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14)
114 화 사고뭉치.
사고뭉치.
“흐음.”
쫑긋. 거슬리는 콧소리에 새카만 토끼 귀가 움찔댔다.
“흐으으음.”
릴리는 애써 저 귀찮은 놈팡이가 내는 불쾌한 소음을 무시하려고 했다. 지난 며칠간 그녀는 무척이나 바빴었다. 정말 바빴었다. 만신창이가 된 칼토 이르멜을 살리기 위해서 그를 들쳐메고 하루 종일 달린 데다, 임시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저 놈팡이가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밑준비를 하느라 간간이 쪽잠을 잔 게 그녀가 취한 휴식의 전부.
“흐으으으으으음.”
“그냥 말로 해!!! 이 새끼야!!! 그냥 말로 하고 자러 가게 해 달라고!!!”
“아, 릴리. 마침 여기 있었군요. 정말 잘됐습니다!”
아까부터 주변에서 알짱대 놓고 이제야 본 척이라니. 릴리는 솔직히 저 남자, 데스페라시오가 여전히 어려웠다. 물론, 대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쓴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다 늘 실실 웃고 다니는 통에 실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누구에게도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 방식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남자가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지독한 변덕쟁이였다.
때로는 아주 자그마한 사항까지도 집요하게 집착하지만, 때로는 눈앞의 커다란 이익조차 내버리고 그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와 자주 붙어 다니는 릴리는 항상 궁금했다. 저 남자의 껍데기를 살짝, 아주 살짝만 벗겨 내고 그 안에 든 진짜 욕망을 꺼내 보고 싶…
“… 죽었어요.”
“응? 뭐라고? 죽었다고? 누가?”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는 데스페라시오가 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 데스페라시오는 릴리의 자그마한 무례에도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신(神)이 죽었어요. 우리가 이 땅으로 추락시킨 ‘증폭하는 고리’가 죽었다는 거죠!”
“네에에에?! 뭐라고요? 신이란 게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진심으로 당황한 릴리는 그 옛날 그를 대할 때처럼 존댓말을 내뱉고 말았다. 데스페라시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로 죽을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거 확실한 정보는 맞아?!”
릴리의 추궁에 데스페라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는 신께서 저한테 알려 온 일이니 아마 확실하죠? 아, 혹시 안 죽었을 수도 있으려나?”
“신께서 말씀하신 거면 무조건 죽은 거잖아!!!”
“뭐, 신들께서도 무결한 분들은 아니시니, 혹시나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거 회수는 루디피코르 그 자식이 하기로 했었잖아. 걔는 그럼 어떻게 된 건데?!”
“현재 연락 두절 상태죠…?”
지극히 김빠지는 태도에 릴리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질문을 고르고 골라서 그에게 던졌다.
“그러면 루디피코르가 빌려 간 우리 측 사도는?”
“아, 그게 사실 본론입니다! 두 분 다 무사히 귀환했어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히요!”
“아니!!! 그러면 그 장소에 있었던 둘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잖아!!! 여기서 이렇게 모른다고 할 때가 아니라!!!”
“워워. 진정하세요. 릴리. 그러면 이마에 주름 생겨요. 주름.”
자신의 푸른 가면을 톡톡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그 모습에 릴리는 더 크게 발끈했다.
“아니, 이게 진정할 일이야? 응? 진정할 일이냐고! 우리가 그간 열심히 준비해 온 대규모 계획 하나가 완전히 나자빠진 건데!!! 하아아아… 그래서 그 둘은 어디 있어? 내가 직접 가서 물어볼래!”
그녀는 혹시 모를 주름 예방을 위해서 이마를 꾹꾹 문지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데스페라시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답했다.
“가봤자 딱히 얻을 수 있는 건 없을걸요? 이미 제가 먼저 갔다 왔거든요. 두 분 다 몸은 지극히 멀쩡하긴 한데… 대신에 베아투스에서 있었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요. 누가 억지로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요. 하긴, 신이 죽을 정도로 큰일이 벌어졌는데 정신까지 말짱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요.”
릴리는 입을 꾹 다물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쉴 새 없이 쫑긋대는 검은 토끼 귀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은근히 내보였다. 데스페라시오는 느긋한 태도로 그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역시 우리가 남아서 루디피코르 그 개자식을 도와줬어야 했을까? 만약 내가 없었으면 너는 루디피코르를 도와주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사람이잖아. 역시 이건 내 탓…”
기다란 검은 토끼 귀가 축 늘어졌다. 데스페라시오는 깜짝 놀라서 잽싸게 릴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워워. 뭐가 릴리 탓이에요! 루디피코르 그 친구가 부족해서 스스로 일을 망친 거죠! 암암. 거기다 오히려 다르게 생각하면 릴리가 있었던 덕분에 제가 산 걸 수도 있어요. 괜히 돕다가 둘 다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거죠! 신조차 죽었는데 저희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축 늘어진 토끼 귀는 끝 간 데를 모르고 추락했다. 이 상태에 돌입한 릴리는 무척이나 귀찮았다. 데스페라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와 슬쩍 거리를 벌렸다.
