초에 유출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도경은 화를 내는 이지훈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저 대단한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렌 버핏이 쓴 투자자 서한도 유출되는 세상입니다.”
실제로 투자자 서한은 엄청 유출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투자자들을 상대로 보안을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고 여러 가지로 유출을 두려워하는 펀드매니저들이 많았다.
하지만, 도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어차피 지난 한 해의 성과를 이야기하는 차례고, 포지션도 분기마다 13F룰에 따라 공개가 되기 때문에, 이제는 저런 것들을 신경 쓸 바에야 애당초 유출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쓰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제 기분에 맞춰주시려고 과장하신 거 알아요.”
도경이 그리 말하자 이지훈은 머쓱한 듯 코를 훔쳤다.
“참, 그러면 책을 내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도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물론 좋은 기회죠. 저는 늘 다른 투자자들의 관점이 고픈 사람이니까요.”
도경의 말에 이지훈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스 센터에 계실 때였나요? 그때도 한창 보스께서 쓰신 리서치 보고서가 업계에 떠돌았던 게 기억나네요.”
“하하하, 성남 지점 때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그때 보험사에서 채권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동료들이 보고서 하나를 돌려보길래 궁금해서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도경은 처음 듣는 말에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지훈을 바라보았다.
“제가 보고서를 읽고 제일 처음 한 생각은 ‘이 사람은 PB인데 어떻게 채권에 관해서 나보다 더 잘 알지?’라고 생각하면서 놀랐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안 하셨잖아요.”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유성투자증권으로 직을 옮기고 윤도경이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그 보고서가 떠오르더군요.”
“그때 저를 떠올리셨군요.”
“네.”
이지훈은 그때의 감정을 도경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듯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지훈이요?”
“그럼요. 저도 인간인데요. 그런데 보스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주시고 함께 일하면서 느꼈습니다. 아! 이 사람에게 배우면 나도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겠구나.”
“하하하, 그만하세요.”
도경은 손사래를 치며 이지훈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저는 늘 소통이 고픕니다만 책은 조금……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성격상 쓰기 시작하면 대충 쓰지는 못할 텐데, 그럼 이제야 본궤도에 올라왔는데, 일에 소홀할 것 같아서요. 사실 시간이 없는 게 제일 크기도 하고요.”
도경의 말에 이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다 보면 그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올 테니까요.”
“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그나저나 팀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다들 신이 났습니다.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다 보니 일할 맛이 나는 것인지 집에 가지 않고 회사에서 자료를 찾아보는 친구들도 있고요.”
“하하하. 좋네요.”
팀원들이 이런 방향으로 피드백을 주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참, 한국에서 차선태 팀장이 완전히 들어올 겁니다.”
“차 팀장이요?”
“네. 이제 출장을 좀 다녀야 하는데 혼자 다니니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요. 스테판도 독립시켰고요.”
“잘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서를 구하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거든요.”
“저도 새로 구하려고 했는데, 아시잖아요. 저 같은 놈을 감당할 사람은 차선태 팀장밖에 없는 거.”
기실, 며칠 전 차선태에게 미국으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차선태는 승낙했다.
차선태는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도경은 그런 차선태의 마음이 고마웠다.
“내부 좀 잘 체크해 주세요. 다음 달은 거의 출장 일정밖에 없어서요.”
“하하하, 펀드매니저가 사무실에만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지훈의 말에 도경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고, 이지훈 또한 환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 * *
“좀 늦었죠?”
일주일 후, 도경은 급하게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운전석에는 차선태가 앉아 있었는데 차선태는 한국에서 넘어와 시차 적응을 하자마자 도경의 수행을 하고 있었다.
“공항까지 바로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워낙 이야기가 잘 통해서요. 시간을 조금 오버했네요.”
도경은 지난 일주일을 아주 바쁘게 살았다. 마이애미에 있는 기업체와 금융기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펀드매니저의 업무는 주식을 사고팔고,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것도 있었지만, 시장의 정보를 몸소 취득하기 위해 기업의 오너들과 친해져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아무래도 기업의 오너들과 친해지면 그들이 경영하는 기업이나, 아니면 한 산업 내에서 떠도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추는 게 제 업무이니 제가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차선태의 말에 도경은 피식하고 웃었다.
한국에서의 모습처럼 차선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차선태와 함께 마이애미 공항으로 이동한 도경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오늘 두 사람은 뉴욕의 옆에 있는 코네티컷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곳에 있는 인구 6만의 도시인 그리니치Greenwich가 목적지였다.
도경은 눈을 감고 비행기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약 3시간가량의 비행이 끝나고,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내렸고, 차선태가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그리니치로 향했다.
“이 작은 도시에 있는 헤지펀드 숫자가 몇 개인지 아시나요?”
도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운전을 하는 차선태를 향해 물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죄송할 일은 아니고요. 400개 이상이 될 겁니다.”
“네?”
차선태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자 도경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별명이 ‘세계의 헤지펀드 수도’거든요.”
차선태는 창밖의 도시가 색다르게 보였다.
이렇게 평온하고, 조용한 도시가 헤지펀드의 수도라니…….
“뉴욕 바로 옆에 있으니 월가와도 가깝죠. 주의 경계만 넘었을 뿐인데 생활 비용이 70% 이상 줄어드니까요.”
그리니치는 뉴욕주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주의 경계만 넘어도 땅값이 달라졌다.
뉴욕의 고비용과 붐비는 생활 환경을 피해 이곳으로 온 사람이 많았다.
