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ce Is Everything To You RAW novel - Chapter (279)
대가는 너희의 모든 것 279화(279/302)
시체도 쓸모가 있다나
다시 몇 년이 흘렀다.
엘란드리아 가문은 네리스의 도움으로 세력을 무시무시하게 확장했다. 이 시간선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던 웰스 가문은 제국의 3대 상단 중 가장 앞서 나갔고 그만큼의 영향력과 돈을 엘란드리아 공작가에 지원해 주었다.
황실도 상당한 내실을 얻었다. 궁정에서는 정부에게 모조리 빛을 빼앗겨 비웃음의 대상이던 태자비가 외교 방면에서는 그 유능함으로 화제를 모았다. 꼬장꼬장한 머라이어 대부인은 조카며느리를 위해 어마어마한 재산을 황실에 넘겼고 케이밀 황녀는 승냥이처럼 주위를 먹어 치웠다.
네리스의 동급생들은 죽었다고 알려진 다이앤 맥키넌을 제외하고 모두 성공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해 자기 나름의 자리를 잡았다. 모두 메가라 리케안드로스, 태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자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학창 시절에 메가라의 비위를 잘 맞췄던 안가라드 나인과 리아논 베르타, 알렉토 이슬라니, 그리고 아이달리아 켄달은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 만한 삶을 살았다.
그동안 클레드윈은 메인들란트에서 힘을 더 길렀다. 마치 미래를 알기라도 하듯 모든 일에 능숙히 대처하는 주인에게 대공령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고개 숙였다.
밖에서는 페잘초 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렌 페이엘이 대공령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밖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맥키넌 가의 천재 상인들도 한껏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엘란드리아 가문은 독립을 선언했다.
명분은 세 용사였다. 똑같은 용사의 후손인데 비스토의 후손은 황제이고 엘란드리아의 후손은 일개 귀족이라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진실을 아는 이에게는 우스운 말장난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불평을 생각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엘란드리아 가문에는 실질적인 힘이 있기도 했다. 어지간한 독립 왕국보다 이미 강성해진 세력이.
아마 황실은 현재의 엘란드리아 가문이 진짜 용사의 후손이 아닌 자신들이 끌어올린 사기꾼의 자손임을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넬뤼시온이 교황의 딸 브리지드와 결혼했고 수많은 타국의 지지를 이미 받고 있는 이상, 자칫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먼 옛날의 진실은 꺼내지 않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좋았다.
지루하고 막연한, 그러나 서로를 향한 적의만은 진짜인 공방이 물밑에서 순식간에 오갔다. 이제 와서 엘란드리아 공작가를 도로 흡수하기도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황실은 새로운 왕국의 탄생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어려운 감정은 버리겠다며 새로운 혼맹을 발표했다.
제국 비스타의 태자 아벨루스와 왕국 엘란드리아의 공주 발렌틴의 결혼.
이 역시 우스운 소리였다. 아벨루스에게는 이미 태자비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엘란드리아 왕국의 독립 선언과 동시에 첩자로 몰려 투옥된 진짜 태자비의 존재를 모두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개자식들 아니야?”
흰 백조 성에 자리를 잡은 렌이 신랄하게 평가했다. 출정 준비를 하던 클레드윈이 대꾸했다.
“개에게 미안한 표현이지.”
“그래! 천하에 고결하고 위대한 척하더니, 여자애 하나 희생양으로 삼아서 뭣들 하는 짓이야?”
흰 백조 성 사람들은 네리스의 사정을 대강 알았고 클레드윈의 측근 취급인 렌은 더 잘 알았다. 클레드윈이 하도 네리스를 보러 자주 내려가고, 피치 못하게 떨어져 있을 때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기 때문이었다. 렌은 클레드윈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구하러 갈 거지?”
“구하고 싶어.”
“너답지 않게 웬 약한 표현을 써? 너 다른 일에는 확신이 넘치잖아.”
“이번에도 확신은 있어.”
다만 그녀의 죽음을 보아야 하리라는 확신일 뿐. 렌은 클레드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뭐 확신이 있으면 됐고. 아무튼 이번엔 그 애 잡아. 너 학창시절부터 걔 좋아했잖아.”
