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36
◈ 536화. 각자의 무게 (2)
위화감을 느낀 건.
“버려진 땅에서 복귀했을 때부터였습니다.”
버려진 땅, 중국.
여태껏 탈림과 여신교단의 성기사들은 중국에 출현하는 균열을 공략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여신교단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
그러나.
“실책이었습니다.”
간과하고 있었다.
성지, 뮤온의 내부사정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걸. 성기사단장인 자신을 능가하는 신성력을 가진,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짜 성녀가 돌아왔으니까.
키코의 눈빛이 움찔거렸다.
“성녀, 프레이자께서 변심하셨단 건가요……?”
탈림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변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요.”
나스로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확실한 변심이지 않습니까? 여신교단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려 보시지요. 지금이야 자급자족하고 있지만, 초창기 뮤온에 이 수석님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그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자 성녀께서도 그 점은 확실하게 인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신념이 흔들리지 않으셨을 뿐이지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다니? 설마, 처음부터……?”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성녀의 믿음.
탈림이 여신교단의 진실을 밝혔다.
“나스로우 선임 마법사께서 추측하시는 바가 옳습니다. 성녀, 프레이자께선 아르카나 대륙을 ‘한없이 깊은 어둠’에게서 구원하라는 여신의 계시를 받으셨습니다.”
“……!!”
키코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건 이 수석님의 수많은 이명 중 하나였으니까.
이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알고 계십니까, 탈림 에베르 단장?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이 모인 마탑이라는, 진리의 상아탑에 발을 들이고서는. 우리의 수석 마법사를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나스로우의 말에 탈림은 겸허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또 뭡니까?”
“그렇기에 마탑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입니다.”
“……?”
잠깐, 격앙했던 나스로우.
‘도움 요청……? 아, 그랬었군!’
그는 뒤늦게 탈림이 마탑을 제 발로 찾아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탈림은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혔었다.
나스로우가 설마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나 원 참, 인생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다시 정리해도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여신교단이 내분이라니.”
그렇다.
여신교단은 둘로 갈라진 것이었다. 성녀 프레이자를 따르는 세력과 성기사단장 탈림을 따르는 세력으로. 증거는 확실했거늘. 나스로우는 의심이 많은 사내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믿을 수 없군요, 탈림 단장.”
“의심을 떨칠 수 있게 정직히 답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여신의 말에 반항하는 겁니까? 여신을 섬기는 성기사라면, 여신의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말이죠.”
탈림은 작게 웃었다.
“반항이라. 한때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이 수석님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다.”
그 차가운 목소리가 탈림에게는 그리 들렸었다.
-타인이 아닌 그대의 믿음을 관철하라.
탈림이 굳은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저의 여신이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툭.
탈림이 자신의 판금 갑옷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직 성녀만이 들을 수 있다는 여신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탈림은 흔들리지 않았다.
“설령, 성녀의 여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들.”
내가 섬기는 여신은 이 세계에서 가장 소외당한 자들을 도왔던 나와 성기사들의 헌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 희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더 이상 내가 섬기는 여신이 아닐 테니까.
“제 긍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 흔들리지 않는 긍지가 말하고 있습니다.”
탈림 에베르.
그는 자신의 믿음을.
긍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에 이어 ‘이 세계에서 가장 소외당할 자’를 위해서.
마탑을 찾아온 것이었다.
“여신교단에게서 ‘한없이 깊은 어둠’을 수호하라고.”
“……!!”
나스로우와 키코.
두 선임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감히 제 누추한 집무실에서 나눌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겠군요. 탈림 성기사단장, 저와 키코 선임 마법사의 뒤를 잘 따라오시지요.”
고오오.
이윽고 집무실에 떠오르는 포탈.
어디로 향하는 포탈인가?
생각하는 탈림에게 키코가 소근거렸다.
“아무래도 최상층에 오르기 위해선 마탑의 계단을 쉴 새 없이 올라야 하니까요……! 이전과 다르게 마탑에도 보는 눈이 많아졌거든요. 양해해 주세요.”
