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10)
110 화 격돌.
격돌.
“엉겨붙는 바위시여!!! 저거! 저거 좀 막아 주세요!!!”
땅을 짚으며 새된 목소리로 내지른 기도. 쟈멜의 기도에 따라 움직인 바위들이 신성을 품고 치솟아 올랐다.
– 비 켜 라 ! ! !
푸른 살덩어리 촉수들이 앞을 막아선 벽과 거칠게 충돌했다. 부서져 나가는 암석들. 그 사이로 선명한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빠르게 움직이는 황금빛 눈동자. 주변 촉수들의 위치를 파악한 다키아의 손가락 끝이 꿈틀대는 촉수들을 겨냥했다.
“터져라.”
콰아아앙!!!
그녀의 의지를 따라 모여든 마력. 그 마력이 자신을 불태워 또 한 번의 현상을 이끌어 냈다. 작렬하는 불꽃. 거대한 폭발이 눈앞의 푸른 살점 덩어리 촉수들을 날려 버렸다.
왜애애애애애앵!!!
폭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거친 시동음과 함께 한 남자가 대지 위를 질주했다.
마르낙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다키아와 쟈멜이 원거리에서 저 괴물을 요격하고 자신은 만약을 대비해 둘의 곁을 지킬까 고민도 해 봤지만, 그러기엔 저 괴물의 재생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게다가 마냥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은 저 괴물 하나만이었지만, 혼자 남았던 데르소가 다른 괴물들을 다 처리해 줄 거라 믿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었다.
흘러나오는 은은한 녹색 빛. 빛과 함께 달려 나가는 마르낙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목표는 거대한 입으로 쉼 없이 반지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푸른 살덩어리 거목.
– 반 지 ! ! ! 반 지 를 내 놔 ! ! ! 당 장 ! ! !
무엇이 그를 저렇게 내몰고 있는 것인지 마르낙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괴물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자그마한 반지 하나를 내보이며 소리쳤다.
“여기! 여기 네가 그렇게 찾던 반지가 있다!!! 어디 한번 재주껏 빼앗아 봐라!!!”
지극히도 단순한 도발이었지만, 거대한 사도에겐 엄청나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분노한 사도의 모든 주의가 마르낙을 향했다.
– 내 놔 ! ! !
쾅! 쾅! 쾅! 쾅!
바닥을 뚫고 자라난 푸른 살점 덩어리 촉수들. 촉수들은 두 번째 사도의 의지에 따라 허공을 뱀처럼 기어 마르낙을 향해 뻗어 나갔다.
왜애애애애애애앵!!!
회전하는 톱날. 곧게 그어진 도살자가 자신에게 닿은 푸른 촉수들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쏟아지는 체액. 마르낙이 도살자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푸른 촉수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베고 또 벤다.
하지만 푸른 살점 덩어리 촉수들을 베어 낼 때마다, 살점 덩어리는 마치 증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배, 세 배로 불어나 밀려왔다.
왜애애애애애앵!!!
마르낙은 기계적으로 눈앞의 촉수들을 피해 내고 베어 내며 푸른 거목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대충 어림잡아도 백 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 끊임없이 거리를 좁힌 덕에 조금만 더 다가가면 언제든지 거목에 닿을 수 있었다.
당장에라도 ‘부패의 검’을 저 거목에 박아넣는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저 괴물이 죽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도시의 여기저기서 제멋대로 자라 오르는 푸른 거목. 저 거대한 몸뚱이가 과연 진짜 괴물의 ‘본체’인 것일까.
마르낙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리베라티오에서 온 자칭 좌절(挫折)의 루디피코르와 거대한 백색 나방, 그리고 흑색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기사.
‘부패의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까지 끌어올려 봐야 70초 남짓이었다. 그 시간을 넘어 무리하게 권능을 사용하다간 이모탈리움으로 이루어진 장갑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해 버리고 말 터.
언제까지 전투가 이어질지 모르는 이상, 단순한 소모전에 ‘부패의 검’을 남용할 수 없었다.
콰앙!!!
또 한 번 치솟아 오른 푸른 살점 덩어리들. 그 살점 덩어리 위로 막대한 양의 뇌전이 작렬했다.
“그대로 계속 가세요!!! 원호해 드릴게요!!!”
마르낙은 다키아의 마법이 만들어 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바닥을 걷어찬 그의 몸은 새로운 촉수들이 미처 그 자리를 채우기 전에 공간을 통과했다.
– 당 장 내 놔 라 ! ! !
반지가 다가온다.
