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491
◈ 492화. 밑거름 (8)
나, 이호열.
십 년하고도 수년의 공백을 만회하고도 이젠 다른 플레이어들은 겪지 못한 경험을 많이 겪어봤다고 생각했거늘. 이런 메시지는 또 처음이다.
‘……자멸?’
다짜고짜 의심부터 했을 거다.
상대가 악마족 몬스터였다면?
개뿔, 콧방귀도 뀌지 않았겠지.
그러나 펼쳐진 광경이 말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나의 배후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는 세계수가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었다. 정말로 전투가 종료되었음을. 융합지성체 유그위드, 바위산처럼 흔들림 없던 그 육체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거리가 가까워서 더 잘 보이는 걸까.
“이, 이 수석님?”
벤쉬 윌리엄.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굳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알고 있다, 벤쉬 선임. 나는 물론이요, 이 자리의 모두가 말이야.
후드드득.
상체와 하체, 어디서부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일제히 바스러져 붕괴한다.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대체……?”
누군가 말꼬리를 흐리기도 잠깐.
이윽고, 나를 향해 시선이 집중된다.
눈빛들이 어째 내가 처음 반전마법을 발표하던 순간.
그때 쏟아지던 눈빛과 비슷하군.
‘내게 설명을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나라고 전부를 아는 건 아니거든.
이것도 {자연} 능력, 그것도 첫 세계수의 축복이 깃은 자연의 위력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헛다리를 짚는 것 같았다.
그야 나는 한 차례 경험해 봤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내가 세계수의 힘을 빌려 자연 능력을 개방했다고 해도.
정령왕들의 힘을 능가할 순 없었겠지.
그렇다면 역시나.
‘역시, 뜻 그대로겠군.’
나는 점멸했던 메시지를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자멸(自滅), 스스로 멸하다.”
흩어져 가는 융합지성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그대의 긍지로군, 유그위드.”
*
오리에드가 소리쳤다.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니? 넌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 때보다 쓸모가 없어진 거지? 뭐, 됐어. 당장 내 의식에서 꺼져버려!!”
융합지성체라는 이름은 괜한 이름이 아니다.
유그위드와 오리에드.
두 존재의 의식이 융합됐기에.
융합지성체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밖에 없었단 뜻이다. 즉, 융합지성체가 이대로 흙이 되어 사라진다면. 두 존재의 의식도 영영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서운한걸. 그런 말은 상처가 된다고, 오리에드. 그렇지 않아도 흘러가는 세월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 중인데. 이런 늙은이에게 젊을 때가 낫다는 말을 하다니.”
온순한 거인.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돌아왔다.
유그위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목격한 덕분이었다.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너희와 다른 결말을 맺고 싶으니까.’
유그위드는 이 순간 같은 전 원로 마법사, 화룡 카림제바와 만년설의 세니오스를 떠올렸다. 만약, 상황이 오리에드의 뜻대로 흘러갔다면…….
나는 너희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을 테니까.
‘이 수석의 처분 강도에 따라서 갈렸겠지.’
이 수석이 자비를 베푼다면 세니오스 같은 최후를 맞게 되겠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카림제바처럼 그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난 마지막으로 억지를 부려보려고 해.’
그래도 마지막은 내 뜻대로 가야 하지 않겠나?
의식을 공유하는 덕분.
그 속마음을 간파한 오리에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마지막? 나약한 소리는 집어치우렴, 유그위드.”
가식적이게 살가워진 음성.
방금까지 길길이 날뛰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회유하듯 달콤하게 속삭여 온다.
허나, 유그위드는 피식 웃는 게 고작이었다.
“유감이지만,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기엔 너무 늙었거든.”
“……너.”
“그리고 알고 있지 않나, 오리에드?”
유그위드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대지의 정령왕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오리에드의 정곡을 찔렀다.
“나도, 너도 일찍이 순수를 상실했다는 걸.”
“……!”
순수를 지켜온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다.
오리에드는 유그위드와 맺어선 안 될 계약을 맺었으니까.
유그위드는 태연하게 말을 끝마쳤다.
“그러니 허튼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결단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와 동시에.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융합지성체도.
두 사람이 공존하는 의식의 공간도.
쿠구구궁.
바윗덩어리가 오리에드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재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깔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오리에드가 외쳤다.
“진심이야? 이렇게 포기할 거야?”
끄덕.
“……진리! 그래, 네가 추구하던 진리는 어쩌고?!”
도리도리.
“이제 와서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치고, 물들어도 단단히 물들었구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망가지게 한 거냐, 반전마법? 긍지? 정말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림자 용병단의 변화를!”
……흐음.
그림자 용병단.
그 단어에 유그위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역시나 세월의 흐름까지는 반전시킬 수 없군, 이 수석.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누군가는 서운해하겠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수십 년 전 일이라 기억도, 복수심도 흐릿해졌거든. 이젠 그들이 뭘 하든 상관없어. 그러니 괜찮겠지.”
풀썩.
“아아…….”
오리에드는 그쯤에서 체면 따윈 잊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멸이라는 말에 걸맞게.
의식의 공간은 계속해서 붕괴해 나갔다.
이대로면 유그위드와 오리에드.
둘의 의식은 융합지성체의 잔해에 파묻혀 사라지게 될 터.
그것이 유그위드가 바라는 결말이었다.
“비로소 대지 마법사다운 최후를 맞이할 시간이 왔군.”
타오르는 화염은 노쇠하지 않는다.
녹지 않는 만년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지는 다르다.
