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1)
11 화 의뢰.
의뢰.
“이 근처입니다.”
레인저의 손짓에 성화교(聖火敎)의 청염(靑炎)의 사제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예.”
레인저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청염의 사제가 부드럽게 손짓했다. 손끝에서 일어난 푸른 불꽃이 대지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푸른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대지 위를 기어다니며 눈만을 녹여갔다. 레인저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언제 봐도 굉장한 권능입니다.”
주변의 눈을 모조리 날려버린 청염의 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른 빛이 일렁이는 동공이 새하얀 옷을 벗어 던지고 제 모습을 드러낸 겨울의 대지를 훑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지났다 보니, 몬스터나 짐승이 시체를 물어갔나 봅니다.”
“그렇습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하군요.”
청염의 사제는 묵묵히 매마른 대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주변에 있는 도시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사제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애저녁에 죽고 말았을 거예요.”
악마가 날뛰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퓌에르는 여전히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퓌에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퓌에르의 동공이 감동으로 거칠게 떨렸다. 퓌에르는 목이 멨는지, 차마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사제님···.”
“고향으로 돌아가셔서도 몸 조심히 지내시길. 기회가 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산적들에게 동료들이 모조리 죽어 나간 게, 꽤나 큰 충격이었는지 퓌에르는 용병일에 대한 마음을 접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며 어제 내게 알려왔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고향을 거치는 상단의 마차 한구석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 소같이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퓌에르가 내게 말했다.
“정말 찾아오시면 세간살이가 거덜 나는 한이 있더라도 풍성하게 대접해드릴게요!”
“이거 잊지 않고 꼭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군요.”
상단의 행렬 앞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발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슬슬 헤어질 시간입니다. 편안히 가시길.”
“사제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퓌에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힘들게 휘저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준 후, 서문을 통해 용병 길드로 향했다.
“오늘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살해!’
“그만 놀고 뭐든 좀 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아직 제 주머니에는 볼 때마다 가슴 따듯해지는 돈이 충분히 있습니다. 어머니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숨어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는 걸요.”
‘살해!’
부패의 어머니께서는 숨어지내야 하는 걸 잘 알면서 굳이 그 악마를 구해내야 했느냐고 나를 타박했다.
“하긴, 그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금화 두 닢어치 선금을 받아버린 걸 어쩌겠습니까?”
‘살해!’
나는 가슴주머니를 토닥이며 말했다.
“후, 이거 안되겠군요. 이러면 저도 또 한 번 아껴뒀던 비장의 수단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살해…?’
“아까 지나가는 길에 들었습니다만, 피부미용에 좋은 약물이 이번에 들어왔다더군요. 가는 길에 사서 정성스럽게 구석구석 발라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살해…!’
나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잔뜩 기대한 어머니의 손이 흥겹게 까딱거렸다.
두 눈을 감자 지난 사건에서 흡수한 신성이 내면에서 떠올랐다.
[신성 : 3482]악마를 구한 난,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확할 수 있는 시체들을 대부분을 수확했다. 덕분에 꽤 많은 양의 신성을 얻을 수 있었다. 대량학살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산 사람은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것.
덧붙이자면 오브스는 손가락 세 개짜리 인간이었다. 그의 뭉개진 시체를 수확하자, 무려 일천의 신성을 얻었다.
어머니의 손에 발라드릴 피부미용 약물을 사고 용병 길드에 들어서자 에린이 큰소리로 외쳤다.
“‘악마도살자’ 마르낙 사제님!”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그 별명으로 불릴 때마다 정말이지 부끄럽습니다.”
그렇다. 사건이 수습될 즈음 영주 트레돈은 대외적으로 내가 거대한 악마의 마지막 숨을 끊고 자신을 구해냈음을 공표했다. 덕분에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악마도살자’라는 거창한 별명을 얻었다.
에린은 저 ‘악마도살자’라는 별명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부를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악마도살자라고 불러대는 통에 매번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한껏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저 사제님이 바로 그 유명한 ‘악마도살자’인가?”
“듣기론 생긴 것과 달리 힘이 아주 장사라서 얼마 전에 산적 일곱을 혼자서 베어버렸다는군.”
“그 악마를 잡았는데 산적 일곱을 혼자서 못 잡을 게 뭔가. 난 아직도 그 거대한 괴물이 어디서 또 튀어나올까 두렵네.”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에린에게 물었다.
“성물의 반환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투명한 거울과 새하얀 검. 거울에 부패의 신성이 봉인되어 있던 이상, 당연히 새하얀 검은 그저 평범한 성물이었을 뿐이었기에 어떠한 신성도 얻지 못했다.
에린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하얀 치아가 장난기 많은 웃음의 매력을 더했다.
“지나가는 상단에 맡겼어요. 그런데 정말 이름을 안 밝혀도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교화교의 그 광신도들이랑 굳이 더 얽힐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는 거울과 악마를 죽이는 검은 내게 별다른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도 했고, 괜히 가지고 있다간 성물을 회수하려고 찾아온 교화교 사제들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아, 맞다.”
짝하고 소리 나게 손뼉을 마주친 에린이 부드럽게 귀를 울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꺼냈다.
“마르낙 사제님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영주님의 병사들이 와서 마르낙 사제님을 찾았어요. 영주의 저택으로 시간이 나시는 대로 찾아오시라고 하던데요?”
