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ce Is Everything To You RAW novel - Chapter (142)
대가는 너희의 모든 것 142화(142/302)
쓸모가 다한 물건
쨍그랑.
부서진 도자기 찻잔의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노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은 너무 앙상해 반지가 저절로 빠질 것처럼 불안하게 보였다.
주인이 잔을 떨어뜨렸으니 당장 와서 다친 데는 없는지 묻고 치워야 할 하녀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녀가 일을 게을리하는 성격이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마다 저 노인, 티피언 후작이 기겁하며 물리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학습했을 뿐이었다.
하녀뿐이 아니었다. 메인들란트의 괴물들에게 감금당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뒤 후작은 주위에 아무도 두지 않았다. 음식조차 남의 손이 몰래 닿았을 법한 것은 피했다.
껍질이 있는 상태의 과일, 눈앞에서 바로 길은 물, 살아 있던 것을 눈앞에서 구워 잘라 준 돼지고기. 그렇게 단순한 것만 먹으면서도 그는 매번 자기 음식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리 만사에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니 가뜩이나 겨울 동안 메인들란트에서 야위었던 몸이 계속 약해졌다.
이전이라면 그를 안쓰럽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땅의 오랜 지배자였고 그의 신임을 받아 요직에 오른 자가 많았다. 그의 덕을 본 가신들의 입장에서는 티피언 후작이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인은 다름 아닌 후작 본인에게 있었다. 항상 의심에 빠진 듯한 그는 이전에 신뢰하던 자들을 걸핏하면 쫓아내고 처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배신하리라 확신하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관찰은 실로 옳았다.
“안쓰럽게도. 당신은 당신이 믿던 모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힘써도 얻지 못하고, 울어도 위로받지 못할 겁니다.”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후작의 머릿속에는 그 말이 계속 떠올라 메아리쳤다. 마치 매일 해가 뜨는 것처럼 틀림없이, 자고 일어나면 네리스 트뤼드의 자색 눈이 떠올랐고 밤에 잠들 때는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머릿속에서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후작은 미쳐갔다.
똑똑. 누군가 후작이 있던 방의 문을 두드렸다. 후작은 질겁했다. 그는 자기 테이블 위에 항상 올려두는 단검을 쥐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누구냐?”
“접니다, 아버님.”
소후작, 티피언 공의 목소리였다. 후작은 이를 드러냈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문이 열렸다.
티피언 공은 바닥에 떨어진 찻잔 조각을 보고 하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치워라. 어쩌자고 이리 게으름을 부리느냐? 죽고 싶은 게냐?”
“가까이 오지 마!”
하녀가 얼른 움직이려 한 것과 동시에 후작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티피언 공은 차분하게 설명하려 했다.
“아버님, 찻잔을 치우지 않으면 아버님이 다치십니다. 요즘은 사제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는데 혹 큰일이 나면 어쩝니까?”
“네, 네가 큰일이 나길 워, 원하는 거겠지.”
순식간에 극도로 흥분한 후작이 말을 더듬으며 비웃었다. 티피언 공은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버님. 저는 아버님이 그리 수모를 당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공식적으로 아버님을 돌려달라 하면 조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물밑으로는 아버님을 모셔올 준비를 다 하고 있었습니다.”
“거, 거, 거짓말 마! 불효막심한 노, 놈! 내내내, 내가 네놈을 그, 그리 키웠어?!”
티피언 공은 실망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 없다는 메인들란트 대공이라면 저를 거슬리게 한 후작을 잡아둘 줄 알았다. 대귀족끼리 고작 배우 하나의 출신을 속였다고 사형은 못 시킬 테지만, 어차피 저 노구에 추운 북부 생활을 몇 년이나 버티겠는가?
바로 그런 계산으로 그는 지난 겨우내 부친이 자꾸 보내오는 편지를 모른 척했다. 개중 나름대로 쓸모 있는 정보는 취했지만. 아일로라에 대공의 비밀 통로가 있다니 그곳을 감시하다 보면 그놈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고…….