칼토는 자신의 촉수들이 뇌전으로 바스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킨 거나 다름없는 그에게 있어 촉수를 재생시킬 힘쯤이야 무척이나 사소한 것.
지금 그가 당면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사제의 품속에 있을 신이 깃든 반지였다.
저 반지만 있다면, 레빌라를 다시 볼 수 있다.
칼토의 머릿속에는 한 치 앞으로 다가온 가능성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만이 가득해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쾅! 쾅! 쾅! 쾅!
살점 덩어리 촉수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마르낙을 잡아 내기 위해 거대한 그물이 되었다. 그는 내달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누군가와 대화했다.
“… 그러니까 당장은 반지를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거군요. 일단은 잘 알겠습니다.”
눈앞으로 다가온 살점 덩어리 그물. 마르낙은 그 그물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일그러지는 공간. 그 공간을 찢고 나타난 거대한 손. 녹슨 갑옷으로 뒤덮인 두 손이 살점 덩어리 그물을 붙잡았다.
공간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머리. 부패의 거인이 그물을 찢어 버리며 자신이 이 땅 위에 강림했음을 알리는 포효를 내뱉었다.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 ! !
“손 좀 부탁드립니다!!!”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앗 ! ! !
마르낙이 자리를 박차고 튀어 오름과 동시에 부패의 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그의 발판이 되어 주었다. 마르낙은 마치 수면 위를 튕기는 물수제비처럼 손바닥을 박차고 푸른 거목을 향해 쇄도했다.
또 한 번 찢어지는 허공.
그 속에서 권능으로 이루어진 검 한 자루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낙은 허공에서 주저 없이 ‘부패의 검’을 잡아챘다.
그는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 때문에 부패의 검을 과도하게 아끼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판단했다. 당장 빠르게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거목의 입이 벌어지며 결의에 찬 노성을 내질렀다.
– 나 는 반 드 시 레 빌 라 를 되 살 려 낸 다 ! ! ! 반 드 시 ! ! !
두 번째 사도의 입에서 폭발적인 양의 촉수들이 쏟아져 나와 마르낙을 향해 밀려왔다. 하지만 마르낙의 대처는 방금까지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향해 덮쳐들어 오는 그저 거대한 푸른 살점 덩어리 해일을 향해 조용히 부패의 검을 내밀었다.
푹.
권능의 검은 무척이나 부드럽게 촉수의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현상과 달리 일어난 결과는 무척이나 격렬했다.
– 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 ! !
푸른 살로 이루어진 거목이 처음으로 노성이 아닌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썩어 들어간다. 부패의 신성이 투명한 물 위에 떨어뜨린 물감처럼 그의 살점을 타고 올라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고통. 이 사도의 육체를 얻고 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진정한 고통에 칼토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건, 단순한 고통과는 궤를 달리했다. 무언가. 내면의 무언가가 잘게 부서져 나가는 괴로움. 그래, 마치 영혼이 산산이 깨부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고통을 떨쳐 내기 위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쿵!!!
두 번째 사도는 제 의지로 자신의 촉수를 잘라 냈다. 더 이상 이 고통이 번져 오지 않도록. 고통이 증발했다. 역시 자신이 낸 답이 맞았음을 확인한 칼토는 빠르게 주변을 느꼈다.
격렬한 고통 속에 잠겨 있느라 잠시 사제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그는 전신에서 돋아난 소름을 억누르며 사제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목소리는 정면에서 들려왔다. 그는 부패의 검을 치켜든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이 늘어난다. 거대한 자신의 몸에 비하면 바늘만도 못한 검날이 그 얇은 폭을 유지한 채로 순식간에 제 몸을 멋대로 늘렸다.
마르낙은 길게 늘어난 부패의 검을 치켜들고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딱 한 번만 권유하겠습니다. 죽기 전에 따님께 사과하십시오.”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 ! !
거대한 거인이 몸에 매달려 왔다. 칼토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진짜 ‘죽음’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 너 는 모 른 다 ! 너 는 아 무 것 도 모 른 다 ! ! ! 너 는 ‘ 사 랑 ’ 을 모 르 기 에 그 렇 게 나 쉽 게 말 할 수 있 는 것 이 겠 지 ! ! ! 레 빌 라 는 내 전 부 였 다 ! ! ! 이 의 미 없 는 내 삶 의 ‘ 전 부 ’ 였 다 고 ! ! ! 이 거 놓 아라 ! ! ! 당 장 ! ! !
거목은 몸에 달라붙은 거인을 떨쳐 내기 위해 거칠게 버둥댔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반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대로 죽었다간, 두 번 다시 레빌라를 볼 수 없을 거란 직감이 느껴졌기에.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거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도는 눈앞의 사제를 바라보며 거칠게 포효했다.
