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tcher just hits home runs well RAW novel - Chapter (400)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400화(400/404)
400화. 외전6) 파티원 모집(8)
벌써 20년에 가깝게 지난 일이지만 백하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20년이 무슨 대수일까. 그날의 그 절망감과 열패감은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잊기 힘들 것이다.
조규찬과 고교 No.1을 다투던 그 시절. 경하고등학교라는 터무니없는 체급을 상대로 마치 만화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팀을 우승까지 이끌 희망에 부풀어있던 자신을 침몰시켰던 괴물.
삼진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외야 뜬공 아웃 하나.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또래 가운데 최고라고 자부했던 백하민이 녀석에게 얻어냈던 유일한 성과였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점은 당시 그는 고작 그 외야 뜬공 아웃 하나에 ‘만족’을 했었다는 점이다. 그래, 삼진도 아니고 고작 외야 뜬공 아웃 하나에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수많은 패배로 점철됐던 그의 고교시절에 그나마 남은 자그마한 승리의 기억이었다.
아마 백하민이 온전하지 못한 승리라도 그것을 승리라며 위안 삼을 수 있는 남자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그 승리라 부를 수 없는 승리에 만족했던 자신의 과거를 곱씹으며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가 최수원을 싫어하는가를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백하민이 싫어하는 것은 그에게 제대로 된 승리를 한 번도 얻어내지 못하는 그 자신이었으니 어쩌면 이 무대는 그를 위해 준비된 무대일지도 몰랐다.
-따악!!
[쳤습니다!! 알렉산더 맥도웰!! 우측 담장!! 우측 담장 깊숙한 코스!! 하지만 다행히 담장 앞 워닝트랙에서 우익수가 가볍게 잡아냅니다. 쓰리아웃 체인지. 1회 초. 메츠의 공격을 최수원이 삼자범퇴로 막아냅니다.] [자, 이어지는 양키스의 공격. 마운드에 백하민. 백하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참, 월드시리즈 마지막 무대에 한국인 투수끼리의 선발 맞대결이라니. 아마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최근 몇 년 최수원 선수와 백하민 선수가 워낙 자주 월드 시리즈에 얼굴을 비추다 보니 그냥 언젠가 일어날 일이 드디어 일어났구나. 뭐 그런 심정입니다.]세계 최고의 무대.
백하민이 마운드 위에 올라왔다.
[자, 우리 백하민 선수. 이 선수도 정말 경이로운 선수 아니겠습니까? 사실 전 미국에 진출할 때만 하더라도 잘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해낼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맞습니다. 메츠와 2억달러짜리 계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뭐 오버페이다, 메츠가 또 어메이징을 했다. 이런 말들이 참 많았습니다만 지금 잔여기간이 1년이 남은 상황에서 근 20년 동안 메츠가 맺었던 모든 투수 계약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계약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거든요.]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재능은 노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주지시켰었다. 바위를 깨트리는 것은 낙숫물이며 승리는 오직 가장 끈기있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간다고 하였다.
물론 백하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주변에는 그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갑남을녀들이 널렸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보다 야구를 잘하는 것은,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승리했던 것은 그들보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백하민 자신이 타고난 재능의 크기가 그들을 압도할만큼 거대했기 때문이다.
-부우웅!!
“스트으라잌!! 아웃!!!”
[타이밍을 완벽하게 흐트러트리는 서클체인지업!! 헛스윙 삼진입니다!!] [참 대단한 선수예요. KBO에 있던 시절에도 이미 완성도가 매우 높은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었는데 빅리그에 가서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으로 그 완성도를 점점 높여냈습니다.] [두 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내며 매우 깔끔한 스타트를 보여주는 백하민 선수. 자, 타석에는 이제 3번 타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저 괴물 최수원이 백하민 자신의 재능을, 아니 세상 모든 야구선수들의 재능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노력은 결코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노력은 재능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노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가 타고난 재능의 한계점까지를 끌어내는 것뿐이니까.
백하민은 그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근성과 노력으로 타고난 재능을 극복하는 이야기?
그건 너무 구식이다.
하지만······.
10대의 건방졌던 백하민보다.
당시 그에게 조금 더 성실하기를, 조금 더 노력하기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던 아버지의 나이에 더 가까워진 36살의 백하민은 생각했다.
세상에는 설사 사실이 아닐지라도. 아니, 사실이 아니기에 그러하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법이며 그의 아버지에게 노력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런 단어였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 지금 이렇게 마운드 위에서 최수원을 노려보는 자신처럼 말이다.
[메츠, 주저 없이 자동 고의 사구를 선택하네요. 최수원 선수. 1루로 걸어나갑니다.] [그렇죠. 지금 베이스가 저렇게 텅텅 비어있는데 굳이 최수원 선수를 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고등학교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고등학교 시절이 나았다. 그때는 이 정도로까지 녀석과의 승부를 철저히 피해 가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라면 녀석도 이제 슬슬 나이가 먹긴 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1루에 내보내면 선발 투수로 나온 주제에 도루까지 해대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였는데 이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 최수원 선수. 리드 폭을 상당히 넓게 잡고 있습니다. 이건 여차하면 달려나가겠다. 뭐 그런 의미일까요?] [아무래도 지난 시리즈. 전체적으로 매우 적은 점수 차이로 승부가 갈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경기도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도루라기보다는 장타가 나오면 여차하면 그 빠른 발을 활용해서 3루에서 멈추지 않고 홈까지 달려보겠다. 뭐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선발로 나와서 도루는 너무 위험하니까요.]그러니까 저 리드폭은 그냥 백하민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부우우우웅!!!
