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53
◈ 553화. 약속이다
귀철.
내 검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보통 무기가 아니지. 어쨌거나 태생이 차가운 광물이라서 그런가. 하이엘이나 디엔드와는 다르게 꽤나 냉철한 면이 있었거든.
그런 귀철의 바람은?
검로(劍路)의 끝.
즉, 검의 끝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귀철이 섬기는 주인은 나, 이호열이 아니라 재능이 출중한 그랑펠 님이었다. 그랑펠, 너는 모를 수도 있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차이가 느껴졌다니까?
‘그렇다고 서운할 건 없지만.’
남에게 주제 파악하라고 떠드는 거 이상으로.
주제 파악이 특기인 나, 이호열이니까.
나는 귀철의 차별대우에도 상처 따윈 받지 않았다.
뭣보다 내가 손해였거든.
‘티격태격해서 좋을 게 뭐 있냐?’
점멸하는 귀철 관련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
보자, 귀철이 없었다면 고생 좀 했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놈의 작명 센스만 아니면 참 좋은데.’
이매진 브레이커니, 섀도우 슬레이어니.
성유물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는 와중에도 누구를 보고 배웠는지 떠오르는 이름들은 한숨이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귀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군.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낙담하기는커녕 성유물과 자신의 몸, 검신(劍身)을 맞대고 겨룰 생각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서 넌 이번에 또 어떤 이름을 지을 거냐, 그랑펠?
내가 미리 각오하기 위해 물었던 그때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랑펠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귀철이 드디어 적절한 형태를 찾았나 생각했는데…….
아니, 무언가 평소와는 달랐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귀철……?’
귀철의 음성이 멎었으니까.
그 상황을 설명하듯.
눈앞이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육망성 브로치가 빛을 발한다.]그렇다.
지금 귀철의 형태는 귀철, 스스로 판단하여 변화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 이호열의 의도도 아니다. 귀철은 오직 그랑펠의 의도로 [육망성 브로치]의 능력을 흡수한 형태로 변화한 것이었다.
정답이라는 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검.
‘맹약의 검이라고……?’
그 뒤로 이어지는 이름이 귀철답지 않게 지나치게 담백했다.
등급도 마찬가지.
귀철의 등급은 [전설]로.
여태껏 변화했던 형태도 전부 [전설] 등급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신화] 등급이었다.
또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사용하면 안 된다.’
육망성 브로치.
이 아이템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아이템이다.
지금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아이템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랑펠이 움직였다.
따지고 보면 여태껏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 입방정도, 멋대로 향하는 발길도, 언제나 꼿꼿함을 잃지 않는 자세도 전부 네 고집대로 해왔었으니까.
근데 말이야.
내가 거기에 휘둘렸던 건.
내게도 그런 생각이 티끌만큼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그랑펠.’
하지만 그랑펠을 7할 정도 이해하며.
그랑펠의 인격이 더욱 진해진 덕분일까.
나의 만류에도 그랑펠은 멈추지 않았다.
다그닥.
거대한 검의 형상.
쇄도하는 가이버를 향해서.
귀철도 뭣도 아닌 마검을 들고서는 나아갔다.
스윽.
그러고는 가볍게 휘둘렀다.
신화와 신화가 맞부딪히는 순간.
찰나지만, 의식이 아득해진다.
[두 신화가 격돌합니다.] [의식, ‘혼돈의 소용돌이’에 진입합니다.] [의식의 영향으로 시공간이 단절됩니다.]메시지를 보고 상황을 추측해 본다.
‘……시공간의 단절.’
의식 밖의 공간에서는 나와 가이버의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없다는 건가. 상황을 파악하던 도중이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으아아아아……!!”
가이버의 목소리였다.
*
단절된 시공간.
전쟁의 신.
그의 영향력이 옅어진 덕분이었다.
비로소 시야가 온전히 돌아온다.
“으, 으아아아…….”
광기에 뒤덮여 있던 기억도 함께 되돌아온다.
내가,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피투성이가 됐지만,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하, 하메드으으으……!!”
내 손으로 하메드를 죽였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는데.
그 명분이 이단 심판이라니.
그걸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다니.
혐오스럽다.
“웩, 우웨엑.”
목구멍에서 헛구역질이 솟구쳤다.
가이버가 몸을 웅크린 순간이었다.
귓가에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이호열이다.
내게 이호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덜덜덜.
광기가 잊게 했던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손발이 저절로 떨리고.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머릿속이 다시금 하얗게 질린다.
‘나는, 나는 저런 이호열에게.’
돌격했던 건가?
혼자라면 놀라지 않았다.
하메드를 내 손으로 죽인 순간부터.
나는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놈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자신이 보헤미안 길드원 전원을.
죽음으로 몰아갈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난 슬퍼할 자격도 없다.’
가이버는 이를 악물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진 않겠어, 하메드.’
이호열.
그에 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왔던 이호열이었다.
그런 이호열이라면…….
내가 용서를 구한다면 또 한 번 자비를 베풀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더는 살아있을 의미가 없어.’
나는 이대로 죽겠다.