마르낙의 옆으로 걸어온 다키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틀렸어! 당신의 방법은 완전히 틀려먹었어!!!”
– 나 는 틀 리 지 않 았 다 ! ! ! 나 는 틀 리 지 않 았 다 고 ! ! ! 레 빌 라 는 내 세 계 의 전 부 였 다 ! ! ! 그 녀 를 살 릴 수 만 있 다 면 ! ! ! 이 르 멜 의 이 름 따 위 얼 마 든 지 버 릴 수 있 다 ! ! ! 아 니 , 내 모 든 것 을 내 버 려 도 좋 다 ! ! ! 단 한 번 만 이 라 도 그 녀 를 다 시 볼 수 만 있 다 면 ! ! ! 떨 어 져 라 ! ! ! 당 장 떨 어 지 라 고 ! ! !
절규하는 두 번째 사도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불타오르는 집착이 만들어 낸 기적. 푸른 살점 덩어리 줄기들이 부패의 거인을 붙잡고 내던졌다.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 ! !
콰아아아앙!!!
거인을 내친 사도는 자신의 딸과 사제를 노려보며 노성을 내질렀다.
– 반 지 를 내 놔 ! ! ! 당 장 ! ! !
다키아는 영락해 버린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 주세요. 마르낙 사제님.”
마르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떨어졌다.
‘부패의 검’이 긴 궤적을 그리며 그대로 거목의 몸에 박혀 들었다.
붕괴한다. 권능의 날에서 피어난 붕괴가 칼토의 몸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죽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죽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삶을 구걸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도는 그저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거침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 나 는 레 빌 라 를 되 살 린 다 ! ! ! 그 어 떤 대 가 를 치 르 고 서 라 도 ! ! !
그는 자신의 붕괴를 도외시한 채 살점 덩어리 가지들을 내뿜었다. 촉수의 해일이 다시 한번 다키아와 마르낙을 향해 덮쳐들었다.
“엉겨붙는 바위시…”
다키아의 뒤에 숨어있던 쟈멜이 뛰쳐나와 권능을 사용하려던 그때. 다키아가 조용히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바사삭.
거목의 촉수들이 바스러져 나갔다. 퍼져 나가는 붕괴를 견디지 못하고.
부패의 검이 사라졌다.
툭.
바스러진 거목 속에서 한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바닥을 나뒹군 칼토 이르멜의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처참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하반신과 양팔. 그는 여기저기 번져 나간 부패 속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 레 빌 라 . . .
다키아는 서서히 붕괴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입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흐릿한 황금빛 동공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칼토 이르멜은 초점 잃은 눈을 움직여 다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너는 역시, 나를 닮았다. 레빌라가 아니라.”
별말 아닌 한마디. 그 한마디에 다키아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달라요!!!”
“그런데 어째서 너를 볼 때면 레빌라가 떠오르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그저 중얼거림이었을 뿐. 그는 이제 앞이 보이질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깨달았다.
“목소리가 레빌라를 조금 닮았군. 레빌라는 너처럼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다키아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이르멜의 이름을 더럽혔어.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이 땅 위의 백성들을 모욕했다고!!”
원망. 진한 원망이 담긴 그 목소리에 칼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는 굳어 가는 혀를 놀려 대답했다.
“만약 사랑하는 이를 되살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 그 가능성이 네 앞에 들이밀어진다면 너는 그 기회를 붙잡지 않을 수 있겠나?”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얼마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해? 어떤 이유를 들이밀던 당신의 방식은 틀렸어! 틀렸다고!!! 어머니는 절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되살아나길 바라지 않았을 거야!”
“단 한 번도 레빌라를 본 적 없으면서 잘도 확신하는군.”
“…”
칼토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네 말이 맞다. 레빌라는 절대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길 바라지 않았겠지. 그런데 나는 어째서…”
잠시 감겼던 두 눈이 빠르게 떠졌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순간, 칼토는 깨달았다. 초점 잃은 탁한 눈동자가 다키아를 향했다.
“그렇군. 그랬어. 다키아.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만약, 네 앞에 자신의 이름이 데스페라시오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당장 두 귀를 막고 도망…”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청남색 로브. 청남색 가면. 온몸을 푸른색으로 장식한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하얀 선으로 미소가 그려진 가면을 내보이며 그는 통통 튀는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건네왔다.
