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13
◈ 514화. 유쾌하지 않은 일이거늘 (3)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퀘스트 목표가 어린 시절, 그랑펠이었을 줄이야.
‘아니, 그럴 만도 한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확실히 내 설정 속 그랑펠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를 바꿀만한 중요 인물이니까.
덕분에 짐작이 됐다.
‘막시마의 황금 정예병.’
막시마의 가주와 붙어먹었다는 녀석이 누구인지도.
‘프라이드, 역시 너냐?’
너는 이때부터 그랑펠을 클라우디 가문 후계자 경쟁에서 배제하길 원한 거였냐? 문득, 막시마 가문의 현 가주 이그나이트 막시마가 떠올랐다.
숲의 유그릭.
용맹의 캔설.
전율의 아카몬드.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긴 뭣하지만…….’
회개하고 내게 충성을 맹세한 나머지 가문의 가주들과 다르게 황금의 막시마 가주인 이그나이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성한 탓에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
나는 물론이요,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인 벨리에. 그리고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찾아왔던 여신교단의 사제들도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었는데…….
‘전부 이날의 대가였다면 이해가 돼.’
아르카나에서 맹약이란 무거우니까.
‘드래곤과 상위 마왕조차 자유로울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이그나이트는 막시마의 가주로서 뒤늦게 막시마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거겠지. 그렇다면 과거를 바꾼다면 이그나이트의 정신도 온전해질 수 있는 걸까.
‘뭐,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하겠지.’
근데, 아마도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이건 그래도 선을 넘었잖아, 막시마.’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가 태어나고 기어 다니고 성장하는 걸 전부 지켜본 덕분이려나. 퀘스트 목표인 저 꼬맹이 그랑펠의 나이가 대충 짐작이 갔다.
기껏해야 5~6살 정도.
나는 콧물이나 찔찔거렸을 나이였거늘. 꼬맹이 그랑펠에게선 벌써부터 격식이 느껴졌다. 다만, 그것조차 꼬맹이라 귀여워 보였을 뿐이지.
슥.
작은 손으로 수풀을 헤치고는 고개를 내민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털어낸다. 의복에 더러운 게 묻지는 않았나, 살펴보는 게…….
‘그놈의 결벽증은 이때부터 여전했구나, 너?’
하지만 확실한 건 꼬맹이 그랑펠의 눈빛에선 생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의 그랑펠에게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인간미로구만.
‘세상만사를 다 아는 척하니까, 지금의 넌.’
불현듯 드는 의문이 있었다.
역시, 같은 또래의 조카를 둔 삼촌의 마음 때문이겠지.
대체 어린 그랑펠은 어쩌다가 이런 위협에 노출된 걸까.
‘물론, 고민하기 전에.’
스스스.
“……?!!”
나는 엘프의 발놀림을 발휘.
은밀하게 막시마 황금 정예병들에게 접근했다.
치렁치렁 거리는 악크샨 망토로 얼굴과 전신을 가렸거늘.
그럼에도 화들짝 놀라는 눈치로군.
‘확실히 4가문 중 하나, 막시마 최정예들이야.’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파팟.
찰나의 움직임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거겠지. 그러나 그 식견을 칭찬해 줄 생각은 없다. 이 순간, 내겐 귀철처럼 거창한 무기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첫 산책.’
자고로 첫 시작이 중요한 거 아니겠냐, 그랑펠?
‘처음부터 트라우마를 심어줄 생각은 없다고.’
휘릭.
시야의 사각을 파고드는 협동 공격이 쏟아진다.
내 숨통을 노리는 높은 수준의 협공이었다.
하지만 유감이다.
‘나는 이것보다 살벌한 비수와 합을 겨뤄본 적이 있거든.’
아르카나 대륙 최흉의 범죄집단,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에서 말이야.
‘느려.’
그림자 신의 사도가 날려오던 비수에 비하면 황금 정예병들의 공격은 무뎠다. 한마디로 살의가 부족했다. 치렁치렁 거리는 악크샨 망토조차 스치지 못할 정도로.
그렇다면 나의 차례다.
나는 황금 정예병을 발견했을 때부터 방출했던 마력 입자를 탐색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황금 정예병에 비하면 아직도 내 [근력], [민첩] 수치는 형편없겠지.
‘어쨌거나 은밀하기만 하면 되잖아.’
그러나 간섭 과정에서 더하는 꼼수.
꾸욱.
