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08
◈ 509화. 가장 짧은 일주일 (1)
서울.
대한민국 수도이자 기이의 땅.
그리고 샤이닝의 길드 하우스가 위치한 도시.
“솔직히 놀랐어.”
처참하게 깨진 유리창.
쑥대밭이 된 복도.
과거 샤이닝의 위상이라곤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들 이렇게 모여줘서 고마워.”
카밀라는 집결한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초거대 길드로 분류됐던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의 인원이었다.
카밀라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내가 착하게 살긴 했나 봐~?”
“뻔뻔하다, 우리 부길마님.”
“거기 다 들리거든~?”
마찬가지로 애써 짓는 웃음들이 들려온다.
길드 마스터, 록스마저 탈퇴한 지금.
샤이닝의 명성은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카밀라는 쉬쉬하지 않았다.
“넷튜브에서도, 투데이 아르카나에서도 그러더라고. 드미트리의 사망, 길드 마스터 록스의 탈퇴. 연이은 악재 덕분에 샤이닝의 전력은 반토막 난 거나 다름없다고.”
그녀의 어깨가 으쓱였다.
“바보들이지?”
……실은 반의반도 과한데 말이야.
록스와 드미트리.
두 사람은 최전선에서 샤이닝을 견인해 왔다.
적진에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서서는.
활만 만지작거렸던 나와는 다르게.
하지만.
‘미안해, 둘 다. 그치만 지금은 거짓말이 필요할 때잖아?’
카밀라는 차오르는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아닌 샤이닝에 남은 길드원들을 위해서였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색이 덧씌워진 서울이었다.
“우리 샤이닝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처럼 보였겠지. 멋대로 떠들어대고, 판단하고~ 하여튼, 들어보지도 못한 길드들이 우리 길드 하우스를 습격하는 것도 이해가 돼~”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가?
샤이닝은 이미 수차례나 공성전을 치렀으니까.
이쯤에서…….
록스, 드미트리 너희에게만 솔직하게 말할까?
말은 당당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 나, 자신이 없거든.
‘이런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 탓을 하라는 말은 아니야.
‘내가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어?’
전부 클래스 퀘스트의 과정이었다, 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록스, 고통에 시달리는 널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으니까.
더욱이 광활한 시야 덕분에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카메라는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네게서 악마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였겠지, 록스?
네가 샤이닝을 떠난 것도.
‘……그런 너를 위해서라도.’
설령 그런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샤이닝을 이끌어야만 하겠지.
카밀라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샤이닝이 예전 같지 않아도 내 탓은 하지 마.’
모든 건 멋대로 떠난 너희 둘 때문이니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카밀라는 고개를 들어 올려 집결한 길드원들을 살펴봤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샤이닝에 이만한 전력이 남아 있는 건.
그래도 가슴이 뭉클한 일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야, 카밀라.’
록스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넘겨받을 뿐이야.
그녀가 숨을 고르고.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록스의 탈퇴로 공석이 된 샤이닝 길드 마스터 자리에 지원할 생각이야. 서울에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스템이 적용 중이니까. 다들 알고 있겠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지원자가 없으면 선출 과정은 생략되는 거.”
그와 동시에 점멸하는 시야.
[현재 길드 마스터 후보 : 카밀라] [추가 후보가 없습니다.] [추가 지원자가 없을 시, 선출 과정이 생략됩니다.]샤이닝 길드원들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라면 믿고 따를 수 있었다.
록스만큼은 아니더라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무력을 공성전에서 증명했으니까.
“그러면 이대로 끝…….”
임박한 제한 시간.
명분상 시작한 회의가 끝나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모두의 시야에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
“……?”
[후보 등록 완료.]카밀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누군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데?’
이런 야심이 있으면서 샤이닝에 남을 이유?
떠오르지 않았다.
말했듯 샤이닝은 덩치만 큰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으니까.
카밀라는 합리적으로 추측했다.
‘설마, 외부의 사주를 받았나.’