“거기에 세금도 뉴욕보다 적습니다. 법인세도 낮고 개인의 소득세도 낮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헤지펀드 하나가 이리로 이전하자 다른 헤지펀드들도 따라서 이전했어요.”
마치 현재 마이애미의 모습과 같았다.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한 헤지펀드들은 영향력이 큰 헤지펀드가 그리니치로 이전하면 그들을 따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네요.”
도시의 중심지는 마치 50~60년대의 유럽 풍경과 같은 가게들이 있었다.
가파른 경사의 지붕, 목조로 된 골조는 마치 훌륭한 장식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조용한 유럽의 시골 동네와 같은 곳에는 조금은 이질적인 빌딩이 하나 있었다.
물론 겨우 6층짜리 빌딩이었고,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빌딩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고층(?)처럼 보였다.
“같이 올라가시죠.”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있으면 지사장님께서 불편하실 겁니다.”
“하하하,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정말 아닙니다.”
도경은 자신의 농담에 차선태가 당황한 듯 말해오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쉬고 계세요. 행사 시간이 다가와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
도경은 빌딩의 입구로 향했는데, 고급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주자 직원은 도경을 행사장으로 안내했다.
행사장의 문이 열리자 금빛으로 뒤덮인 홀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도경은 압도되는 풍경에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높은 천장에는 눈부신 샹들리에가 찬란한 빛을 내리쏟고 있었다.
“와우.”
도경은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샹들리에 아래로는 긴 테이블들이 차려져 있고, 각 테이블 위에는 은은한 촛불이 타오르며 부드러운 빛을 더하고 있었다.
주변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손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화려하죠?”
도경이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다가와 도경에게 말을 걸었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의 노신사였는데, 매우 푸근한 인상으로 도경에게 인사해 왔다.
“네. 이런 곳은 처음이라 놀랍네요.”
“돈 많은 인간들의 사치이지요.”
노신사의 말에 도경은 피식하고 웃었다.
오늘, 이 자리는 코네티컷에 있는 헤지펀드들의 사교 모임 자리였다.
이 자리를 만든 헤지펀드가 도경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주었고, 굳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여러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저는 유성 인베스트먼츠의 윤도경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다가온 것이고요.”
노신사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말에 도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놀란 얼굴이 재미있습니다. PIF가 연 서밋에서 발표한 내용을 아주 감명 깊게 본 팬이라고 할까요?”
“영광입니다.”
도경은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이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고, 상대는 그 모습마저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저 노인일 뿐인데 영광스럽다니요.”
“저를 알아봐 주시고 일부러 다가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잠시 외로울 뻔했거든요.”
도경의 농담에 노신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PIF 서밋에서 발표한 것을 본 이후에 미스터 윤에 대한 조사를 조금 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일들을 했을지 궁금했습니다.”
노인은 도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중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윤이 행동주의를 아주 많이 했더군요.”
“찾기 힘드셨을 텐데요.”
“글쎄요. 내 부하 직원들은 힘들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저 보고서를 받아 읽은 악덕 상사였습니다.”
“하하하.”
“나도 젊을 땐 행동주의를 많이 했습니다.”
행동주의는 지분을 사들여 한 기업에 경영 참여를 목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항상 얼간이들을 상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죠.”
노인의 말에 도경은 피식 웃음이 터져 버렸다.
자신이 행동주의를 표방하며 했던 투자에서 상대한 경영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윤도 공감하나 봅니다.”
“그럼요. 행동주의를 하는 이유는 기업이 가진 잠재력보다 낮은 실적을 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회사는 분명 더 높은 실적을 낼 수 있는데, 실적이 낮은 이유는 무능하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CEO 때문이니까요.”
“하하하, 역시 말이 통할 줄 알았습니다.”
노신사는 도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가정을 한번 해보죠. 만약 미스터 윤이 이끄는 펀드가 한 기업의 공동 경영인이 되기 위해 투자한다면 어떤 기업에 투자하겠습니까?”
노신사의 물음에 도경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늘 생각했던 기준이 있었으니까.
“첫째로는 20년 이상 존속할 수 있는 기업인지부터 따질 것 같습니다. 지속 가능하지 못한 기업에 고객의 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거든요.”
도경의 말에 노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둘째로는 신뢰할 수 있고, 능력이 뛰어난 경영진이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하셨든 얼간이들을 상대하긴 싫거든요. 또, 경쟁 우위를 갖추었는지, 우수한 수익을 낼 수 있는지도 중요하겠네요.”
도경의 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노신사는 품속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도경에게 건넸다.
“반갑습니다. 나는 트러스트 브로커스의 CEO 래리 무어라고 합니다.”
노신사가 자신을 소개하자 도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트러스트 브로커스. 업계에선 TB라고 불렀는데, TB는 개인과 법인, 기관을 상대로 펀드사를 소개하고, 펀드 상품을 브로커리지 하는 거대 금융사였다.
그들의 순 매출은 30억 달러(약 4조 원)가 넘었는데, CEO 래리 무어는 ‘은둔의 경영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외부로의 노출이 없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영광입니다.”
“하하하, 오늘 영광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는군요.”
“진심입니다. 이곳에 온 것을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경의 말에 래리는 미소를 짓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공동경영을 할 회사의 조건을 물었는데, 그럼 우리 TB는 어떻습니까?”
도경은 래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떠보는 것인지 권유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TB의 공동경영인이 될 생각이 없냐고 묻는 겁니다. 한국에 떠돌고 있다는 투자자 서한을 보았거든요. 아주 훌륭한 포부를 적어두었던데.”
이어지는 래리의 말에 도경의 동공이 넓어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순간, 도경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