갑자기 최상층이라니.
어째서?
곱씹는 탈림에게 나스로우가 설명한다.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탈림 성기사단장. 무려 두 명의 선임 마법사가 당신의 주장이 합당하다고 판단. 선임의 권한으로 당신을 우리의 탑주께 안내하겠다는 겁니다.”
그 어깨를 으쓱이면서.
.
.
.
마르셀로는 붉은 꽃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박제 마법을 발현한 지금.
꽃은 아무런 향도 풍기지 않았다.
“그 이름도, 꽃말도 아는 이가 없는 꽃이라…….”
에메랄드 홀의 서적에도, 비약초를 연구하기에 식물에 관한 지식이 풍부할 것이라 여겼던 클레 오디아 숙련 마법사도, 붉은 꽃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모험가의 시야라면.’
어쩌면.
이 붉은 꽃의 정체를 단번에 밝힐 수 있겠지.
그러나 마르셀로는 서두르지 않았다.
크리스탈 홀, 탑주의 자리에서 봤던 풍경.
‘경의 시한부, 그 사실만으로도…….’
경을 진심으로 따랐던.
모험가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었으니까.
그 이후로 채 며칠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 지금이었다.
단순히 붉은 꽃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신뢰할 수 있는 모험가들에게 경의 행방이 묘연해지셨다는 말을 하게 됐을 때. 그들이 받을 충격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마르셀로가 떨리는 손가락을 바라봤다.
“저조차도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드니 말입니다.”
꾹.
그러나 마르셀로는 포기하지 않겠다, 주먹을 굳게 쥐었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으니. 그래, 지금이야말로 경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할 때였다.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경.”
당신이 저를 시무아르드 가문.
시한부의 저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걸.
그러니 마르셀로에겐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유스라 왕국으로 가겠다.’
고대 왕국, 유스라.
고대 아르카나 대륙의 지식이 깃든 그 땅이라면.
어쩌면 이 꽃에 관해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유스라 왕국엔 탐험가 연맹이 있다.
‘탐험가들에겐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정보가 있다지.’
마르셀로가 곧바로 유스라 왕국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스스슥.
양피지에 글귀가 떠올랐다.
그 글귀를 확인한 마르셀로의 눈이 가라앉았다.
“……여신교단, 탈림 에베르 성기사단장.”
*
[히든 퀘스트 : 지옥촌의 축제]살아있는 자들이 지옥을 밟았으니, 원혼들에겐 축제가 열렸도다. 작은 촌마을부터 지옥의 왕궁까지. 모든 이들이 성대한 접객에 임할지니, 살아 숨 쉬는 자여. 부디 지옥에 굴복하지 말지어다.
-지옥촌의 축제에서 생존하라. (진행 중)
●술래가 되어 술래잡기에 임하라. (진행 중)
히든 퀘스트.
‘뭐, 지옥은 꼭꼭 숨겨진 장소니까.’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그러니 내가 퀘스트창에 놀란 건 다른 문장 때문이었다.
작은 촌마을부터 지옥의 왕궁까지라고……?
‘이런 걸 몇 개나 더 돌파해야 하는 거야?’
깔깔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
기괴할 정도로 과장된 춤.
화려한 축제.
그 이면에 감춰진 살의(殺意).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원혼들을 바라봤다.
관문에 진입하기 전 마주했던 원혼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래도 이쪽은 인간의 형태는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얼굴은 없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달걀귀신을 닮았군.
끊이지 않고 웃음소리를 내뱉는 입 말고는.
얼굴에 이목구비랄 게 없었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생김새 따윈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말했듯 춤을 추며 축제 분위기에 살의를 숨긴 채.
다가오는 이들.
그 덕분일까.
“뭐 하는 거야, 저것들?”
“같이 춤이라도 추자는 건가, 하하.”
누구보다 살의에 민감할 엘시도어와 킨베르조차 별다른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 이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로렌츠크뿐이었다.
“총대장, 괜찮으신 겁니까?”
