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497
◈ 498화. 존귀한 이들 (3)
마계 서부.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파이몬의 권역.
웅장함을 넘어선 광오한 규모의 성채.
파이몬이 성채의 복도를 거닐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파이몬에게선.
성채보다도 무거운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은 생각할 가치도 없겠지.
“바알, 그대는 이 모든 걸 쓸데없다고 여길 터.”
십좌에 앉은 이들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란 무의미했다.
복도를 걷는 와중.
파이몬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예술품들.
금자수로 새겨진 그림부터.
진귀한 재료로 치장된 인형.
보석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조각까지.
각각의 예술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감정을 요동치게 할 정도의 심미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파이몬의 감정은 무미건조했다.
예술품이 주는 감동에 익숙해져서?
아니, 느낄 수 없다는 편이 옳겠지.
아득하고 드높은 십좌에서 바라보고 있기에.
광활한 마계의 서부 권역도 마찬가지고, 자신을 따르는 악마들의 충성심 또한 예술품과 다를 바 없다. 파이몬은 그런 자신의 갈증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알을 비롯한 다른 십좌들과 다르게.
파이몬이 세속적인 권세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군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아마도 그대도 나와 같은 이유겠지.”
모험가의 세계와 아르카나 대륙.
그대에겐 티끌만 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을 두 세계를.
필사적으로 수호하는 건.
“그래서일까, 내가 그대에게 호의를 느끼는 것도.”
구구궁.
이윽고, 파이몬이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춰 서자 문이 스스로 열렸다.
바닥부터 벽면.
심지어는 천장까지 새겨진 이질적인 형태의 마법진.
악마의 마법이라 할 수 있는 저주였다.
“그러니 그대는 간과할 수 없겠지.”
파이몬은 그 중심에 놓인 살덩이를 응시했다.
마계에 존재할 리 없는 인간의 시체.
안토니움에서 탈취한 용성락의 시신이었다.
“내가 봐온 그대라면, 하찮은 시신 하나에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나는 더없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빼곡하게 새겨진 저주의 목적은 화신체의 창조였다.
화신체.
진명을 부르짖는 것만으로 수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십좌였다. 그러한 십좌가 본체를 움직였다가는 의도와 다르게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걸 파이몬은 간과하지 않았다.
“멍청한 말처럼 날뛸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파이몬은 지옥에 떨어진 가미긴을 향해 조소를 뱉고는 화신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썩어가던 용성락의 시신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어리석은 행동이구나, 파이몬.”
과장을 조금 보태서 영겁을 살아왔다. 더욱이 나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대라면 분명히 이 시신을 찾기 위해서 어련히 마계를 밟았을 텐데.
“안달이 난다는 게 이런 감정이었군.”
호열과 마주한 순간.
멈춰있던 파이몬의 시계가 흘러가기 시작했으니.
살아온 영겁의 세월보다도.
지금의 찰나가 더욱 길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
“비로소 나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겠군.”
그 이유는 스스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와 대등한 존재를.
십좌?
몇 번이고 말했듯 바알은 아득했고.
나머지는 버러지들에 불과했다.
두득.
이내, 뼛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용성락.
아니, 파이몬의 화신체.
파이몬이 입을 열자 화신체도 입을 움직인다.
“이 행동을 그대가 탐탁지 않게 여길 걸 안다.”
그러나.
“나는 그조차도 갈망하고 있는 거겠지.”
파이몬의 안광엔 명백한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를 향하게 될 그대의 살의조차도.”
그러나 우려할 건 없었다.
그대가 마계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
우리 사이의 모든 걸림돌은 사라지게 될 테니까.
“마지막 장애물인, ‘한 줄기 빛’마저 사라진 순간.”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
*
와락.
“제시! 보고 싶었어~”
“어제도 만났잖아.”
“매일 봐도, 매일 보고 싶다는 뜻이야.”
부유 정원.
숙련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카밀라가 제시의 옆자리 앉아 눈알을 굴렸다.