“안녕하십니다. 초면에 무척이나 반갑군요. 저는 절망(絕望)의 데스페라시오. 리베라티오의 여섯 선지자 중 한 명입니다. 혹시…”
데스페라시오는 손가락을 뻗어 칼토 이르멜을 가리켰다.
“제가 이분 좀 챙겨 가도 괜찮겠습니까? 이번 일에 들인 저희 예산이 말이죠. 아주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는 두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굽혔다 펴며 무척이나 친근하게 속삭였다.
“진짜 많이 들었어요. 진짜 엄청 많이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나직한 말 한마디가 이어졌다.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네?”
파직
뇌전이 다키아의 손아귀 위를 감돌았다. 그녀는 지극히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꺼져.”
단호한 거절. 그 지극히도 단호한 거절에 데스페라시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이렇게 거절당하면 안 되는데…? 일단 세 분 다 잠깐 ‘잠들어’ 주실래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쟈멜의 몸이 휘청이며 쓰러졌다.
왜애애애애앵!!!
마르낙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 손으로 쟈멜을 받아든 채 눈앞의 사내를 향해 도살자를 내밀었다.
“권능입니다. 다키아.”
“저, 저는 어째서 괜찮은 거죠?”
“아까 극장에서 어머니의 가호를 받으셔서 그럴 겁니다.”
“아.”
데스페라시오는 여전히 두 발로 대지를 디디고 선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마치 진찰이라도 하듯이 칼토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어 보곤 무척이나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두 분 이야기 다 끝나셨으면 제가 이분 좀 챙겨 가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진짜 곧 숨넘어가실 거 같거든요.”
“건드리지 마.”
파지직!
선명한 뇌전이 그가 있던 자리를 지져 버렸다. 슬쩍 물러난 데스페라시오가 다키아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따님분이셨구나. 얼굴이 아버님이랑 아주 똑 닮으셨네요. 그거 아세요? 아버님이 따님분 칭찬을 어찌나 하시던지. 이분하고 만날 때마다 아주 물리도록 당신 칭찬을 들었어요!”
“뭐라고…?”
다키아는 전혀 예상 못 한 그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방금 뭐라고 했…”
“뭐, 거짓말이지만요! 하하하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너무 무서운 분위기로 말을 하셔서 기분 좀 좋아지시라고 한번 말해 봤어요. 어때요? 잠깐 기분 좀 좋아지셨어요?”
“장난은 거기까집니다.”
마르낙은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게 자세를 낮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키아. 보조해 주십시오. 제가 먼저 달려들…”
“그냥 죽어.”
콰아아앙!!!
분노한 다키아의 목소리와 동시에 터져 나가는 마력의 폭발. 데스페라시오는 재빨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폭발을 피해 낸 다음 벌떡 일어나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것 참, 살벌한 분들이시네. 짧게 살다 가는 삶. 서로 싸우지 말고 즐겁게 살다 가자고요! 네?”
왜애애애애애앵!!!
자리를 박찬 마르낙이 거침없이 도살자를 휘둘렀다. 데스페라시오는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간발의 차이로 마르낙의 검격을 피해 내며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이거 비싼 옷이에요!!! 엄청 비싸요!!! 이 옷도 다 피 같은 예산으로 맞춘 건데, 절 베더라도 옷은 좀 봐주세요!!! 제가 베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옷은 절대 안 된다고요!!”
“헛소리는 적당히 하십시오!”
“앗!!! 그거 맞으면 진짜 저 죽습니다!!!”
회전하는 톱날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데스페라시오의 몸뚱이를 향해 나아갔다.
까앙!!!
갑작스러운 충격이 도살자를 튕겨 냈다. 쫑긋 솟아 있는 기다란 토끼 귀. 몸에 찰싹 달라붙어 늘씬한 곡선을 드러내는 옷. 검은 토끼 귀가 달린 여인의 어깨에는 칼토 이르멜이 업혀 있었다.
데스페라시오는 자신을 구해 준 수인족 여인을 향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릴리. 일찍일찍 좀 오면 안 돼요? 네?”
“닥쳐요. 지금 당장 제 손에 뒤지기 싫으면.”
“흠흠.”
토끼 여인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데스페라시오는 짐짓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이 헛기침하곤 마르낙과 다키아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까앙!!!
또 한 번의 청명한 충돌음.
릴리라고 불린 토끼 여인이 문답무용으로 휘둘러진 도살자의 옆면을 걷어차 냈다. 금속을 덧댄 신발과 이모탈리움 검날이 거칠게 부딪혔다. 기습에 실패한 마르낙이 살짝 거리를 벌리곤 빙그레 웃었다.
“여자분 반응이 생각보다 빠르시군요. 아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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