렌에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클레드윈은 사납게 웃었다.
“잡아야지. ……자, 가지.”
메인들란트에는 지금 인재가 많았다. 원래의 시간선에서는 죽었어야 하는 이들이, 네리스의 기억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아 이곳에 모였다. 또는 네리스의 기억 속에서 죽은 자들도 이름을 바꾸거나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남기고 이곳으로 왔다.
남은 것은 한창 즐거울 결혼식 잔치를 습격하는 것뿐이었다.
클레드윈의 검은 망토가 바람을 받아 가볍게 휘날렸다.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는 듯 훌쩍 걸어가 버리는 그의 뒤로 비장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따랐다.
❖ ❖ ❖
죄수의 탑에 갇힌 전 태자비에게는 짙게 깔린 전운이 전달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티피언 후작령을 점령해 후작의 목을 베고 남부로 진격하며 클레드윈은 그렇게 확신했다. 네리스가 감금되기 전까지는 군사를 일으키기 어려운 상황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계속 이어지더니, 지금은 메인들란트군이 어떻게 날뛰어도 아무도 막지 못했으니까.
한 번 와 본 길이니 더 쉬웠다. 클레드윈은 어린애 팔 비틀듯 제국군을 압도하고 번개처럼 남하를 이어갔다. 그리고 황도 펠레나 앞에서 엘란드리아 왕국군과 비스타 제국군의 연합까지 물리쳤다.
축제 분위기였던 황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학살을 두려워한 피란민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졌지만 클레드윈은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황궁에만 관심이 있었다.
“클레드윈 메인들란트!”
황궁의 문을 잠그고 나름대로 농성을 시작한 아벨루스는 궁벽 위에서 소리쳤다.
“이 반역자 자식!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네가 인류의 구원자의 핏줄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 대륙이 다 비스토 가문의 편이야!”
클레드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석궁을 쏘았다. 자기 머리 위를 볼트가 스치고 지나가자 아벨루스는 얼굴이 하얘져 벽 안쪽으로 사라졌다.
저항은 길지 않았다. 에이단과 힐브린, 그리고 클레드윈이 각자 이끄는 부대에게 포위당한 황궁은 문이 하나씩 뚫리자 어이없이 무너졌다. 클레드윈은 자기 부하 랄프에게 배신당해 질질 끌려온 아벨루스를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있나?”
“뭐가 말이냐?”
군청색 보석안의 소유자인 아벨루스는 보통 밧줄로 제압할 수 없어 마법 도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얼굴로 묻는 아벨루스에게 클레드윈은 친절하게 부연해 주었다.
“내 아내 말이야.”
“네놈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번 시간선에선 운이 좋지 않아 너 같은 놈에게도 남편이 될 기회를 주었지만 네가 걷어차 버린,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내 아내 말이다. 네리스 트뤼드, 엘란드리아 고네스트뤼드의 후계자.”
아벨루스는 클레드윈의 말을 반쯤만 알아들었지만 이미 전부 이해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악에 받친 눈으로 클레드윈을 노려보았다.
“미친놈, 그런 거였나? 아카데미 시절 그 여자를 따라다닌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믿지 않았지. 혼자 잘난 네놈이 그깟 멍청하고 교활한 여자에게 털끝만치라도 관심이 있을 리 없다고 봤으니까. 그런데 사실이었나? 그 여자가, 자기 친정뿐 아니라 네놈하고도 내통한 거…… 컥!”
클레드윈은 말에서 내려 친히 아벨루스의 얼굴을 걷어찼다. 강건한 황족의 몸이어도 그 정도로 끔찍한 파괴력이 담긴 일격에는 별수 없었다. 피를 흘리는 아벨루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클레드윈은 차갑게 말했다.
“좋은 여자를 못 알아보고 멍청하게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닌 네놈과 내 아내는 질적으로 달라. 네놈의 아내인 동안에는 널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었지. 개만도 못한 새끼라서 아무 때나 짖는 건 알겠는데 시끄럽군. 다시 한번 묻는데, 내 아내는 어디 있나?”
아벨루스는 고집을 부리려 했지만 클레드윈이 검에 손을 대자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누님! 누님이 가져가셨어! 시체도 쓸모가 있다나 뭐라나 하시면서!”