유그위드는 무너져 가는 융합지성체, 골렘을 바라봤다.
그 모습은 풍파에 깎여나가는 바윗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깎여나간 바위 조각은 머지않아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자연스럽게 흙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유그위드가 읊조렸다.
“거인에서 흙으로. 보자, 밑거름으로 거듭날 시간이군.”
스스스스.
예상했던 대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융합지성체.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의식 또한 흐릿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유그위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았다.
‘어떠한 결과가 벌어질지는 모르겠다만…….’
불완전한 프로토타입 균열을.
융합지성체의 자멸로 본래라면 폐쇄되었어야만 하는 균열이었거늘. 밑거름으로 변한 융합지성체가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하나의 땅으로 연결해 놓고 있었다.
유그위드가 웃음을 뱉었다.
“그대들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해내리라 생각되는데.”
이 수석, 마르셀로, 마티스.
그리고 벤쉬 선임까지도.
유그위드가 마탑의 미래를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의식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그대의 긍지로군, 유그위드.”
긍지라.
과연 인정해 줘서 고맙군, 이 수석.
유그위드가 마지막 유언을 내뱉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무능했던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아닌.
한 명의 대지 마법사로서 선택한 나의 최후.
“그러니 나를 얼마든지 부러워해도 좋아, 세니오스.”
*
거짓말처럼 사라져 간다.
아르카나 대륙과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든 융합지성체가.
무엇이 내가 할 수 최선이었을까, 되새겨본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일찍이 {자연} 스탯을 개방하고, [첫 세계수의 축복]을 조금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나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지.
하지만 그게 과연, 유그위드의 긍지였을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긍지에 경의를 표하겠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이 ‘자멸’이라 선언한 이상.
융합지성체의 붕괴는 유그위드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리에드의 짓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는 거냐고?
물론, 있다. 이전과 다르게 혹시라도 주변에 피해를 입힐까 봐, 융합지성체는 잔뜩 몸을 움츠린 상태에서 흙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니까.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융합지성체 유그위드가 변화합니다.] [프로토타입 균열이 변화합니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새로운 필드가 출현합니다.]출현한 몬스터가 사라졌다.
원래라면 클리어되어 사라져야 할 균열이었거늘.
프로토타입 균열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마법으로 그 내부를 들여다본 걸까.
웅성거리는 숙련 마법사 무리.
“……저기, 저 너머, 저거! 아르카나 대륙 아닌가요?”
“지브릴 양, 보입니다! 진짜 아르카나 대륙입니다!!”
“쉿! 좀 조용히 해봐요, 린느!”
“흡!”
내 시선을 알아차린 숙련 마법사가 다급히 입을 막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선임 마법사들은 물론, 플레이어들도 프로토타입 균열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악한 듯싶었으니까.
백이설이 흠칫해 중얼거린다.
“설마 사라지지 않은 걸 넘어서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연결하는 균열이 출현한 거야……? 쓰러진 융합지성체가 새로운 필드를 형성하면서……?”
신화 길드 마스터.
동시에 상위권 플레이어답게 추리력이 괜찮군.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게 바로 유그위드가 마탑.
그리고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에 남긴 마지막 유산이겠지.
연달아 점멸하는 시야.
[완전히 다른 세계의 영향력이 전해져 옵니다.]그 메시지에 놀란 건 아마도 플레이어들이리라.
역시나 가장 가까이 있는 플레이어.
백이설이 이젠 경악을 내뱉는다.
“……버프? 설마 아르카나 대륙에서 적용 중이라던?!”
아르카나 대륙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당연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에 발동 중인 수많은 버프는 물론.
[아르카나 대륙은 이제부터 그 전설을 노래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불던 찬바람이 멎고,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려 생명력으로 전율합니다. : 경험치 획득량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우주의 정령이 역전된 엔트로피에 크게 기뻐합니다. 그들의 장난기가 아르카나 대륙의 인과율을 크게 뒤틀어 놓았습니다만,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아이템 드롭율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보랏빛 마력을 흩뿌립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마력 농도가 짙어집니다. 대마도 시대의 서막이 열립니다. : 마법 발현력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가장 최근에 떠올랐던 버프 또한.
아르카나 대륙 너머 현실까지 유효하단 뜻이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수석님?”
치유학파 선임, 벨리에 유시아.
그녀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유감이지만, 나도 이 사태의 후폭풍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부정적인 면도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레이먼 션.’
이건 녀석이 추구하던 기이가 일부나마 실현됐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거든. 그러나 당장 우려할 건 아니었다. 그래, 당장 걱정해야 할 건 따로 있었으니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기에.
호기심 또한 어린아이와 같다.
프로토타입 균열 너머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존재들.
빼꼼.
수많은 정령들이 현실로 고개를 내민다.
자연 상태의 정령이 육안에 보인다?
그 현상에 가장 놀란 건 정령학 선임, 페이얀이었다.
“으, 으에에엑?”
정령학 관련 서적을 죄다 뜯어고쳐야겠군, 페이얀.
그러나 엄살은 부리지 말도록.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대의 팔자가 나보다 나을 테니까.
이내, 현실을 두리번거리던 정령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온다.
“!!!”
그래, 정령들아.
너희가 흘린 눈물이 아깝게도.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
내가 이럴까 봐, 한마디라도 하려고 했던 건데…….
“어, 어떻게……?”
그런 나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령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든다.
그중엔 외관부터 비범한 정령왕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일대의 풍경이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간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 당신의 전설이 울려 퍼집니다.]……뭐긴 뭐야, 착각에 박차를 가했다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