어차피 그는 부친이 싫다고 해서 그를 직접 죽일 만큼 비정한 사람은 못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죽기를 은근히 기다릴 정도로 매몰찬 사람은 되었다.
그런데 독한 노인네가 저 꼬챙이처럼 마른 몸으로 기어이 탈출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구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도 물론 거짓이었다. 그는 무척 귀찮았다.
‘이런 노인네들이 특히 오래 살던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티피언 공은 겉으로는 유순하게 말했다.
“아버님은 물론 저를 불효하게 키우지 않으셨지요. 제가 얼마나 아버님께 충성스러운지 다 아시면서 왜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자, 이번에도 아버님이 저에게 지시하신 일을 마치고 보고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후작은 단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약간 풀었다.
티피언 공은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면서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부친의 테이블 앞으로 가서 보고했다.
“먼저, 말씀하신 배우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그 배우에게 남편을 빼앗겨 친정에 가 있던 여자의 손에 들어갔더군요. 성격이 대단한 사람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화풀이를 한답니다. 계속 자기 눈 닿는 데 두고 노예처럼 혹사한다니 빼 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그러냐?”
후작은 그 소식에 모처럼 기분 좋게 키들거렸다. 그는 자신이 이런 꼴이 된 원인은 가짜 캐서린, 그러니까 로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클레드윈 앞에서 헛소리로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그가 왜 지난 두 계절을 추운 골방에서 보냈겠는가?
혹 도망쳐 잘살고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리되었다니 속이 시원했다.
“빼 올 필요는 어, 없다. 에, 엘렌이 손을 썼나 보, 보군. 아마 평생 벗어나기는 어려울 거야.”
“예, 아버님. 그리고 말씀하신 여행 채비도 완료되었습니다.”
“그, 그, 그래?”
점점 침착해졌던 목소리가 격한 흥분 때문에 도로 떨렸다. 티피언 공은 무척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겨우 탈출하셨는데, 다시 그 참람한 놈의 땅에…….”
“가, 가가가, 가야지. 가야, 가야지. 꼭……!”
“아드님을 꾸짖으시고 대공에게 복수하셔야지요, 그래야 살지요. 안 그렇습니까?”
네리스 트뤼드의 말은 옳았다. 그래…… 클레드윈 그놈에게 복수해야 했다. 이 할애비를 더러운 방에 가둬 둔 죄, 사생아의 더러운 아들놈 주제에 감히 살아남은 죄……. 죽여야 했다. 아예 후환을 없애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놈은 이쪽에 칼을 들이댈 테니까.’
눈을 희번덕거리는 후작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해 눈 밑이 푹 꺼지고 안색이 거무죽죽해 더 그랬다.
‘메인들란트에 다시 갈 것이니 여행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티피언 공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친이 정신 나간 행동을 할수록 본인에게 좋다고 생각했으므로 불만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귀찮은 놈까지 함께 데려가 준다면 더 좋고.’
바로 오늘 아침, 티피언 후작령에는 황실에서 보낸 급보가 도달했다. 후작령에서 탈세를 하는 것이 분명하니 황족인 아드리안 공이 직접 와 감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웃기는 소리지. 그 작자가 감사는 무슨. 뇌물이나 요구할 텐데.’
현 황제의 오촌 조카인 아드리안은 대단한 망나니로 황실의 골칫거리였다.
황궁에서 취해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도박으로 황실 하사품을 날려 먹는 취미까지 있었다. 자연히 백성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알 만한 대귀족 사이에서 아드리안을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이 날뛰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실은 저 무서운 케이밀 황녀의 수족이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황실은 뭐가 불만인 거야?’
가당찮은 탈세 누명뿐이 아니었다. 이번 봄부터 티피언 후작령은 별안간 황실의 제재를 받기 시작했다.
후작령 출신의 상단들은 황도 펠레나를 포함한 모든 황실 직할령에서 갑자기 오른 관세를 감당해야 했다. 후작가의 방계들은 황실과 관련된 일을 할 경우 사소한 트집을 잡혀 근신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가문 자체가 황실의 미움을 산 것이 분명한 상황.