“알겠습니다.”
슬쩍 다가온 에린이 주변을 힐끔힐끔 살피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마 영주님이 마르낙 사제님한테 일거리를 하나 맡기시려는 듯해요. 이런 비밀스러운 일은 보수가 후하지만, 무척 위험하기도 하니 신중하게 고려해보고 결정하세요.”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십니까?”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럼 얼른 가보세요. 영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니까요.”
부드럽게 내 등을 밀어내는 에린의 손에 밀려 나는 용병 길드의 밖으로 나왔다.
‘살해! 살해!’
피부미용 약물을 바르는 걸 잔뜩 기대했던 어머니가 불퉁스럽게 투덜대셨다. 나는 가슴주머니는 토닥거리며 다시 길을 나섰다.
“어머니께서도 그토록 바라시던 일이 들어왔는데 어째서 화를 내십니까?”
‘살해?’
“어허.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떻겠냐니요. 아까랑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시지 않습니까?”
‘살(殺)!’
“괜히 무안하셔서 화내시는 거 다 압니다. 영주님한테 일이 뭔지만 듣고 잽싸게 돌아가서 구석구석 꼼꼼히 발라드릴 테니 잠시만 참아주시지요.”
‘살해!’
극적인 타협이 성립되고 나는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
“어서오십시오! 사제님! 사제님이 오시길 손 꼽아 기다렸습니다! 어째 보실 때마다 훤한 얼굴이 더욱 훤해지시는군요! 하하하!”
정교하게 깍아내린 나무 의족과 의수. 그리고 투명한 의안을 낀 악마가 날 반겼다.
“칭찬이 과하십니다.”
“우리 ‘악마도살자’ 마르낙 사제님한테 과한 칭찬이 어딨겠습니까!”
악마가 따뜻한 차를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나무로 이루어진 손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볼 때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는 차를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곤 웃었다.
“악마도살자가 잡았다고 알려진 악마는 여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악마도 살아야지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은 없지 않습니까?”
악마는 싱글벙글 웃으며 의자에 몸을 파묻고 나무로 이루어진 다리를 까딱였다.
“아무런 장치도 안 되어 있는 나무 의족과 의수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건 정말 언제봐도 신기하군요.”
“이것도 사제님 앞에서나 하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없이 쩔뚝이며 다닙니다. 게다가 저는 이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서 크나큰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무슨 대가입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악마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얼마 안 가 이 몸의 모근은 제힘을 잃고 한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게 될 겁니다. 아마 몇 달 뒤쯤에 절 만나신다면 반짝이는 민둥산이 사제님을 반기겠지요.”
참으로 끔찍한 대가였다. 역시 저런 대가를 손쉽게 감수하기에 악마인 건가.
내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악마가 슬쩍 용건을 꺼내왔다.
“사제님. 혹시 한 일주일 정도 시간이 나십니까?”
“시간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일이 없는 데다 주머니도 넉넉한 김에 자중을 핑계로 뒹굴고 있던 차였다.
“그거 정말 잘 됐군요! 마침 괜찮은 일이 하나 있는데 그쪽에서 사제님을 직접 지명해왔습니다.”
나를 지명? 내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악마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보기엔 ‘악마도살자’의 위명을 듣고 사제님이 이번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고대제국의 유적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이 주변에 고대제국의 유적이 있었습니까?”
“일단 그쪽에선 고대제국의 유적을 탐사하러 왔다고 하긴 하더군요. 일행을 이끄는 사람이 수도쪽 귀족이다 보니 영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고대제국은 굉장히 먼 옛날 비뚤어진 마법사들의 시대를 끝내고 대륙을 통일한 제국이었다. 고대제국이 이룩했던 진보된 기술들을 잃어버린 지금 시대의 지성체에게 고대제국의 유물이란 강력한 성능을 지닌 귀한 보물이라는 설정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 게임에 높은 등급 아이템들의 대부분은 고대제국의 유물이라는 수식어가 달려있었다.
고대제국의 유적이란 건, 다른 게임에서 자주 언급되는 던전과 유사한 개념이었고.
‘살해!’
어머니의 말씀처럼 나도 이 건은 일단 끼고 봐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 일,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보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락하십니까?”
“보수가 뭡니까?”
“무려 금화 다섯 닢입니다. 그것도 선금으로 전부 지급하고요. 게다가 유적 공략에 큰 공헌을 하셨을 시엔 발굴한 유물 중 하나를 건네주겠다더군요.”
나는 재빨리 답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
일행은 총 셋이었다.
두꺼운 로브를 푹 눌러쓴 마법사로 추정되는 인원 하나, 커다란 방패와 도끼로 무장한 외뿔족 남성 하나, 마지막으로 등에 활을 메고 가죽 갑옷을 걸친 남자 하나.
“그대의 삶에 흔들림 없는 행복이 유지(維持)되길. 매일의 삶을 수호하는 유지(維持)의 여신님을 모시고 있는 사제,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활을 든 잘생긴 남성이 쾌활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언뜻 보면 호리호리 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팔다리로 보건대 평소에도 꾸준히 단련했음이 틀림없었다.
“반갑습니다! 사제님. 저는 이번 일의 의뢰를 한 카르멘 발타스라고 합니다. 트레돈 영주님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현명하고 뛰어나신 분이라지요. 이렇게 인연이 닿아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어 정말이지 기쁩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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