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15)
115 화 결심.
결심.
달그락달그락.
암녹빛 갑옷과 나름 꽤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현실에선 찰나의 순간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름을 불리다 만 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 내려갔던 다키아가 자그마한 탁자 위에 음식을 수북이 쌓아 올린 채로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침대 위에서 식사하는 호사를 누리며 생각에 빠졌다.
– 신성이 숫자로 표시됐었다고? 이제는 신살도 숫자로 표시가 돼? 그거 그냥 네가 미쳐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나는 게임 캐릭터로서의 흔적을 갑옷에게 질문했지만, 그 갑옷은 내가 가진 숫자들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그 후로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지만, 딱히 뭔가 유의미한 정보를 듣지는 못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 제약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중간중간 홀로 말을 멈췄고, 그때마다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 이거 진짜 개 같네.
그 와중 유의미한 정보를 하나 건지긴 했다. 암녹빛 갑옷의 이름을 알아냈으니까.
– 내 이름? 어차피 둘만 있는데 굳이 이름이 필요한가? 흠, 내 이름은 일단 임페트로다. 혹시나 쓸데없이 내 이름을 단서로 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수고를 할 생각이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걸? 어차피 나에 대한 정보는 싸그리 지워져서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테니.
임페트로. 무척이나 묵직해 보이는 그의 겉모습에 퍽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게 작별을 고했다.
– 오늘은 이제 그만 가 봐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하는데, 내가 아까 했던 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성물이 가만히 앉아서 마냥 널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너도 알다시피 성물을 노리는 건 너 혼자만이 아니라고. 그럼.
우드득.
그렇게 또 한 번 목이 부러지고, 나는 현실에서 깨어났다. 그때를 떠올리자 괜스레 목이 스산해서 나도 모르게 내 목을 매만졌다.
“혹시 목 메세요? 여기 물도 같이 드세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다키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빈 컵에 물을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살해!!!’
어머니는 잽싸게 손을 뻗어 다키아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서 내게 내밀었다.
‘살해살해!’
시원하게 쭉 들이켜라는 어머니의 지극히 뻔뻔한 권유에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서 대답했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물을 마시곤 다시 천천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내 머릿속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고민은 단 하나였다.
카르멘. 그와의 약속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임페트로가 한 말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의 어머니를 찾는 여정에 동참했을 게 분명했지만,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나 때문에 카르멘이 평온한 여행을 하지도 못하고 가는 곳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건 아닌가 싶었다.
거기다 카르멘과 내가 함께 다니면, 카르멘이 아직 내가 악신의 숭배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권능의 사용에 대해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임페트로가 제시한 길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우리는 갈라지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쉬이 결단을 못 내리는 건, 이 모든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일방적으로 카르멘과의 약속을 깨는 게 단순히 싫은 탓이었다. 카르멘은 언제나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신의에 신의로 답하는 사내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기 와서 사귄 몇 없는 친구기도 했고. 그래서 일단 약속한 이상, 뭐가 됐든 그의 여정에 함께해 주고 싶다는 게 내 진짜 본심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카르멘의 앞길을 가시밭길로 만드는 내 단순한 아집일 뿐이라면?
머리가 복잡했다.
“더 가져다드릴까요..?”
쓸데없이 고민에 푹 빠져 빈 그릇을 바라보고 있던 탓에 다키아는 내가 아직 배가 많이 고픈 줄 착각한 듯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괜찮습니다.”
살기 위해서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음식을 억지로 집어넣는 건 이제 한계였다. 적당히 배도 채운 듯도 했고.
“그럼 제가 치워 드릴게요. 오늘은 그냥 푹 쉬세요!”
내가 직접 치우려고 했지만, 다키아는 한사코 나를 말리고는 직접 빈 그릇과 상을 들고서 문을 나섰다.
‘살해살해.’
어머니는 침대 가에 앉아 다키아가 알아서 일하는 게 퍽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십 대 후반에 가까운 어머니의 모습. 그 모습이 나는 아직 쉽게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게 바로 자식이 훌쩍 자라 버린 부모가 느끼는 기분인 건가. 완전 꼬맹이 같던 게 진짜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지. 실제로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꼬맹이가 맞긴 했지만.
이제까지 모은 어머니의 성물은 6개. 정확하게 내가 회수한 성물은 5개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서 동전 조각 성물을 확인해 보니 거기에 깃든 어머니의 신성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어머니가 성장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섯 번째 성물에 깃들었던 신성은 반지에 깃들었던 신과 함께 성공적으로 회수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다면 남은 성물은 이제 7개. 여기서 하나의 성물만 더 모으면 이 성물 회수 여행도 절반을 넘어가게 된다.
일단 리베라티오 측에서 보유한 성물은 4개. 거기서 하나를 우리가 탈취한 셈이니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성물은 셋.
그들이 가진 성물을 제외하면 아직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물은 넷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물론, 일이 다 지나서 하는 말이긴 했지만.
‘살해!’
어머니는 내가 오랜만에 깨어난 게 무척이나 기꺼우신 건지, 내 주변에서 뒹굴거리면서 나를 이리저리 쿡쿡 찔러 대며 끊임없이 장난치셨다. 몸만 컸지 아직은 애 같은 그 천진난만함에 나는 대충 어머니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 주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쿵쿵.
그렇게 고민하길 조금 뒤,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마르낙! 깨어났다며! 들어가도 괜찮아?”
카르멘의 목소리였다. 아직 나는 결심을 내리지 못했는데.
“어머니.”
내 나지막한 부름에 어머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손으로 화해 이불 밑으로 숨어들어 가셨다.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래!”