후작령이 지금까지 그 지위를 유지한 것은 대공령과 나머지 제국의 사이를 잇는 교두보로서의 중요성, 대공령을 타국으로 치자면 변경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일로라를 감시한 지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대공의 비밀 통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황실이 이렇게 갑자기 화를 내니 티피언 공으로서는 초조했다.
더구나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하면 주위를 초토화시키는 아드리안이 파견되어 온다니.
일단 오면 아드리안은 어떤 명목으로든 엄청난 뇌물을 요구할 터였다. 후작령이 그 충심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남은 돈으로는 반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돈을 내야 할 테니까.
티피언 공은 황실에 밉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뇌물을 벌써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후작성 안에서 만인을 의심하느라 바쁜 후작은 몰랐지만, 이미 후작령의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애초부터 그리 관대하지 않았던 원래 관리들이 갑자기 사형당해 사라지면서 행정 공백이 생겼고 새로 온 관리들도 이전에 있던 자들보다 낫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후작령 내 모든 재물을 무자비하게 거두고 있었으니까.
‘이번만 좀 참으면 될 것인데 시끄럽기는. 어리석은 무지렁이들.’
티피언 공은 부친보다 무능하고 소심했지만 스스로 신중하다 믿었다. 그래서, 만약 그보다 똑똑한 영주였다면 더 빠르게 대처했을 백성들의 불만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귀찮은 아드리안을 눈앞에서 치울 핑계가 있다면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잡아 볼 셈이었다.
아들의 무정한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후작은 히죽 웃었다. 그의 손이 에메랄드 반지를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아, 아주 큰 행렬을 준비했지? 보는 눈이 어, 없다고 또다시 그놈이 나를 핍박하지 아, 않도록!”
제 어미와 똑같이 갑자기 쓰러져 죽고, 부검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젊고 불쌍한 대공의 이야기를 모두가 떠들 수 있도록.
도망쳐 나온 참이니 메인들란트를 다시 찾는 구실이 필요했다. 그리고 불안으로 엉망이 된 후작의 머리는 그 자신 외에는 누구도 납득하지 않을 핑계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사과를, 사과를 받아낼 거야! 그래! 그놈이 죄 없는 날 가, 감금했으니까!”
후작이 군대를 끌고 가더라도 클레드윈 메인들란트에게 사과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티피언 공은 조카에 대해 자신이 들은 소문만으로도 그 사실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순하게 웃었다. 그가 알 바는 아니었으므로.
“……예, 아버님. 말씀하신 대로 전부 처리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렸다 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설마 그놈이 중재하러 온 황족 앞에서도 그리 건방지게 굴겠습니까?”
마침 좋은 타이밍에 귀찮은 짐까지 데리고 사라져 준다면야.
“화, 황족?”
후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네리스는 티피언 후작령에서 보내온 항의 서한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지난 감금에 대한 정식 이의 제기였다.
“좋은 소식입니까, 아가씨?”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 집무실 책상에 찻잔을 내려놓던 도라가 물었다. 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티피언 후작이 다시 온다는구나.”
“그 작자가요? 뻔뻔한 자로군요. 다시 우리 전하와 아가씨를 괴롭히러 온답니까?”
도라는 이번 일에 관련된 사정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더 발끈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작자가, 살려서 보내 줬으면 감사한 줄 알 것이지 또 뭘 하러 온다는 말인가? 누가 반긴다고?
후작을 드레이쿰까지 끌고 가 놓아줄 때 함께했으므로 도라도 알았다. 네리스가 후작을 풀어줌으로써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후작의 뻔뻔한 태도는 경멸스러웠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시녀와 대조적으로 네리스는 후후 웃었다.
“아니다, 아주 딱 좋아.”
티피언 후작령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정보는 이미 야연 측에서 수집해 온 바가 있었다. 네리스는 케이밀의 방식을 아는 만큼, 티피언 공이 황실의 제재 이후 무리한 세금을 걷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추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그녀가 의도한 대로였다. 시기상 이즈음이면 아드리안이 후작령에 도착했을 터.
창밖 하늘이 맑았다. 네리스는 그것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쓸모가 다한 물건은 제때 거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