“우리 제시 덕분에 부유 정원 구경을 다 해본다~ 여기 뭐가 맛있어? 라떼? 케이크? 혹시 생과일주스 같은 것도 파나?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비타민이 부족한 느낌…….”
“녹차.”
“……응? 뭐? 뭔 차?”
제시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그냥 녹차 마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 두 개.
뻔뻔하게 걸쳐져 있는 건.
역시나 녹차 티백.
카밀라가 구시렁거렸다.
“수석 정도 되면 이런 메뉴도 추가할 수 있는 건가.”
“카밀라, 할 이야기가 있어.”
“응? 불만이 아니라, 신기해서, 신기해서 그런 거야!”
도리도리.
“그런 게 아니야.”
고깔모자가 고개를 내젓는다. 카밀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깊게 눌러쓴 고깔모자에 이유가 있는 건가?
카밀라가 되물으려던 찰나, 제시가 말을 잇는다.
“나, 다시 샤이닝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제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 카밀라였다.
하지만 복귀라니.
제시가 저런 말을 해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야.
“복귀?! 제시, 너 샤이닝 소속일 때도 내키는 대로 행동했잖아? 물론, 나갈 때도 마음대로였고. 애초에 넌 어디에 묶여있을 성격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아니, 절대 아니지!”
카밀라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난 찬성, 무조건 찬성이야!”
이젠 의견조차 물을 수 없지만.
드미트리, 분명 너도 찬성이겠지?
그리고.
‘……록스, 너도.’
거대 연합을 비롯, 서울에 지부를 둔 길드 마스터들과 마탑에서 조우했다. 솔직히 놀랐다. 샤이닝의 간부인 카밀라에게도 경쟁 퀘스트는 떠올랐었으니까.
‘다들 진심이라는 거겠지. 성전 연합군에.’
카밀라는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제시를 향해 웃었다.
‘하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어.’
이호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고결한 영웅이었다는 게 이번 부활 선언을 통해서 드러났었으니까. 카밀라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뭐가 됐든, 나는 그렇게는 못 할 거야.’
죽음이란 극복할 수 있는 공포가 아니라는 걸.
드미트리의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깨달았으니까.
카밀라는 떨리는 손을 통제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어째설까, 제시?’
그저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오는 게 최근 샤이닝의 행보였지만, 그럼에도 카밀라는 기억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제시를 바라봤다.
‘끝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뭐든 당돌하게 요구하던 네가.
눈조차도 마주치지 못한다는 건.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거겠지.
‘많이 컸는데, 아직 나한테는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제시에겐 샤이닝으로 복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카밀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록스도 무조건 찬성일 거야.”
“……정말?”
“록스가 그런 뒤끝을 남겨둘 남자였으면, 애초에 제멋대로 날뛰던 우리를 샤이닝의 간부로 뽑아서 앉혀놨겠어? 그러니까 걱정할 건 없어.”
“그렇구나.”
제시는 한결같은 카밀라의 태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깔모자가 그런 제시를 위로했다.
-원래 마법사는 거짓말쟁이다, 제시. 탐색, 간섭, 발현. 애초에 마법의 과정부터가 순전 거짓말이지 않으냐? 그저 그럴싸하게 덧붙인 것뿐이니까.
물론, 조금도 위안이 되진 않았지만.
카밀라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제시가 고깔모자에게 대꾸했다.
‘……록스를 감시하겠다고 말할 순 없어요.’
제시 하인네스.
숙련 마법사에 버금가는 마법적 성취에 더해 마도 일족, 메어리의 교육을 통해 깨닫게 된 황혼의 마력. 선택받은 플레이어로서 거머쥔 [대마법사]의 자질까지.
일찍이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제시의 눈과 귀는 예민했다.
덕분에 보였다.
록스, 그에게 어떤 유혹의 손길들이 뻗쳐오고 있는지를.
-“자네에게 미합중국의 미래가 달렸네, 록스.”
-“세계질서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야!”
-“인간은 누구나 변하지. 이호열이라고 예외일까?”
-“드미트리가 나약한 자네를 원할 것 같나?”
고깔모자가 제자를 위로했다.
