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29
◈ 529화. 대리자들 (1)
하여간 단도직입도 정도가 있지.
‘다짜고짜 지옥에 떨어지겠다니.’
지옥의 동행자이기에.
“풉, 푸흡!”
또 말도 안 되는 성서 나부랭이를 쓰면서, 그랑펠식 화법을 완전히 깨닫게 된 거겠지. 진위를 알고 있는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만이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지, 지옥이라니……?”
하지만 로렌츠크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뭐, 일반적인 상식에선 죽어서 떨어지게 되는 곳이 지옥이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너 방금 끔찍한 선언을 한 거라니까, 그랑펠?’
봐봐, 오죽했으면 평상시 지부장 회의에서도 우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양반들도 기겁하고 있겠어?
그러나 [지옥에서 자라난 상사화]가 뭐고,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고, 어디 입수했는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할 나의 입방정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 관한 질문은 후일에 받겠다.”
봐봐, 여기서도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몸뚱이를 버틸 수 없는 수준까지 혹사했다고!’
아까부터 요란하게 점멸하는 시야.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태이상, ‘마력 탈진’을 거부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태이상, ‘기절’을 거부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태이상, ‘만성피로’를 거부합니다.]…….그럴만도 하다.
‘상쇄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가 누적됐어.’
아르카나 대륙.
오그라티움에서 반전 마법을 발현하느라 마력을 물 쓰듯 써버린 것도 모자라서 [흑화]한 그랑펠이 날뛴 덕분에 육체에 쌓인 후유증.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조금 전까지 제주도를 반전마법으로 뒤덮다시피 한 내가 아니겠냐.
‘무한에 가까운 거랑 무한은 엄연히 다르니까.’
십좌에 오르며 격이 달라진 마력.
거기에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나였거늘.
‘진짜 더 이상은 한계다.’
삐끗.
오죽했으면 천하의 그랑펠 격식에 강단에서 잠깐이지만, 휘청거릴 정도였겠냐고.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나는 뻔뻔하게 좌중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다들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모아 놓고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내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한테도 휴식이 필요하단 뜻이다…….
*
거대 연합.
서울 제1지부.
가온 빌딩.
“보셨습니까?”
남태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사기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으면서.
“가느다란 뱀눈을 가진 저보다 날카로운 맹수의 감각을 지닌 태민 군은 더욱 또렷하게 보셨겠죠. 총대장님께서 찰나지만……. 분명히 휘청거리신 모습을요.”
……끄덕.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남태민.
히사기가 말을 잇는다.
“확실히 무리가 되셨던 겁니다.”
“뭐가.”
“총대장님조차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말입니다.”
짧지만 벼락같았던 원탁회의.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을 히사기가 내뱉는다.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말, 알고 계십니까?”
“알아.”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최상위 랭커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두 사람. 그렇기에 구체적인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히사기가 나지막이 말했다.
“총대장님의 힘에도 분명 대가가 있었던 겁니다.”
“…….”
“사실 조금만 고민한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한 힘에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건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히사기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가 바로.”
내뱉고 싶지 않았지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생명으로 추측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플레이어의 생명력을 뜻하는 게 아닌,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겁니다.”
그저 단상에서 휘청거렸던 것만으로 과한 추측을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럴 리가. 총대장님께선 분명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부디 아니기를 바라야겠습니다만. 어쩌면 총대장님께선 끝이 정해진, 시한부의 삶을 살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머지않아 지옥에 떨어지신다는 말씀은 분명…….”
남태민이 말을 끊었다.
“알고 있어.”
지옥을 언급하셨다는 것.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빠득, 남태민이 이를 악물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으신 걸지도 모르지.”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물론,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고 할지라도…….
냄새는 물론, 그 인격조차도 뒤바뀌는 리스크를 가지고 있는 총대장님의 기술이었다.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건 알아차려야 했는데…….
자책하는 남태민에게 히사기가 물었다.
“저희는 각오해야 합니다, 태민 군.”
“…….”
“언젠가 드리울 총대장님의 공백을.”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뱀처럼 차가운 피를 가진.
히사기조차도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각오하는 것과 감당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그보다 레오니, 이건 어디 갔냐?”
히사기는 알면서도 곧장 대꾸하지 않았다.