가이버가 지그시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메시지가 점멸했다.
……잠깐.
●모든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고 갈 재앙.
한없이 깊은 어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를 처단하라. (진행 중)
이호열이 아니라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분명, 이호열의 구두 소리였거늘.
또각.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강렬하게 빛을 발하는 시스템 메시지에 적힌 이름.
그건 여전히 이호열이 아니었다.
가이버는 추측했다.
‘아이디와 본명이 다른 건가.’
예를 들면 [금빛 섬광]처럼.
그런 플레이어들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랭커라 부를 수 있는 네임드 플레이어 중.
그런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명성은 곧 현실의 명성과 같았으니까. 익명성을 위해 부귀영화를 포기할 이들은 많지 않았단 의미.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우디라고?’
클라우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분명 아르카나인들이 그 이름에 벌벌 떨었던 기억이…….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
플레이어는 그만한 명성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으니까.
과거, AAU도 발표하지 않았던가?
-현재 등장하는 콘텐츠는 이미 엔드 콘텐츠 그 이상.
대격변과 균열 탓.
플레이어들의 성장이 몇 배는 빨라졌다.
더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이버, 본인부터가 랭커였기에.
-“지나치게 솔직한데, AAU?”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이호열과 그랑펠이 서로 다른 인물인가?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가 어째서.
“모든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고 갈 재앙…….”
또각.
더는 자비로울 수 없는 행보를 보여온 이호열을 그렇게 평가했는지를. 그렇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이기에 꿰뚫어본 것이었다.
‘위험한 건 이호열이 아니었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였다.
……꿀꺽.
가이버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유물 : 천검(天劍) 엑스칼리버] [등급 : 신화] [제한 : ???] [효과 : 적과 아군의 모든 무구를 지배한다.] [설명 : 만신전의 보고에 보관되어오던 성유물이다.]드디어 검의 가치가 눈에 들어온다.
등급이 무려 [신화]급이라니.
나 같은 플레이어가 습득할 수 있는 아이템이 맞는 건가?
‘아니, 그럴 순 없다.’
그야말로 종결급 무기였다.
이런 무기를 손에 넣을 자격을 갖췄다고 하기에.
자신은 한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한 가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인가.’
저 그랑펠이라는 인물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처치해야 할 정도로?’
가이버는 찰나의 순간, 고뇌에 빠졌다.
흔쾌히 죽겠다고 생각한 건.
이호열의 손에 의해서였다.
이호열, 그 사내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라는.
그 이름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츠릉.
가이버는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이호열.”
눈앞의 사내,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너는…….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이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젠장.’
나는 무슨 대답을 바라고 이런 질문을 던진 거지?
이호열이라면 과오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대답을 기대해서?
가이버는 스스로 자책했다.
아니,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한들.
‘내게 자비를 베풀 순 없을 거다.’
지금의 질문으로는 저 사내가 이호열인지.
그랑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가이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말이 헛나왔다. 내가 하려던 말은…….”
다시금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렇다.”
“……뭐?”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그대에겐 속죄할 기회가 남아 있다.”
“……!!!”
텅.
그 순간, 가이버는 자신의 손에서 신화급 아이템이자 성유물 엑스칼리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 힘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미안하다, 하메드.’
널 생각한다면 나 같은 건 조금의 위안도, 이해도 받아선 안 되는 놈인데. 이 순간, 가이버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벅찬 감정을 억누르고 입술을 뗀다.
“이호열……?!”
푹.
그때였다.
가이버의 심장을 꿰뚫린 건.
가이버의 고개가 천천히 가슴팍을 향한다.
“……하.”
같은 광경이었다.
“하메드…….”
내가 뒤에서 너를 찔렀을 때랑 똑같아.
천검, 엑스칼리버가 스스로 날아들어 가이버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었다. 털썩. 가이버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넌.”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인가.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점멸하는 메시지가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서서히 눈이 감겨온다.
아직 이호열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거늘.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다.
그리고 이대로 눈을 감아선 안 된다.
‘나는 몰라도.’
보헤미안, 녀석들은 내게 휘둘린 것뿐이니까.
부디 그들이 처분을 면할 수 있게.
스스로 모든 걸 책임져야만 했다.
가이버가 남은 힘을 쥐어짠 순간이었다.
다시금 눈앞이 점멸했다.
여전한 클래스 퀘스트 메시지였다.
●모든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고 갈 재앙.
한없이 깊은 어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를 처단하라. (진행 중)
마치 방향을 알리는 별자리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기사여, 속아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빠득.
그러나 가이버는 이를 악물었다.
“……이호열.”
그러고는 이름을 불렀다.
“듣고 있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염치없지만, 부디 보헤미안을 부탁한다…….”
그건 그 이상 자비로울 수 없는 대답이었다.
“물론.”
그 이상 자비로울 수 없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호열.
아니, 그랑펠은.
가이버가 묻지 않은 질문에도 대답했으니까.
설령.
“그들의 안위를 내가 약속하마.”
이미 숨을 거둔 그에겐 들리지 않았을지라도.
“모든 세계가 멸망으로 향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