마력 입자로 추진력을 더한 맨손 격투의 파괴력은 가히 ‘기이’할 정도였으니. 나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두 명의 황금 정예병을 처리했다.
……털썩.
남은 건 한 녀석.
아득한 격차를 느낀 건가.
내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마지막 정예병.
“사, 살……?!”
나는 그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막시마 황금 정예병에게 상태이상, ‘침묵’이 발생합니다.]말했잖아, 저 꼬맹이를 방해하지 말라고.
나는 황금 정예병의 입을 막은 뒤.
꼬맹이 그랑펠의 기척을 살폈다.
‘하여튼 예민해.’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뭔가를 들은 건가.
꼬맹이 그랑펠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봐봐, 신경 쓰길 잘했지?’
여명의 재킷이었으면 지금 백 퍼센트 발각됐다니까?
‘그러면 이쪽은…….’
저 그랑펠이 조금이라도 경계를 풀면 그때 심문하기로 할까.
프라이드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건.
언제까지나 내 추측이었으니까.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겠지.’
나는 텔레파시로 내 뜻을 전했다.
……끄덕끄덕.
겁에 질려서 간신히 고개만 주억거리는 걸 보니까.
허튼짓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황금 정예병들도 내키지 않았던 명령을 따르던 눈치였으니까.
‘어쨌거나, 운이 좋았네.’
왜, 산책을 끝낸 그랑펠이 돌아갈 곳은 클라우디 가문의 대저택일 터. 나는 클라우디 가문의 히든 퀘스트와 신화급 퀘스트를 동시에 클리어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산책 루트가 맞냐?
어째 보면 볼수록 어째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이 숲은 클라우디령 밖과 통했다.
그러니 막시마 가문의 황금 정예병도 잠복할 수 있었던 거고.
……잠깐만.
‘설마 첫 산책이라는 게.’
클라우디령 밖으로 나가는 거였어?!
‘아무리 그래도 가출은 아니지, 너?’
규율을 중시하시는 우리 그랑펠 님께서 이런 일탈을 저지르실 리가 있으랴. 게다가 나이를 생각해 봐라.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우리 아랑이 나이대에 가출은 좀…….
“지켜보고 있기 힘들군.”
어째 잠잠하다 싶던 입방정.
‘저거 너잖아, 그랑펠.’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도 가차 없구만?
그랑펠은 당장에라도 어린 자신을 훈육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지가지 하네.’
시야가 점멸했으니까.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악마의 기척.
말했다시피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는 흔치 않았다. 긴말할 거 없이 악크샨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낯설다.’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를 향한 두려움이 적기에.
부정적인 감정 또한 미약해 악마가 강성할 수 없는 환경이었거늘.
‘강하다.’
그럼에도.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저릿거릴 정도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정체를 대충은 짐작할 순 있었다.
보나 마나 칠죄종 거악이겠지.
‘분명, 칠죄종은 마계의 악마를 잡종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칠죄종은 마계의 악마를 거슬리는 존재로 여겼거든. 부정적인 감정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데, 마계의 악마들이 날뛰면서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갔으니까.
대격변 이전 거악들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상위 마왕이 일곱이나 더 있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잖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내가 낯설다고 느낀 이유였다.
‘그래서 누군데?’
탐욕을 시작으로.
아직 사냥하지 못한 마지막 칠죄종, 오만까지.
모든 칠죄종의 기척을 직간접적으로 느꼈던 나였다.
그러나 이 순간.
감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거악의 기척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마주했던 칠죄종, 어느 누구라고 확신할 수 없을 만큼.
그때였다.
“!”
흐트러트렸던 마력 입자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력 입자에 간섭, 곧바로 ‘절대영도’를 발현했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황.전투력이 대폭 상승한 지금.
아무리 방대한 마력이라고 한들.
더욱더 은밀하게 조작할 수 있게 된 나였으니.
이번에는 소리도 소문도 없이 전투가 끝났다.
쩌저적.
나는 고개를 돌려 얼어버린 형상을 바라봤다.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건 악마가 아니었다.
은신을 해제하는 도중 급랭된 건가.
덕분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 용병단이로군.
클라우디가 멸문당하던 ‘그날’.
악연들과의 인연은 역시 이때부터 시작된 건가?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내 설정에 따르면 그랑펠이 후계자로 선택되기까지는 못해도 1~2년이 남은 지금 시점이었다. 이 시간대에서 그랑펠이 이토록 노골적인 살의에 노려질 이유는 없을 텐데.