‘레오니 양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을 레오니가 모르리라는 건 그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순간, 그녀가 자리를 비운 건. 다름 아닌 제시 하인네스와의 만남 때문이었으니까.
“아직 마탑에 계실 겁니다.”
“마탑? 그 일자무식이가 마탑엔 뭣 하러?”
“그 별명,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전하길 뭘 전해 장난인데.”
“지금은 장난칠 때가 아닌데요.”
“아, 진짜……!!”
두 사람이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티격태격거리던 순간이었다.
벌컥.
마스터룸 문이 열렸다.
기별도 없이 마스터룸을 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형?”
남철민이었다.
하지만 남태민은 흠칫하고 말았다.
형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으니까.
안경은 어디에 벗어둔 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남철민이 말한다.
“다들 기사 봤어?”
“기사? 무슨 기사?”
“흔들기가 시작됐어.”
“……!”
흔들기, 그 말에 직감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서 새어나간 거다.
제주도에서의 총대장님의 행적이.
“나도 제주도 상공에 있었으니까. 확신할 수 있어. 그 어떤 카메라를 들고 와도, 스킬을 발동해도, 제주도 외부에서 내부를 관측할 방법은 없었어.”
적합한 마력으로 고립됐던 제주도였다.
하지만 그 내부에 진입했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히사기가 핵심을 꿰뚫는다.
“성전 연합군이 AAU측에 전달했던 정보가 새어나간 거군요.”
“뭐?! 하여튼, 어딜 가도 쓰레기 새끼들이 꼭 몇 명씩 섞여 있다니까? 총대장님이, 우리가 호의로 대하면 꼭 이렇게 선을 넘어…….”
“맞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뿐이라면 열을 내지도 않았다. AAU에 미꾸라지가 몇 마리 섞여 있다는 것쯤은 일찍이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건 증언이었다.
히사기가 말했듯.
제주도 내부에 있었던.
성전 연합군 소속 플레이어의 증언이었다.
“익명의 랭커는 이렇게 밝혔다. 이호열 성전 연합군 총대장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내가 우려했던 건 그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호열 총대장이 스스로 추태를 보였다고 선언한 이유다……. 대체 누구야, 이 개새끼……?”
머릿속에서 스쳐 가는 후발대들.
세컨드 썬, 보헤미안, 안티태제, 신화, 워리어즈…….
과거엔 경쟁자였지만, 성전 연합군에 합류하며 서로의 긍지를 확인했다고 생각했거늘. 솔직하게 남태민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남철민이 대꾸했다.
“댓글 반응을 봐서 알겠지만, 아직까지는 누구도 믿지 않는 분위기야. 그래, 평상시 같았으면 나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미 뇌리에 박힌 몇 개의 문장들.
『이호열 성전 연합군 총대장.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
스스로 추태를 보였다고 선언한 이유.』
남철민이 후우,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이제부터 판도가 바뀔지도 몰라.”
“동의하는 바입니다.”
“뭐가 어떻게 바뀐다는 건데?”
슥, 히사기가 가온 빌딩 건너편 마천루를 바라본다.
“성전 연합군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총대장님으로부터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기이의 땅이 된 서울.
총대장님의 불완전함.
둘 중 무엇이 크고 작은 변화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떠드는 이들의 심정을 마냥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해와 실천은 별개의 문제다.
남철민이 물어왔다.
“그래서 원탁회의에선 어떤 이야기를 나눴어? 나도 참석하고 싶었는데, 진짜 기사 올라오는 꼴을 보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
“그게 내가 참을 수 없는 이유야, 형.”
“……그게 무슨 소리야?”
안경을 벗은 탓에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동생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런 동생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위험한 균열에서도, 몬스터 앞에서도, 심지어 악마 앞에서도 보인 적이 없던 수준의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익명의 플레이어란 새끼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졌거든.”
“……!”
심지어.
평상시였다면 동생을 만류했을 히사기마저도.
지그시 눈을 감아버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철민이 진지하게 물었다.
“……말해줘. 원탁회의에서 무슨 말이 오간 건지.”
*
마탑.
계급이 높을수록 더욱 높은 층에 접근할 수 있단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 사나워서 뒈지겠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 진짜.”
마법 좀 모른다고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레오니는 오가는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입 밖으로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내뱉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외부인을 마탑 상층으로 초대할 수 있는 건 선임 마법사부터 허가된 권한이라서요!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선임 마법사가 돼서 대접하겠습니다. 그게 격식이니까요.”