[최수원!! 달립니다!! 1루 지나서 2루로!!]“세잎!!!!”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와, 최수원 선수의 기습적인 도루!! 1회 말, 양키스가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냅니다.]미친.
여기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한다고?
2루를 밟고 자신의 가슴팍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는 녀석의 모습이 참으로 끔찍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승리는 오직 가장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가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아버지.
만약 저보다 재능 넘치는 녀석이 저만큼 노력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어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가 투명한 모습으로 그에게 정답을 내려주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내려줄 정답이란 너무 뻔했으니까.
그보다 더 끈기 있게 노력해라.
누구보다 구식의 방법으로.
백하민이 공을 던졌다.
경기가 계속됐다.
***
“야, 더튼 너 괜찮냐?”
“어, 어? 뭐가?”
“아니, 너 지금 입술이 새파란데?”
“아, 그냥 좀 추워서 그런 걸 거야. 잠깐 히터 근처에 좀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걸?”
아니었다.
물론 11월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이 정도 추위는 노스다코다에서 태어난 더튼에게는 반팔을 입고 조깅을 해도 괜찮을 날씨에 불과했으니까.
‘역시 최수원······.’
올해로 23살의 더튼이 처음 야구를 본 건 16년 전 어느 날이었다.
주니어스쿨 입학을 두 달 앞둔 6월의 어느 더운 날. 보스턴 레드삭스의 오랜 팬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가문의 전통을 위하여 그를 팬웨이파크로 데려갔었다. 데이비스 가문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보스턴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스턴 팬이라는 전통을 잇기를 바랬던 할아버지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그 날 경기를 통해 더튼 데이비스는 또래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이 최수원이라는 선수의 팬이 돼버렸다.
그렇게 최수원을 통해 야구에 빠진 소년은 월드시리즈라는 거대한 무대. 그의 반대편 덕아웃에 앉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따악!!!
5회 초.
타구가 1, 2루간을 갈랐다.
노아웃에 주자 1루.
더튼 데이비스는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팬심은 팬심이고 일은 일이다.
대기 타석에 서서 최수원이 던지는 공을 지켜보며 그 타이밍에 박자를 맞춰갔다.
포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이번 시즌 최수원은 체인지업의 비중을 상당히 늘렸다.
전체적인 구속은 하락했지만, 구위는 그대로였고 삼진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라인드라이브성 배럴타구를 허용하는 일은 그보다 더 많이 줄어들었다.
-뻐어엉!!
시어도어가 침착하게 공을 골라냈다.
오늘 앞선 타석에서 2타석 1타수 무안타 1볼넷. 비리비리한 녀석이지만 공을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히 훌륭하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더튼 데이비스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봤다.
-부우우웅!!
“스트으라잌!! 아웃!!!”
높은 코스 가장 빠른 공.
전광판에 101.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혔다.
직전까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빨랐던 공이 99.7마일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무려 1.4마일이나 구속을 끌어올린 셈이다.
더튼은 자신의 동료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거봐,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뭐라고 했어!!’를 속으로 외쳤다.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최수원이 더는 빠른 공을 던지지 못해서 강제로 스타일이 바뀐 거라고 떠들던 인터넷의 머저리들도 이 모습을 똑똑하게 봤겠지?’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발갛게 달아올랐던 더튼의 얼굴에서 붉은빛이 사라졌다.
101.1마일.
그래, 뭐 아주 빠른 공은 아니다.
리그에 괜찮은 선발이라면 100마일 넘는 공을 던지는 건 기본 소양이니까. 하지만 상대가 최수원이다. 안 그래도 까다로운 변화구들을 던져대는데 전성기의 구속까지 보여주는 최수원?
문득 그를 처음 팬웨이파크에 데려간 이후 무려 16년째 고통받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꿀꺽······.
최수원은 거대했다.
아, 물론 물리적인 크기는 더튼 쪽이 반뼘 정도 더 컸지만 마운드의 높이 때문인지, 아니면 더튼의 위축된 마음 때문인지 그에게 최수원은 2미터 50쯤 되는 거인으로 느껴졌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힘차게 공을 뿌렸다.
몸쪽으로 파고드는 공.
그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체인지업이었다.
빗맞은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7살 소년이 태어나 처음 봤던 가장 강력했던 야구 선수는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장 강력하게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유격수 잡아서 2루에!! 그리고 다시 1루에!! 더블 아웃!! 5회 초. 최수원이 메츠의 공격을 다시 한번 깔끔하게 막아냅니다.]특별한 세러모니 없이.
그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최수원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경기가 계속됐다.
***
2타수 무안타.
모두 워닝트랙까지 날아가는 타구였다.
하지만 괜찮다.
본래 타자라는 직업은 세 번 중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동시기에 세 번 중에 한 번 하는데 부진하다는 평가를 듣는 비정상적인 놈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타자는 그거면 충분한 법이다.
6회 초.
다행스럽게도 점수는 여전히 0:0.
그리고 세 번째 기회.
알렉산더 맥도웰이 방망이를 들고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