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tcher just hits home runs well RAW novel - Chapter (165)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65화(165/404)
165화. 무결점 이닝(3)
느낌이 좋다.
어, 그러니까 절대 안 풀리던 난제가 그냥 한 숨자고 일어났더니 답이 떠오르는 느낌이랄까?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3 때 어깨 아작이 난 이후 타자로 전향하고 상당히 자주 있었던 경험이다. 그땐 타격이 정말 비온 뒤 잡초처럼 실력이 쑥쑥 자라났었으니까.
그게 바로 어깨 망가진 고등학생 투수가 타자로 전향하고 1년 만에 프로 상위 라운드로 드래프트 됐던 비결이었다.
쉽게 말해서 압도적 천재성.
그리고 지금 마운드 위에서 난 또 한 번 확신했다.
역시 난 투수로도 천재로구나.
자신감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내야의 노형욱, 강라온, 정지운, 이규만을 거쳐 한 바퀴 돌아온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마지막 나를 바라보던 이규만의 눈빛에 담긴 강한 신뢰가 고작 145그램짜리 야구공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 묵직함을 그대로 담아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조금 높게 형성된 160.9km/h의 포심.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이규만이 보여주던 것처럼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앞서 대기 타석에서 나름대로 타이밍을 맞췄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마 마음 같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빠른 공은 단순히 타이밍만 맞춘다고 되는 게 아니다. 타자가 공을 치는 메커니즘을 생각해보면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0.4초만에 미트에 꽂히느냐 0.35초만에 꽂히느냐는 매우 크다.
공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스윙을 결정하고 스윙을 하기까지.
그 가운데 물리적으로 스윙을 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0.15초에 불과하다. 나머지 과정은 모두 두뇌의 처리능력이다. 그러니까 그 처리에 0.25초를 주느냐 0.2초를 주느냐는 그야말로 압도적 차이다. 그래도 2할 중후반을 치는 타자가 방금처럼 높은 공에 어이없는 헛스윙을 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꺾이는 각이 낮은 빠른 커브.
-딱!!!
아, 속도는 괜찮았는데 각이 너무 밋밋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타구가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0-2.
타자의 머리에 선택지를 하나 더 상기시켰다.
무턱대고 타이밍 맞춰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빠른 공을 노리다가 혹시라도 브레이킹 볼이 오면 그거에 맞춰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는 것을 인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나에게 브레이킹 볼이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생겨난 약간의 고민이 배트 타이밍이 완벽하게 늦춘 것이다.
161.8km/h
삼구삼진이었다.
[맙소사. 최수원.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 최수원 선수가 2회 말 돌핀스를 공 아홉 개로 완벽하게 막아냅니다.] [여기서 또 이렇게 최수원 선수가 Immaculate inning을 보여주네요. 제가 알기론 KBO에 아직 열 번이 채 안 되는 기록일텐데요.] [아,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을 이미큘레이트 이닝이라고 하는 건가요?] [네, 대충 해석하자면 무결점 이닝 정도 되겠습니다. 야구 역사가 긴 메이저에서도 96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기록으로 1년에 한 번도 안 나오는 희귀한 기록입니다. KBO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지금 45년 역사에 열 번이 채 안될 건데······. 아 여기 자료 찾았습니다. 지금까지 딱 여덟 명. 아홉 번 밖에 나오지 않은 대기록입니다. 현역 선수 가운데는······. 아, 마린스의 곽재영 선수가 7년 전 28세 시즌에 달성을 했었네요.] [아, 기억이 납니다. 곽재영 선수도 전성기에는 참 대단한 선수였죠.]간질간질한 느낌이 점점 명확하게 다가왔다. 빨리 공을 좀 더 던져보고 싶다는 느낌이다. MLB였으면 지금 내가 던지는 폼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있을 테니 이걸 재현하는 것도 더 쉬웠을 텐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 경기가 홈구장도 아니고 원정 구장이었으니까 더더욱.