곧 문이 열리며 카르멘이 홀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하루 종일 바삐 뛰어다녔는지, 그의 신발과 바지 밑단은 흙먼지투성이였다. 카르멘은 침대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상쾌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몸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당장 떠나도 괜찮을 정도로요.”
“그건 다행이네! 네가 자고 있을 때 수복교 사제분이 네 상태를 살피고 갔는데, 그분도 아무 이상이 없다더라고. 그런데 본인이 일어나야 진짜 괜찮은 건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조금 걱정했거든!”
그의 목소리에는 친우를 향한 순수한 호의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카르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결심이 섰다.
“카르멘.”
“왜?”
무거운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여기서 이제 찢어지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도통 쉽지 않았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생긴 여행 동료였고,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는 거지?”
“예?”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 그저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카르멘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르낙, 넌 가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때가 있거든. 네가 나한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건 아마, 네가 애지중지하며 챙겨서 다니는 그 손하고 관련 있는 일이겠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걸 가지고 다니는 너라면 분명 알겠지만, 그 손 가끔 보면 네가 건드리지 않아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
‘살햇?!’
저도 모르는 사이 움직인 걸 들킨 어머니가 깜짝 놀라 당황이 가득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건 아마 네가 믿는 신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네가 믿고 있는 신이 유지의 여신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아마 네가 모시는 신은 보통 사람들에게 드러나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겠지.”
그는 나를 배려한 것인지 의도적으로 ‘악신’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지만, 내가 악신의 숭배자라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동안 숨긴다고 숨겼었지만, 솔직히 여기저기 들킬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다.
“언제부터 눈치채신 겁니까?”
“꽤 오래됐지? 사실, 나는 너 말고 다른 유지의 사제를 몇 명 만난 적이 있거든.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식자재를 보면 유지의 가호를 못 걸어 줘서 난리였는데, 너는 여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우리 식량에 가호를 걸어 준 적이 없잖아.”
“음…”
솔직히 나는 상투스 말고는 다른 유지의 사제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 잘 몰랐다. 하긴, 상투스도 매번 식자재 창고에 유지의 가호를 꼬박꼬박 걸어 놓긴 했는데 그걸 만나는 사람마다 베풀어 주는 거였다니.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야, 나는 너처럼 전투를 마다치 않는 유지의 사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처럼 강한 유지의 사제도 본 적이 없고. 내가 사제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신에 의해서 간택되는 것이라 대부분 같은 신을 모시는 사제끼리는 비슷한 성향을 띤다고 알고 있거든?”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곤 쓰게 웃었다.
“생각하신 게 전부 맞습니다. 사실, 저는 악신의 숭배자입니다.”
카르멘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 나도 하나만 물어봐도 돼?”
“예.”
“여태까지 우리가 막아 냈던 악신의 숭배자들. 전부 네가 의도해서 마주친 거야?”
“믿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랑 마주친 건 전부 우연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기막힌 우연이라 말하는 저도 믿기가 어렵지만요.”
이제 와서 보니, 임페트로가 한 말대로 나는 사고뭉치가 맞았다. 그것도 지독한 사고뭉치.
“믿을게.”
카르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말을 믿어 주었다.
“그렇게 쉽게 믿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네가 위험을 마주할 때마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봐 왔으니까. 너는 항상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았잖아. 그래,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래. 마르낙, 너에겐 항상 혼자 도망칠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했어. 그럼에도 넌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지. 심지어 나는 네가 망설이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어.”
맑게 빛나는 두 눈이 나를 직시했다. 두 눈에는 진한 신뢰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너는 내가 봐 온 사람들 중에 가장 고결한 사람이야. 마르낙.”
그 한마디에 나는 조금 울컥했다. 그간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내 가슴을 울리는 것이었다.
살짝 목이 메서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카르멘은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점점 커져 가는 일의 규모에 비하면 당장 내 실력이 아득히 부족하다는 것도 아주 잘 통감하고 있어. 그래서 너는 어쩔 수 없이 나와의 약속을 깨려고 하는 거겠지. 너와 함께 있다간 내가 위험에 빠질까 봐.”
“카르멘이 약해서 그런 건 아니…”
“굳이 거짓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친구인 네가 이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마음 같아선 어떤 위험이 찾아오더라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웃통을 들춰 내 보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돋아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빨간 살들로 가득했다. 그건 지독한 치명상의 흔적이었다.
“설마?”
“내가 일부러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너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번에 베아투스 전역에서 돋아 난 그 푸른 살덩어리들. 그걸 막다가 나는 한 번 크게 다쳤어. 같이 있던 테르지오하고 사지타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내 걱정 어린 눈빛에 카르멘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수복교 사제분이 치료해 줘서 다 나았어. 그래서 이젠 완전 쌩쌩해. 그러니까 내 몸은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네 갈 길을 가도 괜찮아.”
“미안합니다.”
“뭘 그리 미안해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곤란한 점이 있으면 서로 이해도 해 주고 그런 거지. 이럴 땐 그냥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만 해 주면 되는 거라고.”
그는 여느 때보다도 더 시원한 미소를 짓고서 가볍게 말했다.
“‘또 보자. 마르낙.’ 이렇게.”
***
며칠 뒤, 카르멘은 떠났다.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사지타는 우리에게 자신은 카르멘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애초부터 용병으로 고용된 사지타의 호위 계약은 베아투스까지였고, 자유의 몸인 그를 막을 명분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행 중 둘을 떠나보냈다.
그날 밤. 내 방에 테르지오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내가 그를 불렀다. 테르지오의 몸에서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후계자님!!! 후계자님께서 이 디스펜스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