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48
◈ 548화. 범접할 수 없는 (2)
기이의 영역에 진입했다.
발을 내디디는 순간, 느꼈다. 이전까지와의 성장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어째서 호열이 레벨은 숫자 따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는지 깨닫게 될 정도로.
그 덕분에.
제시,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네 플레이어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기이를 갈고 닦는다면 나중엔 호열과 같이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동등하게 걷는 건 무리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걸림돌이 되진 않을 수 있으리라고.
그런데.
“형, 지금 내 기분 짐작이 돼?”
“……글쎄.”
“진짜로, 정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어.”
……꽉.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것도 손톱에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과거였다면 막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노력하면 언젠간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나 기이의 영역에 발을 들이자 비로소 보였다.
“……아니었어.”
겨우 몇십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거늘.
“나랑 호열 씨 사이엔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격차가 있던 거야.”
격이 다르다?
범접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아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부족했다.
“다들 무슨 일이십니까?”
할 말을 잃은 네 명의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넨 건.
호열의 역할을 대신해 성전 연합군을 이끌던 탑주, 마르셀로였다.
국가 단위를 감지하던 마력이 반응했다.
마르셀로가 경고했다.
“뮤온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적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아마도 모험가, 가이버가 이끄는 전쟁신 교단의 세력이겠지요.”
멈춰 있는 이들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 재회한 심정은 저도 여러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신속하게 뮤온을 함락시켜야 합니다. 양측에서 협공을 받는다면 전황이 복잡하게…….”
“저기, 마르셀로 탑주님……?”
“듣고 있습니다, 제시 하인네스 양.”
제시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가만히 있어야만 해요.”
“가만히 있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해입니다.”
언제나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히사기.
“히사기 씨?”
자신이 인정한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모험가 중 하나였기에.
마르셀로는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히사기가 무겁게 말을 잇는다.
“총대장님에게 지금의 저흰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잘 훈련된 유스라 왕국의 병사들도, 죽을 각오를 마친 플레이어들도,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저희도, 더 나아가서 마르셀로 탑주님을 비롯한 마탑의 선임 마법사 전원도. 예외는 없습니다.”
“……!”
마르셀로는 편협하게 사고하지 않았다.
마탑을 얕잡아보았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사기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끄덕.
마르셀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이의 영역에서만 보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탑주님.”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르셀로의 인정.
그리고 물음에 네 명의 플레이어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르셀로의 눈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진정으로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경께서 홀로 이 위기를 극복하실 수 있을 거라 예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전쟁은 완벽한 ‘반전’을 불러올 수 있을 겁니다.”
보다 먼곳을 바라보고 있던 것.
비록 기이의 식견은 갖추지 못했지만.
마르셀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사고했다.
모험가들의 세계는 분열 중이다.
크고 작은 분쟁과 갈등이야 언제든 있을 수 있거늘.
지금의 분열은 오롯이 여신교단으로부터 비롯된 것.
여신교단과 모험가 길드 보헤미안의 연합.
그 바람에 유럽의 국가들이 다른 꿍꿍이를, 해당 국가에 종속된 AAU 지부들도 한 발자국 물러서서 전황을 관망하고 있었으니까.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만약, 경께서 완승을 거두신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갈등은 사라질 게 뻔했다.
어쩌면 경께서 살아계시는 순간까지…….
이 세계에 두 번 다시 분열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마르셀로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나둘 입을 여는 이들.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총대장님은 이기실 겁니다.”
“그것도 반드시요.”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마지막에 중얼거린 건 레오니였다.
“……어느 정도로 짓밟힐지를 걱정해야 하니까.”
유럽에서 시작된 길드, 버서커.
‘저 멍청한 새끼들이 진짜.’
이 순간, 레오니의 머릿속엔 버서커에서 보헤미안으로 이적했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들이 목숨이 오직 단 한 명, 호열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마르셀로가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에 담긴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들은 경의 승리를 의심한 게 아니었다.
경께서 저들에게 어떠한 처분을 내릴지를.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셀로는 결연하게 눈을 떴다.
‘경께서 어떤 잔혹한 처분을 내리셔도 저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베푼 자비를 고려한다면, 그럼에도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는 채찍을 휘두를 필요도 있을 테니까.
그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서서히.
호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육망성 브로치 5/6]보통 아이템이 아니다, 이거.
나, 이호열.
말 그대로.
지옥을 ‘찍먹’하고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 일주일의 준비기간이 약간은 무색해질 정도로.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한 적이 없었으니까.’
원혼들은 나를 보고 울며불며 매달리고 바빴고, 주제를 모르고 날뛰던 임프들은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사냥해 주셨으니까 말이야.
심지어.
‘그랑펠이 숨기는 무언가와도 마주하지 못했지.’
그러니까 지옥에서 내가 얻어온 건 원혼들이 내게 바친 세 개의 [육망성 브로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아이템 세 개의 효과가 범상치 않았다.
각각의 효과도 물론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건.