지옥에 관해 알고 있으니까, 짐작할 수 있는 건가.
‘거, 물어봐 줘서 고맙긴 한데…….’
곧바로 괜찮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술래가 된 이후.
메시지가 끊이질 않고 갱신되고 있었거든.
[죄가 당신의 몸을 무겁게 합니다.] [죄가 당신의 몸을 무겁게 합니다.] [죄가 당신의 몸을 무겁게 합니다.]…….정말이지, 대단하구나 클라우디 가문……!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데 말이야.’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조차도 모든 상태이상을 상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클라우디 가문이 쌓아올린 원죄의 무게가 막중하다는 거겠지.그나마 다행인 건.
“그대들은 우려할 것 없다.”
술래는 오직 나뿐이니까, 민폐를 끼칠 염려는 없다는 거겠지. 엘시도어와 킨베르가 살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지옥촌은 오직 나를, 클라우디를 노리고 있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퀘스트창을 다시금 확인. 내게 주어진 세 개의 선택지를 확인했다.
●술래가 되어 술래잡기에 임하라. (진행 중)
1. 모든 참가자를 죽여라. (선택)
2. 죽어라. (선택)
3. 살아남아 꼬리를 끊어라. (선택)
일단, 하나는 제치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 이호열은 지옥에서 비명횡사할 생각 따윈 없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진다.
‘……솔직하게.’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건 그냥 조금이라도 수월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우리 그랑펠 님께선 관문의 문을 열어 재끼기 전부터 선언하지 않으셨던가?
“입이 있는 그대들이라면 말할 수 있겠지.”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로서.
클라우디 가문의 원죄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시겠노라고……! 그렇다면 가문의 원죄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 원혼들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나는 체념하고 말을 이었다.
“이 축제가 끝난 뒤에 듣겠다.”
그렇다.
나와 그랑펠이 선택한 건 ‘꼬리 끊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이 꼬리인지는 지금부터 탐색해야겠지. 스릉. 나는 귀철을 치켜들며 경고했다.
원혼이 아닌 아군에게.
“나와 거리를 두어라.”
“어째섭니까?”
“그대들이 휘말릴 일이 아니다.”
그래, 클라우디 가문 속죄 시간에 휘말리는 건.
클라우디 가문에 적지 않은 지분이 있을지도 모르는 나.
이호열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또각.
나는 그렇게 말하고 지옥촌을 향해 나아갔다.
‘몸이 무겁다.’
육체의 컨디션은 온전하지 않았다.
‘……아니, 최악에 가까운데.’
쉽게 말하자면, 클라우디 가문의 인간은 지옥에서 [첫 세계수의 축복]이란 사기 버프로도 상쇄할 수 없을 정도의 디버프에 시달린다고 하면 되겠군.
그러나 내겐 마력이 있었다. 나는 마력을 발현, 죄로 무거워진 움직임을 보조했다. 확실히 우려먹은 만큼 능숙해진 거겠지. 발현을 유지하는 데엔 불편함이 없었다.
문제는.
……서걱.
이곳이 지옥이라는 것이었지만.
낯선 검술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검술이면서도.
정점에 이르렀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주륵.
멀쩡했다고 상태였다고 해도 스쳤을 정도의 쾌검.
그렇다면 옆구리를 베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뭐, 지옥에선 남는 게 시간일 테니까.
고작 제1관문.
지옥의 촌구석엔 저런 검술을 지닌 이가 있다는 것에도.
그런 이에게 옆구리를 베인 것에도.
또한.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는 기본.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극한에 도달한 타인의 검술을 단 한 번만 보고 간파하는 그랑펠의 재능에도. 그리고 그러한 검술을 구조화하여 역순으로 되짚어보는 집요함에도.
그래.
‘내뱉은 건 실현하고야 마는 입으로 말했거든.’
생명을 반전시킬 수 없는.
반전 마법의 한계를 극복하겠노라고.
그러니까.
“말보다 행동으로 표현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이깟 상처쯤은.
“너그러이 이해하마.”
얼마든지 『반전』할 수 있단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