-이미 기회는 충분히 주지 않았느냐.
그 목소리는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록스, 그 사내가 마탑에 나타난다면 샤이닝에 복귀하지도 그를 감시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으니. 그러니 모든 건 마탑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그 사내의 책임이라고 여겨라.
고깔모자는 간만에 전(前) 탑주다운 자세를 보였다.
-결국, 자신의 긍지를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제시에게 카밀라가 물었다.
“그래서 언제 길드 하우스로 돌아올 거야, 제시?”
“지금 바로.”
“정말? 잘됐다! 네 개인실 그대로 놔뒀거든!”
달칵.
아까워라.
카밀라는 좀처럼 받을 수 없는 제시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서도 꾸역꾸역 녹차를 마셨단 뜻이다.
“으, 써라.”
카밀라가 찻잔을 내려놓자 제시가 말했다.
“그럼, 돌아갈까.”
두 사람은 부유 정원에서 일어나 마탑의 계단을 내려갔다.
포탈을 발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분위기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카밀라가 제시에게 팔짱을 끼며 들러붙었다.
“그래서 요기, 서울의 영주님은 누가 될까?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지 않아?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닐 것 같아~”
“일단, 카밀라는 안 돼.”
“나? 왜, 나는 안 돼?”
“너무 질척거려.”
“너무해~”
카밀라는 한동안 상실했던 일상이 되돌아온 것 같다고 느꼈다.
물론, 그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카밀라의 미간이 결국 움찔거렸다.
“잠깐만, 제시.”
간만에 만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는데, 진동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확인하니, 샤이닝의 간부였다.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전화야?”
채 대답이 전해오기 전이었다.
“……!”
카밀라의 시야에 그제야 보였다.
뒤숭숭하다 못해서 어딘가 모르게.
한껏 날이 선 듯한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저벅.
자신의 인기척에 일제히 집중된다.
귓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밀라가 제시에게 꼈던 팔짱을 뺀다.
-“카밀라 님, 록스 길드 마스터님께서……!!”
뚝.
카밀라는 통화를 종료했다.
제시가 물어왔다.
드디어 애타게 보고싶던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제시.
“무슨 일이야?”
하지만 이번엔 카밀라가 진심을 숨겼다.
“미안한데, 제시.”
“뭔데?”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아.”
“……뭐가?”
“네 샤이닝 복귀 말이야.”
카밀라는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신자를 용서할 순 없겠어.”
*
우당탕.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마법과는 거리가 먼 광전사, 레오니.
레오니에게 마탑에서 익숙한 장소라고는.
옷을 갈아입을 장소라고는.
치유학파의 별실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또 오라는 건 또 반쯤 죽으라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레오니는 찌그러진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 넵. 신세 졌습니다.”
클레의 악의 없는 배웅을 받으며 레오니는 대충 걸친 전투복을 제대로 착용했다. 그래,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 새끼들이 이러는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샤이닝.”
카밀라가 마탑을 방문했기에 별다른 움직임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록스가 단독행동으로 바로 옆 거리에 있는 보헤미안의 길드 하우스를 집어삼켰을 줄이야.
“그럼, 카밀라가 연막을 쳤단 건가……?”
……적어도 카밀라는 그럴 인간은 아닌데.
“씹, 그럼 록스는 그런 인간인가?”
레오니가 복잡한 머리를.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걸로 진정시키는 순간이었다.
마탑의 계단에서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
정확하게는 고깔모자가 보였다.
“……제시 하인네스?”
너, 여기서 뭐 하는…….
“!”
레오니는 제시에게 다가갔다가 뒷말을 삼켰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던 평소와 다르다.
제시의 얼굴에서부터 동요가 비치고 있었다.
물론, 광전사에게 섬세한 감정 따윈 없었다.
“믿기지 않는 거야?”
“……?”
“뭐, 믿기지 않으면 두 눈으로 확인하면 되잖아.”
“……!”
“포탈 열어. 나도 확인할 게 좀 있거든.”
레오니가 빠득 이를 갈았다.
“카밀라, 그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