샤이닝에 내분을 일으켜 더욱더 쉽게 샤이닝을 차지하려는 수작일까. 그렇다면 물러설 수 없었다. 카밀라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방식으로 결판을 낼 각오를 마친 순간이었다.
뒤늦게 떠오르는 이름 하나.
[현재 길드 마스터 후보 : 카밀라, 제시 하인네스]“……제시? 제, 제시?! 진짜 너야?!”
그 상대가 지나치게 상상 밖이었다.
*
“표정 봤어, 제시? 다들 기겁하던 거!”
제시는 고깔모자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카밀라와 마주했다.
이 순간만큼은.
스승님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더는 표정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달칵.
제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솔직히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어.”
“뭐야, 너어 부끄럽다는 소리도 할 줄 알았어?”
“나도 그 정도 면목은 있거든, 카밀라.”
말 그대로 제멋대로였다.
샤이닝에서 탈퇴했다가 다시 복귀해서는, 이제는 길드 마스터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한 제시였다. 길드원들의 눈초리가 고울 수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짐작하고 있었다.
제시가 카밀라를 바라봤다.
“그러는 너는 괜찮아?”
“나? 뭐가?”
“내가 후보에 등록한 거.”
“아, 그거? 나 후보에서 물러날 건데?”
“……뭐?”
카밀라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시의 옆자리에 앉았다.
슥.
팔짱을 끼고는 더욱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딸내미가 이렇게 커서는 내 짐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어? 물론, 적당히 연기는 해야겠지마는.”
“……너 무섭다, 카밀라.”
“정말?”
카밀라가 질린 듯한 제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 변화가 더 무서운데, 제시?”
“…….”
“이유, 나한테만 알려줄 수 있어?”
카밀라의 질문에 제시는 대꾸했다.
“동등할 수는 없겠지만.”
“동등……?”
“조금이나마 심정을 이해해 보고 싶어서.”
제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짐이란 걸 짊어지고 싶어졌어.”
잠자코 듣고 있던 카밀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아주 다 컸어?”
“난 원래부터 다 컸어, 카밀라.”
“우리 제시, 완전히 철들었네.”
카밀라는 방금 대화로 작은 우려까지 떨쳐낼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의 제시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샤이닝의 위상을 원상 복구시킬 테니까.
나와 다르게 제시에겐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안 그래, 드미트리? 그리고 록스?’
그러나 제시의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목표가 있어.”
“샤이닝 길마 자리 말고도 더? 뭔데? 욕심쟁이네~”
“나 마탑에서도 분발할 생각이야.”
“마탑에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부터 마탑의 편애를 받았던 제시였다. 그런 마탑에서 제시가 분발할 일이 뭐가 있을까? 카밀라가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제시가 진지하게 말했다.
“숙련 마법사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제시, 너 설마?”
그렇다, 설마가 설마였다.
“나,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될 거야.”
숙련 마법사로 인정을 받고 나서야 보다 선명하게 마탑이 보였다.
마탑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어떠한 비밀을 품고 있는지.
숙련 마법사에게 허가된 마탑의 진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따라서 제시는 결심했다.
마탑에서도 스무 개뿐인 선임 마법사의 직위를 차지하겠다고.
그래야만, 수석인 호열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 이유는?”
“…….”
아무리 카밀라라고 해도.
그 정도로 솔직하게 모든 속내를 털어놓을 순 없었다.
제시가 다급하게 구체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손가락까지 접어가면서.
“선임 마법사가 되면 혜택이 많아. 개인 집무실도 가질 수 있고, 같은 학파 숙련 마법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홀(Hall)도 사용할 수 있고……. 아, 그리고 비밀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도 있어.”
“비밀장소? 마탑에 그런 게 있었어?”
“응.”
제시가 ‘누군가’가 흠칫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예를 들면, 아메시스트 홀.”
“아메시스트라면 보석 이름 아닌가?”
“응, 선임 마법사가 되면 가장 먼저 살펴볼 장소야.”
얼마 전.
마탑에서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와 마주쳤었던 제시였다.