완성되지 않은 세트 효과였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5/6]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3. 다수의 적과 적대시, 받는 피해량이 10퍼센트 감소합니다.] [4. 전투 중 최대 생명력이 70퍼센트, 50퍼센트, 30퍼센트, 10퍼센트, 1퍼센트에 이르렀을 때 ‘각성’ 효과를 획득합니다.] [5. ‘각성’ 상태에 돌입하고 일정 시간 동안 마력 소모량이 0이 됩니다.]……말이 되는 거야, 이게?
세 번째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여명을 기다리는 자] 세트 효과도 상당한 효과를 지녔으니까.그런데 네다섯 번째 효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밸런스 붕괴였다.
막말로 생각해 볼까?
‘마력 소모가 0이 된다면.’
내게는 [『기이』]를 난사할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간단하게 최상위 마법인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기이, [『절대영도』]로 코팅해버리는, 원래의 나였다면 발현하는 동시에 탈진해 버리고도 남는, 일명 ‘마력 지랄’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
‘쉽게 말해서.’
밸런스 붕괴.
확신할 수 있었다.
[육망성 브로치]는.플레이어가 습득해선 안 되는 아이템이었다.
‘그걸 넘어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말도 안 되는 입수 난이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쯤 되어야 한 조각을,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 던전 어딘가를 샅샅이 뒤져 한 조각을, 죽어서 떨어져야 하는 지옥에서 세 조각을.
‘심지어 나머지 하나는 아직 행방을 모르지.’
더더욱 확신이 생긴다.
이긴다.
성전 연합군,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나는 이긴다.
뮤온과 보헤미안 길드를 넘어서.
여신과 그러한 여신이 소속된 만신전을 상대로도.
이제부터는 그 증명이다.
슥.
옷매무새를 정리하듯 어긋나 있던 육망성 브로치의 각을 정돈한다. 그나저나 내가 이 정도로 고심하고 있으면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니냐, 그랑펠?
‘이 엄청난 브로치의 정체가 뭔지 말이야.’
그러나 그랑펠은 대답이 없었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새도 없었다.
나의 기척을 알아차린 거겠지.
뮤온에서 성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이야, 아직도 우렁차구만?
“우리는 버림받은 게 아니다!!”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숭고하게 죽어 신앙을 증명하리라!!”
내 앞에서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지옥의 임프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뭐,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거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럼 똑같이 사냥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내가 방금 뭔 생각을 한 거냐?
아무리 겹쳐 보였어도 그렇지, 사냥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고개를 털어내서 떨쳐버리고 싶을 정도의 잡생각이구만. 하지만 나의 자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녀를 태워라. 그리하면 우리가 승리하리라!”
그런 고함이 들려왔으니까.
‘마녀를 태워라…….’
그 말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뮤온에서 마녀라고 불릴만한 인물은 오직 한 명.
성녀, 프레이자가 마녀로 몰려 사냥당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반짝.
메시지가 정답이라는 듯 점멸한다.
[히든 퀘스트 : 마녀사냥]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성녀, 프레이자.
여신교단에게 프레이자는 더는 성녀가 아닌 마녀였다.
타락한 마녀에게 내려진 처분은 화형.
성녀인가, 마녀인가, 무엇도 아니라면 그녀는 누구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프레이자와 조우하라. (진행 중)
성전 연합군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히, 히든 퀘스트?”
“분석관님 예상이 맞았어요! 역시, 내분이잖아요!”
“마녀라니, 쌤통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쌤통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딱히.
프레이자가 마녀로 몰려서 기쁘진 않았다.
왜, 인과관계는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겠냐?
‘날 적대한 건 성녀가 아니라 여신이니까.’
프레이자는 그저 계시를 따랐을 뿐.
‘그게 진짜 프레이자의 뜻이었을까.’
퀘스트 메시지에도 명시되어 있잖냐.
성녀도, 마녀도, 무엇도 아니라면 프레이자는 무엇이냐고.
나의 말에 화답하듯 그랑펠의 입방정이 내뱉는다.
“성녀와 마녀로 구분을 짓다니, 어리석군.”
……그래, 내가 왜 그 소리를 안 꺼내나 했다.
“중요한 것은 긍지의 유무이거늘.”
어쨌든, 목적은 정해졌다.
나는 쏟아지는 뮤온의 병력.
그리고 언제 뒤통수 쳐올지 모르는 가이버의 교단에 맞서서 프레이자의 화형을 저지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신과 대화할 수 있는 프레이자를 통해서 물어봐야겠지.
‘대체 만신전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이야.’
그래, 무슨 일이 생겼길래.
[전설, ‘여신조차 모독하는 존재’가 만신전에 울려 퍼집니다.]보기만 해도 낯뜨거운 전설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 필요한 건 속도였다.
“진격하라!”
전장에 일렁이는 광기.
저 광적인 믿음을 고려하면.
프레이자의 골든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한시라도 빠르게 마녀를 태우고.’
여신의 목소리를 돌려받으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니.
내게 힘 조절을 기대하지는 말도록.
.
여신교단 성기사단 단장.
탈림 에베르.
그가 성서의 구절을 읊조린다.
“그 어떤 적 앞에서도 뮤온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결과적으로 뮤온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으니.
딱.
모든 건.
이호열.
그가 손가락 하나를 튕기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신께선 성서조차 뛰어넘으셨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