“저는 그럼 저기 누워 있는 미소공의 상태를 살피러 가 볼게요…?”
귀찮은 물건을 대하는 듯한 그 태도는 무척이나 효과적인 데다 효율적이기까지했다. 적어도 릴리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어서는.
“이 개자식은!!! 사람을 위로할 줄을 몰라! 진짜! 이럴 땐 그래도 네 탓은 아니다! 이러면서 조금 더 달래 줘야지!!! 이 빌어먹을 놈아!!!”
“앗?! 깨어났다! 미소공이 깨어났다!!!”
“말 돌리려고 헛수작 부리지 마!!!”
“너무… 시끄러워서 골이 울리는군.”
“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릴리는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데스페라시오의 등 뒤로 숨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그리했던 것처럼.
미소공 칼토 이르멜, 아니 두 번째 사도 돌아보는 칼토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데스페라시오를 노려보았다.
“진짜 나를 살려 냈군.”
“충분한 예산과 시간만 있으면 저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거든요.”
일렁이는 칼토의 황금빛 두 눈에선 진한 적대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다시 그 세 치 혀로 나를 조종할 셈인가?”
데스페라시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무척이나 속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콩콩 쳐 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굉장히 서운합니다. 저랑 릴리가 당신을 살리겠다고 요 며칠 잠도 거의 못 자고 미소공께 딱 달라붙어 있었는데 말이죠!”
미소공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데스페라시오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을 뿐.
“흠흠. 여튼 안정기에 접어들으셔서 다행입니다. 어차피 저희 쪽 파벌은 이번 일의 실패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을 못 할 예정이니 그냥 마음 편히 푹 쉬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푸른 가면의 눈구멍 사이로 가볍게 윙크한 그는 미소공을 향해 지극히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괜히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하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분을 되살릴 준비가 거의 다 끝났거든요.”
“뭐…?”
“운이 아주 좋으셨어요. 아내분의 영혼. 제가 어쩌다 우연히 찾아내고 말았거든요! 다른 분들 건 아직인데도 말이죠!”
부드러운 손길이 미소공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데스페라시오는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이곳으로 아내분의 영혼이 이송될 예정이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괜히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칼로 이르멜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훤히 내다보였다. 아주 선명하게 훤히.
***
“마르낙 사제님!!!”
또 한 번의 묵직함. 날듯이 뛰어들어 온 다키아의 묵직함은 아직 어머니보다 훨씬 무게감이 있었다.
‘살해!!!’
어머니는 난데없이 찾아온 난입자의 얼굴을 꾹꾹 밀어내려고 노력했지만, 다키아는 뺨 모양이 조금 눌리는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꼭 껴안아 왔다.
“정말 아주 못 일어나시는 줄 알았어요! 마르낙 사제님이 정신을 잃고 계신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거든요!”
일주일이나 흘렀다고?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일단 다키아와 어머니를 몸에서 떼어 내고 침대에 기대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창에 꿰뚫린 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은 당장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키아와 서로 눈을 보며 무언의 대화를 한 다음 다키아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네가 말하라는 듯이. 다키아는 어머니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 기억이 없어요… 뭔가,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긴 했다는 건 알겠는데요… 그걸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도저히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것 같달까요? 저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리베라티오의 그 붉은 가면의 남자랑 사도들 전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어요. 마르낙 사제님은 멀쩡해진 몸으로 쓰러져 계셨고요.”
‘살해살해.’
어머니께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키아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어머니께서도 아무 기억이 나시질 않는 겁니까?”
‘살해! 살해살해!’
어머니의 설명도 다키아의 것과 비슷했다. 뭔가 머리가 아주 새하얗게 됐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이렇게 커져 있더라는 이야기. 어머니의 몸이 저렇게 한 단계 성장한 이상, 아무래도 이곳에 있던 성물을 흡수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나는 재빨리 정신을 집중하고 가지고 있는 신성의 잔량을 확인했다.
[신성 : 3876]신성의 잔량은 변화가 없었다. 그 순간, 새로운 문자열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왔다.
[신살(神殺) : 0(1)]이게 그 갑옷이 말했던 신살의 업이란 건가. 현재 숫자가 0인 건 사용할 수 있는 업의 양을 뜻하는 듯했다. 그 옆에 표시된 숫자 1은 여태까지 죽인 신의 숫자를 뜻하는 듯했고.
어째서 두 개나 표시될 필요가 있지?
당장에 어떻게 알 방법이 따로 없었다. 그 갑옷을 다시 만났을 때 물어보면 되겠지. 그도 부패의 아들이었으니 나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살해…?’