“……뭐?”
레오니는 올곧게 말하는 제시에게 흠칫했다.
선임 마법사면 엄청나게 대단한 양반들이잖아?
그런데 고작 나를 제대로 대접하겠다고.
선임 마법사가 되겠다는 말인가?
“……크흠.”
레오니는 좋을 대로 생각하고는 헛기침을 해버렸다.
“흠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수석님의 시한부에 관해서요.”
“야씨, 그걸 이런 데에서 말하면 어떡해?!”
제시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마법으로 저희가 나누는 대화를 숨겼거든요! 황혼의 마력으로 발현해서 파훼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이 수석님과 메어리 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두 분에게는 숨길 만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요.”
“그, 그래……?”
역시 마법사가 사기라니까? 싸울 때마다 몸에 흉터가 하나씩 늘어나는 광전사랑은 차원이 달라, 차원이. 레오니가 구시렁거리기도 잠깐 말을 이었다.
“역시, 너도 알아차린 거지?”
“이 수석님의 화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모두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 사람, 말하는 게 워낙 멋대로니까…….”
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레오니가 물었다.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있어?”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마법사이고, 같은 마탑 출신이고, 같은 히든 클래스일지도 모르고, 하여튼 나보다는 그 작자에 관해서 아는 게 많을 수밖에 없는 제시 하인네스일 테니까.
하지만 제시는 오히려 반문했다.
“……제가 레오니 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요?”
거대 연합이 출범했을 때부터 같이 했고, 같이 균열도 공략했고, 성전 연합군 회의에도 함께 참석하고, 하여튼 자신보다는 레오니가 많은 걸 알고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었으니까.
“허.”
“앗.”
두 사람이 같은 타이밍에 웃음을 뱉었다.
“똑같이 아는 게 없었네.”
“그러네요. 그런 분이시니까요.”
“……젠장.”
레오니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이를 악물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제시도 마찬가지였다.
스승님에게 속내를 들키기 싫어 고깔모자를 벗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둘 다 아는 게 없다면 나눌 대화는 없겠지.
“그럼 슬슬…….”
레오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제시가 마법 발현을 해제하자 그제야 주변의 소음이 들려왔다.
레오니가 제시에게 물었다.
“근데, 여긴 원래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니요.”
제시가 고개를 저었다.
기본적으로 정숙을 유지해야 하는 게 마탑의 규율.
이 수석님이 수석으로 올라서신 뒤에는 더더욱 엄격해졌었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 사건이 터진 것 같은데요.”
제시가 곧바로 움직였다.
로브를 바닥에 질질 끌고 있는 견습 마법사를 붙잡고는 물었다.
그러자 견습 마법사가 흠칫했다.
“대,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님?! 제시 하인네스 님 맞으시죠? 저 아르카나 대륙 출신이지만, 제시 하인네스 님을 가장 존경하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아, 넵!”
정신을 차린 견습 마법사가 곧 이유를 말한다.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님께서 쏟아지는 증명 요청에 화답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그 증명이 지금부터 크리스탈 홀에서 시작된다고……!”
이런 때에 갑자기 뭔 증명?
그 말에 레오니가 멈칫했다.
그보다 마티스 딘 카를이 누구였더라……?
의문도 잠깐, 제시가 설명을 덧붙였다.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설마……. 그 온통 검은 인간?”
“네, 그리고 그런 마티스 님이 증명하신다는 건…….”
제시의 얼굴이 굳었다.
“아마도 이 수석님이 제주도에 발현하셨던 흑마법의 당위성을 따지기 위함일 거예요.”
“……뭐라고?”
그렇다.
이 수석님의 흑마법이 정말로 아군의 목숨을 해하기 위해서 발현이 된 건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건 흑마도학의 창시자인 마티스 선임 마법사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요청 따위 마탑은 무시해도 될 텐데.’
제시가 결심을 마친 표정으로는 답했다.
“함께 가죠, 레오니 씨.”
“엥? 내가?”
“물론이죠.”
“허.”
저기.
아무리 그래도.
나, 마법 증명 같은 건 안 졸고 버틸 자신이 없는데?!
*
“영원불멸의 진리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나, 마티스 딘 카를.
“이 자리에서 오직 진실만을 선언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