-딱!!!
아······.
일루에 선 이정훈이 씨익 웃는다.
빨리 공을 좀 더 던져보고 싶었는데 그냥 하던대로 하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게 안타를 치고 나간 걸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강라온의 연속 안타.
이정훈은 2루를 지나 3루까지.
강라온 역시 가볍게 1루를 밟았다. 아니, 뭐 당연히 내 타석까지 돌아오는 거긴 했지만 얘들 대체 뭐지? 2회에는 정상적인 마린스더니만 또 3회에는 지구 616이네.
텅 빈 2루가 참 눈에 거슬렸다.
이건 뭐 볼 것도 없이 볼넷이다. OPS가 20할인 타자를 상대로 여기서 승부를 걸어오는 머저리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을까.
-뻐엉!!
“스트라잌!!!”
어? 설마 그런 머저리가 있는 건가?
잠깐의 의문,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닐 것이다. 방금은 바깥쪽으로 좀 빠지는 공인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외친 거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아까 나도 이 비슷한 공에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냥 오늘 심판이 판정이 좀 후한거다.
아마 상황이 달랐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타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2점이나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을 조금 더 지켜봤다.
볼. 그리고 또 볼.
오늘 돌핀스의 선발인 지대열이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확실히 5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날이 좀 많이 풀리긴 했다.
볼카운트 1-2.
지대열의 공이 날아왔다.
초구와 비슷하게 애매한 코스. 아니, 안쪽으로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온 공이다. 아슬아슬
-딱!!
스윗스팟에서는 살짝 벗어났다.하게 내가 설정한 존의 경계 즈음 된다.
몸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레그킥
런치 포지션에서 하체를 앞으로 전진시키면서 상체는 오히려 뒤로 슬쩍 당기는 것처럼 묶어둔다.
그리고 그렇게 묶어놨던 힘을 한순간에 풀어놓는다. 그것을 통하여 약간의 전진과 강렬한 회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뒷발이 높게 들리는 것같은 격렬한 중심 이동.
하지만 머리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방망이를 쥔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20년에 가까운 기간을 통해 만들어낸 전성기의 가장 완벽한 폼까지는 아니고, 그 직전까지 사용하던 가장 아름다운 타격폼이다.
하지만 그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그야말로 공을 쪼개버릴 것 같은 강렬한 스윙이었다.
공이 쭉쭉 뻗어 나갔다.
돌핀스의 강일진도 달렸다.
빨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선의 빠름이었다. 수비 위치 자체가 뒤로 빠져있었던 만큼 담장에 도달한 타이밍 자체는 이주혁과 비슷했다. 하지만 나의 타구는 백강호의 타구보다 빨랐고 그의 점프는 이주혁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외야 두 번째 줄의 관중 누군가가 나의 홈런볼을 받아냈다.
시즌 열네 번째 홈런이었다.
5:0.
3회 초 아웃카운트는 여전히 0개였다.
***
노형욱이 배트에서 배트링을 뺐다.
뭐, 배트링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긴 했지만 설사 이게 과학적으로 그리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노형욱이 대기 타석에서 배트링을 안 끼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형욱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적 원리가 아닌 자신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였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
노형욱의 뒤를 이어 대기 타석에 들어온 이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과거를 너무 빠르게 잊는다.
하지만 그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은퇴를 앞둔 저 타자가 얼마나 위대한 타자였는지를. 그가 응원하던 팀을 얼마나 철저하게 부셔놓은 악마였는지를.
노형욱이 아직 야구 소년이던 시절 스물두 살의 이규만은 리그의 파괴자였다. 그래, 어쩌면 지금 저 최수원과 비슷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최수원쪽이 조금 더, 아니 많이 더 잘생기고 날렵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
노형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남자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규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지금도 오직 그만이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믿는지 모르겠다.
-딱!!!
전성기의 복판을 지나가는 타자가 시원하게 공을 두들겼다.