‘만약, 프라이드의 짓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어린 그랑펠이 클라우디령 밖으로 가까워지는 만큼.
더욱더 노골적인 살기가 어린 그랑펠을 향해 쏟아졌다.
마치 온 세상이 저 꼬맹이를 미워하는 것처럼.
‘젠장, 머리가 복잡해.’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악마.
정작 녀석은 꼬맹이 그랑펠을 향해 어떠한 마수도 뻗쳐오고 있지 않았는데, 오히려 악마가 아닌 존재들이 꼬맹이 그랑펠의 목숨을 진심으로 노리고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른으로서 지켜보고 있기 힘든데.’
퀘스트를 떠나서 저 꼬맹이가 잘못하면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이런 위협에 처한 건지. 나, 이호열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고오오오.
그런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눈치 빠른 꼬맹이 그랑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처리하고 싶었지만, 숲에 깔린 적의 숫자를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만 부탁하자, 어린 그랑펠.’
소란스러워도 너무 놀라지만 마라.
*
그랑펠은 결심했다.
클라우디 가문을 떠나기로.
그것은 충동이나 호기심이 아니었다.
다섯 살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클라우디령 밖으로 통하는 숲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랑펠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주변에 넘실거리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가문에서 이전까지 접한 마법들과는 달랐다.
보고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며 고도의 간섭이 뒤섞인 마법. 그 마법의 발현자일 게 분명한 검고 치렁거리는 망토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
그 누군가는 말했다.
“명심해라, 소년.”
사내의 말이 어린 그랑펠의 가슴 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
아마도 그때부터였으리라.
어린 시절부터 고고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던 그랑펠에게.
유독 이질적인 취향 하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펄럭─
마력의 반발.
그로 인해 나부끼던 망토를 바라보던 그랑펠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그랑펠은 작은 주먹을 쥐고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이 도망쳐 온 클라우디령을 향해서.
*
……야, 그랑펠.
꼭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냐?
하여튼 그랑펠식 화법.
‘어떻게 된 게 자기한테 제일 엄격하네.’
저 나이 때 꼬맹이가 호기심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바깥세상이 궁금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 이호열 솔직하게 조금 아쉬웠다.
‘씁, 궁금했는데.’
꼬맹이 그랑펠이 클라우디령에서 빠져나와서 어떤 일탈을 벌일지가 말이야. 그러나 꼰대……. 아니, 어른 중에서도 어른이신 우리 그랑펠 님께서 잔소리하신 덕분.
‘아직 미운 일곱 살이 아니라서 그런가.’
꼬맹이 그랑펠은 얌전히 클라우디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쯤에서 퀘스트의 점멸도 약해졌다.
직감할 수 있었다.
‘꼬맹이 그랑펠이 귀가하면 끝나겠군.’
퀘스트는 성공일 테고, 나도 이 과거에서 튕겨져 나가게 될 터.
그렇다면 걸음을 서두르자.
왜, 또 하나의 퀘스트가 있잖냐.
-온전한 클라우디 가문을 목격하라. (진행 중)
낯선 악마의 기척은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온전한 클라우디 가문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보자, 지금 목격한 걸 영감으로 반전 마법을 발현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도중.
어린 그랑펠의 걸음이 멈췄다.
숲에서 빠져나와 대저택이 보이는 초원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시야가 점멸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급격하게 흐려져 가는 시야.
나는 흐릿한 시야로 다급히 클라우디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뭐야, 저거……?’
꾸벅.
예의가 바르게도 내가 있는 숲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꼬맹이 그랑펠. 그런 그랑펠의 뒤에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내게는 익숙한 꽃이었다.
붉다.
피처럼 붉은 꽃이었다.
오직 깊은 원한이 담긴 피에서 자라나는.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였다.클라우디령의 광활한 초원에는 피에서 자라난 상사화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어 있었다. 나는 뒤늦게 그랑펠이 자기 자신, 꼬맹이 그랑펠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게 됐다.
돌려보내면 안 되는 거였잖아, 그랑펠.
어째서 그렇게 모질 게 말한 거야?
나는 몰랐어도,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잖아……?
‘대체 왜……?’
그러나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고 말았다.
.
.
.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항상.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에 처음으로 화가 났다.
나는 네게 흑역사부터 내 모든 걸 털어놨는데.
너는 내게 어째서…….
‘아직도 과거를 숨기고 있는 거냐,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