“알았다. 말해 준 공으로 한 대는 덜 때리지.”
한 대는 ‘덜’ 때린다고? 원래는 몇 대를 때릴 셈이었는데? 아벨루스가 멍해진 사이 클레드윈은 황궁으로 들어갔다.
값비싼 물건을 훔쳐 달아난 자들의 흔적과 싸움의 여파로 황궁 복도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클레드윈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시체.’
이 시간선의 네리스는 죽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대로 그 역시 말라서 죽고만 싶었다. 그녀에게 손톱만 한 상처 하나도 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다치고 아프고 앓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시체를 마주하게 생겼다.
<아빠, 엄마 죽었어?>
빛 덩어리가 훌쩍이며 물었다. 클레드윈은 이를 갈며 말했다.
“깨어날 거야.”
<그치? 진짜지?>
“반드시.”
그것은 빛 덩어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려 황실 조사대가 쓰는 건물 쪽으로 갔다.
케이밀이 쓸모를 운운하며 데려갔다면, 네리스의 시신이 지금 어디 있을지 알 만했으니까.
❖ ❖ ❖
비밀 통로를 열자마자 클레드윈은 자신이 제대로 짚었음을 알았다.
팔로스의 눈이 봉인된 방에서 폭발할 듯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와 위압감이 온 통로를 지배했다.
한 발자국을 떼는 것도 어려운 마력풍이 휘몰아쳤다. 클레드윈은 눈부신 빛을 손으로 가리기 앞서 자기 가슴에 달라붙은 빛 덩어리부터 살폈다.
“괜찮아?”
빛 덩어리는 큰 바람을 맞은 촛불처럼 화르륵 타올랐다가 갑자기 확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클레드윈은 그것이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일어나는 마력의 파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아, 나는 괜찮아, 아빠. 엄마 어떡하지……?>
이 시간선의 네리스가 죽은 것만큼이나 그들의 시간선의 네리스는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러나 클레드윈은 빛 덩어리의 떨리는 목소리를, 그 막막하고 슬픈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 모두 같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과거에 다쳤던 기억마저 가슴 아파 견디기 어려울 만큼.
“너는 밖에서 기다려. 내가 들어가서 보고 올 테니까.”
<무서운데…….>
“저기 빛 나오는 문 보이지? 저기만 들어갔다 나오는 거야. 별일 없을 테니까 여기 있어. 다른 데 가지 말고. 알았지?”
<으응…….>
빛 덩어리는 착실하게 클레드윈의 품에서 떨어져 비밀 통로 입구에 머물렀다. 클레드윈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날뛰는 마력이 칼날처럼 그의 얼굴을 베고 손목을 벴다. 발이 누군가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클레드윈은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씩 착실히 나아갔다. 작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팔로스의 눈이 봉인된 방 안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끔찍한 제의의 현장이었다.
방의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까지 복잡한 마법진이 빽빽이 새겨져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마력을 뿜었다. 원래 걸려 있던 장식들은 마력풍에 나부끼며 바닥을 뒹굴었고 두 개의 제단은 모두 차 있었다.
양쪽 제단 사이에 케이밀이 피 묻은 단검을 쥐고 쓰러져 있었다. 코와 입에서 선혈이 흐르는 그녀를 클레드윈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간대에서는 비어 있던 제단 옆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네리스의 몸에 달려들었다.
“네리스.”
그녀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차갑고 뻣뻣했다. 클레드윈은 고통에 차고 망가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숨을 쉬지 못해 꺽꺽거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바닥에 무너지며 무릎이 세게 부딪쳤다.
살아날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도 죽을 것만 같았다. 죽고만 싶었다.
이게 끝이 아니야.
이런 세상에 의미가 있는지? 전부 죽이는 것도 좋지 않을지?
이제야말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러면 이곳의 그녀는? 네리스가 죽고도 이 시간선의 남은 인간들은 살아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전 삶의 그녀는 바로 이렇게 죽었던 거야.
그는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가슴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검을 꽂아 심장을 생으로 파낸다 해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으리라.
아이야…… 내 아이…….
팔로스의 눈이 말을 걸어왔다. 클레드윈은 악에 받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그녀가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