워낙에 최수원이 가볍게 휙휙 담장 밖으로 공을 넘겨대는 바람에 리그의 홈런 파크 팩터 자체가 영향을 받을 지경이긴 했지만, KBO는 명백히 투고타저의 리그였다.
담장 밖으로 공이 넘어가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잘 맞은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떨어졌다.
2루까지 가기에는 조금 아쉬운 타구. 노형욱의 발이 1루에서 멈췄다.
노아웃 주자 1루.
이규만이 타석에 올라왔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규만은 3년 전 겨울에 은퇴를 했어야했다고. 그렇다고 그들이 이규만의 안티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KBO의 전설 이규만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규만의 커리어도 올해로 23년 차.
한때 3/4/5를 넘어 3/4/6에 달하던 커리어 비율 스탯은 어느새 3/3/5로 떨어졌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3/5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을 지경이다.
사실 이규만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어찌 모를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도저히 포기를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명의 선수로써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광을 다 끌어안았다.
KBO의 거의 모든 타자 기록은 그의 것이었다. 물론 몇몇은 그것을 이규만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 국내에 머무른 국내용이기 때문에 누적을 꾸역꾸역 쌓은 결과물이라 폄훼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전성기의 이규만은 분명 비율 스탯에서도 KBO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타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진정한 영광을 모르는 타자라고 생각했다.
야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좋은 경기? 대단한 기록? 훌륭한 성적?
아니,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목적으로 가는 길에 얻는 부차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야구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치고 달리고 던지는 모든 이유의 끝에는 오직 ‘승리’라는 목표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승리와 승리의 끝.
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은 ‘네가 올해 가장 훌륭한 성적을 거둔 선수였어.’ 하면서 나눠주는 MVP상패가 아닌 마지막까지 승리한 팀만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우승 트로피일 것이며 그 트로피를 들어올린 자들만이 낄 수 있는 우승 반지일 것이다.
프로 23년 차.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KBO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이규만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타석에 섰다.
식단을 조절하고 더 많은 운동을 하고 이기적일 정도로 주위에 잡다한 것들에 신경을 끊고 컨디션을 관리했다.
타격폼이 전성기와 달라졌는가?
스윙의 속도가 느려졌는가?
아니다.
이규만은 그저 늙었을 뿐이다.
0.145초로 평균보다 0.03초 빨랐던 날아오는 공에 인지가 이제 평균보다 느린 0.195초가 걸릴 뿐이다.
그래 고작 0.03초다.
하지만 그 0.03초의 차이는 150짜리 공과 160짜리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시간의 차이만큼 아득한 차이이기도 했다.
-부웅!!!!
그렇게 이규만의 방망이가 노형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
5:0.
든든한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아니, 잠깐만 내가 2득점에 3타점인데 이게 득점 지원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가? 아니다. 이전이었으면 5점 내려면 내가 홈런 다섯 방은 쳐야 했을 텐데 1볼넷 1홈런으로 5점이면 이 정도면 솔직히 득점 지원 맞다.
그냥 그런 거로 하자.
아무튼 5점이라는 든든한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마운드에 섰다.
근데 이게 홈런을 쳐서 좋긴 했는데, 그 아리까리하던 느낌이 좀 멀어진 기분이다. 시원하게 속구나 좀 계속 던졌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뻐엉!!!
공수교대 타이밍에 연습구를 다섯 개나 던졌는데 여전히 좀 아리까리하다.
타석에는 돌핀스의 7번 타자가 올라왔다.
분명 한때 마린스의 상위 타순보다 돌핀스의 하위 타순이 낫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돌핀스의 타선은 KBO에서도 특출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돌핀스의 상위 타순을 상대로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았던 퍼펙트 투수다.
-퉷
아무튼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하위 타순을 상대로 굳이 안간힘을 쓰지는 않았다.
정말 가볍게 부담 없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속구를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