보석처럼 일렁이는 암녹빛 눈동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댄 어머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혹시 자신이 기억을 못 해서 화났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제는 너무 많이 커 버린 어머니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찌 됐건 어머니께서 죽을 뻔한 절 살려 주신 거니까요. 이거 다시 한번 주어진 목숨으로 더욱 열심히 어머니를 모셔서 갚는 수밖에 없겠군요.”
‘살해…!’
격한 감동의 여운에 푹 젖은 어머니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거침없이 비벼 댔다. 다키아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푸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 지금 다들 베아투스의 복구 작업을 돕고 있어요! 마르낙 사제님의 간병은 다들 돌아가면서 했는데, 우연히 제 차례 때 깨어나셔서 정말 기뻐요.”
복구 작업을 한다면 그들을 이끄는 자가 있는 것이 당연. 그 자리에 걸맞은 인물은 여기 있는 다키아를 제외하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공녀님의 오빠분께서도 몸 상태가 괜찮으신가 보군요.”
다키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자리에 있던 오빠도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잠깐 대화를 나눠 봤는데, 오빠는 저나 쟈멜보다 더 많은 기억을 잃은 것 같아 보였어요. 여튼, 오빠는 멀쩡하게 사람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있어요. 일벌레처럼요.”
내가 잠든 사이, 남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는 몰라도 다키아는 자신의 오빠에 대한 감정의 앙금을 대부분 떨쳐 낸 듯했다.
“아, 그런데 일주일을 꼬박 굶으셨는데 배는 안 고프세요? 먹을 걸 좀 밑에서 챙겨다 드릴까요?”
다키아가 꺼낸 말을 듣기 무섭게 거친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조금 많이 가져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살해!’
어머니는 내 몸에 머리를 기댄 채, 얼른 다녀오라며 손을 팔랑였다. 솔직히 그 꼬맹이 같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나 커 버린 어머니를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머…”
나는 무어라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몰려오는 지독한 수마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퍽!
얻어맞은 뺨이 화끈하게 불타올랐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언덕. 그때의 언덕이 또 내 눈앞에 있었다.
–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암녹빛 갑옷 또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나는 얻어맞은 뺨을 매만지며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한동안 못 보는 것 아니었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 내 마음이다. 이 자식아. 정 불만 있으면 그 옆에 있는 검을 들고 덤비든지.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나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은색 롱소드를 조금 밀어내고선 그를 째려보았다. 평소의 나 같으면 쉬이 감정을 드러내는 걸 경계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선 왠지 모를 동질감 때문에 감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왜 부르신 겁니까?”
– 허, 이제 좀 성질 나온다 이거냐? 목소리에 아주 가시가 잔뜩 돋아 있는 게 할 수만 있다면 아주 목소리로 사람 찌르겠네 이거.
“용건부터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식사를 할 예정이었던 터라.”
– 식사? 아, 나도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흠흠. 그래, 식사는 중요하지. 암. 그래, 그럼 최대한 짧게 설명한다. 잘 새겨들어. 내가 너랑 연결된 김에 이것저것 살펴봤거든?
“예.”
암녹빛 갑옷의 눈구멍에서 귀화가 일렁였다.
– 너는 이제부터 북제국으로 가라. 신성이 봉인된 성물 중 하나가 북제국에 있을 거다.
“당장은 곤란합니다.”
– 어째서?
나는 카르멘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저는 제 동료의 어머니를 같이 찾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 하, 아주 대륙 관광을 다닌다고 하지 그러냐. 얼빠진 놈일 줄은 알았는데, 이거 그냥 얼빠진 게 아니라 아주 제대로 얼빠졌어! 그런 물러 터진 방식으로 정말 모든 성물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의 조롱에 나는 반사적으로 뾰족한 어투로 대답하고 말았다.
“저에겐 저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 오. 너도 성질이 있다 이거냐? 이걸 그냥 확! 그 성깔 있는 부패의 아들이 커서 된 게 나다! 이 자식아!
암녹빛 갑옷의 손이 올라감과 동시에 나는 재빨리 발을 굴려 그와 거리를 벌렸다. 가만히 얻어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를 따라잡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키득키득 웃었다.
– 큭큭. 도망치는 건 다람쥐처럼 날래네. 뭐, 나도 억지로 시키려는 건 아니야. 괜히 억지로 시켰다가 나중에 날 원망하면 나도 억울하거든. 다 너 좋으라고 조언한 건데 말이지. 다만, 잘 생각해 봐.
여기저기 뭉개진 갑옷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 과연 네가 같이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 그 둘 중 어느 편이 네 여행 동료가 안전할지를 말이지. 나는 진짜로 네가 네 동료를 위한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편이 네 동료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절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한마디가 뒤따랐다.
– 나는 운명이란 건 믿진 않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같은 부류의 인생에선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우리 같은 부류가 대체 뭡니까?”
움직일 리가 없는 투구가 일그러지며 한 가닥 미소를 그려냈다.
– 뭐긴 뭐야. 사고뭉치지.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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