그때 제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었다.
평소엔 볼 수 없었던 표정.
마티스,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니까.
그래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거냐고.
그러자 마티스는 대답한 것이었다.
-“빛이 있었습니다, 제시 양. 아메시스트 홀에 말입니다.”
*
……뭐냐, 갑자기 귀가 격하게 간지럽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알아, 나도 안다니까?!
그랑펠의 면박.
그 바람에 가려움을 외면한 채.
필사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광물에 정신을 집중한다.
뜬금없이 광물을 노려보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뭐긴 뭐겠냐, 새로운 기이를 연구 중이지……!
현실의 시간으로 정확히 일주일 뒤.
상사화를 통해 지옥에 진입해야 하는 나였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고?
아서라.
일주일도 당장 지옥에 진압할 기세였던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얻어낸 준비 기간이었다.
심지어.
-“총대장이 함께하는 이번에야말로 지옥을 탐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죠.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 이름값을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하핫.”
……나, 이호열이 아닌 타인의 사정을 내세워서.
‘일주일, 마냥 흘려보내선 안 된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
가넷 홀에 들러서 지옥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결전용 마도구를 대여해 두는 건 물론, 클라우디령에 들러 챙겨와야 하는 아이템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국 나만 잘하면 된다, 호열아. 나만.’
바로 나의 성장이었으니.
나는 조금이라도 성장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일천(一千) 레벨을 돌파한 시점에서 웬만한 균열을 도는 것보다는, 이미 내가 가진 수단을 기이로 응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게 더욱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책상 위에 광물.
옵시디언을 올려놨다.
마력을 집어삼키는 성질을 가진 옵시디언이었다.
‘옵시디언이야말로 마법사의 천적.’
허나, 천적관계조차 기이로 극복할 수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 나는 약점 따윈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기이를 발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물론, 옵시디언이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째, 눈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랑펠의 재능은 역시나 찬란했으니.
옵시디언이 조금이지만 달싹거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흔들흔들.
그저.
……반짝.
간신히 붙잡은 실마리를 놓게 하는 방해꾼이 있었을 뿐.
그랑펠의 학구열에 관해서 말하라면.
내 입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
‘내가 뭣 때문에 밤잠을 설쳤었는데.’
마탑 낙하산 시절만 하더라도 마탑에 존재하는 마법 서적을 전부 들춰볼 기세로 독서에 열중했던 이 몸뚱이였으니까. 당연하게도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다.
“황금보다 귀한 시간을 투자했거늘.”
과장이 아니다.
천하의 그랑펠이 오후의 티타임을 생략하면서까지.
열중했던 기이의 진보였단 말이다……!
그 후폭풍이 어떨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기에.
나 역시 신경을 거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평소보다 유심히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을 너머에서 방대한 기운이 일렁거립니다.]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같은 처지였으니까.
이게 바로 ‘그거’구나?
파이몬이 말했던.
숨길 수 없다는 십좌의 존재감.
‘……이런 거라면 화신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는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 순간, 내가 메시지를 목격한 것처럼.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상위 마왕들이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래서 누구냐?
이런 존재감을 뽐내면서 움직이는 녀석은.
내 집중을 방해한 녀석은.
이내, 메시지가 떠오르고 나는 입을 열었다.
고작 일주일도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구나?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존귀한 파이몬.] [존귀한 마계의 왕이 손님을 맞이했도다.] [그대처럼 찬란한 은발을 가진 사내를.]“파이몬.”
메시지 속 그대는 나겠지.
덕분에 나처럼 찬란한 은발을 가졌단 사내가 누구인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클라우디의 상징, 찬란한 은발.
‘그랑펠 말고 클라우디는 한 명밖에 없으니까.’
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프라이드.”
*
마계 서부.
프라이드는 파이몬의 권역에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와 그대의 목적은 같다, 존귀한 파이몬.”
프라이드가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그랑펠, 나의 가련한 아우를 쥐고 흔드는.”
진심이 느껴졌다.
“한 줄기 빛의 말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