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73)
173 화 갈등.
갈등.
나를 바라보는 다키아의 눈빛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정확하게 어디가 얼마만큼 다른지 설명하라면 설명할 수 없겠지만.
헐렁하고 얇은 잠옷 한 벌. 그리 두껍지 않은 천은 달빛에 비쳐 얇은 제 몸 안에 숨기고 있는 살결들을 희미하게 내보였다.
밤바람이 불었다. 마취도 없이 온몸의 뼈를 갈아치운 탓에 무척 피곤하기도 했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강가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키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몸짓은 무척이나 부드러웠지만, 또한 단호했다.
“아뇨. 괜찮아요. 잠깐 이리 와서 앉아 주실래요?”
나는 걸음을 옮겨 옆의 상자 하나를 당겨 와 주저앉았다. 다키아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걷힌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이나 반짝거렸다.
“저는요.”
밤하늘을 담던 눈이 별을 덜어내고 내 얼굴을 담았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오늘처럼 보호받기 위해 마르낙 사제님을 따라온 게 아니에요. 당신의 목적을 이해하는 한 명의 이해자로서, 마르낙 사제님을 지지해 주기 위해 이 길을 나서기로 결심한 거예요.”
다키아는 ‘마침내 그 모든 끝이 온다면, 자그마한 바람 정도는 있지만요.’라고 작게 중얼거리곤 구슬프게 웃었다.
“그러니 이번처럼. 제게만 비밀로 어딘가 다녀오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더는 곤히 잠들어 있다 어디서 챙겨 온 건지 모를 보따리 두 개를 질질 끌고 가느라 낑낑대는 쟈멜 때문에 깨서 막연히 무슨 일이 있었음을 추측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쟈멜 때문에 깼구나. 나는 고르고 골라 말을 내뱉었다.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내뱉고 나서야, 나는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고요하던 다키아의 황금빛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쁜 뜻… 그래요. 마르낙 사제님에게 나쁜 뜻은 없으셨겠죠. 제가 봐 온 마르낙 사제님은 오히려 배려가 넘치면 넘쳤지. 나쁜 뜻을 품고 제게 무언갈 숨기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하지만.”
하얀 이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배려가 받는 입장에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라도 너무 모르세요. 저는 마르낙 사제님에게 단 한 번도 절 상자에 넣어 둔 보물처럼 애지중지 다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어요.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지지해 주고 싶었다고요. 물론, 제가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런 저라도 마르낙 사제님께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여행에 동참하겠노라고 한 거예요.”
유동하는 마력. 나지막한 중얼거림. 마력을 연료로 피어오른 불꽃이 갑판 위를 환하게 밝혔다.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다키아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렇게 애지중지 보호받는 애물단지로 남을 줄 알았다면 절대 따라나서겠다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녀는 처음으로 나를 탓하고 있었다. 나는 선의로 다키아를 위해 행동했지만, 결국 내 행동으로 그녀가 느낀 것은 무력감이었다.
“다키아, 잠깐 진정…”
“대체 어떻게 해야 절 믿고 털어놓아 주실 건가요? 앞으로도 저는 마르낙 사제님의 선의에 기대 계속 보호받고, 계속 모른 채로 지내야만 하는 건가요! 저는, 저는!!!”
눈물이 방울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는! 이곳만이 제가 있을 곳이라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마저도 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지내야 하는 건가요!!! 쟈멜이나 지젤, 그 둘보다 제가 먼저였잖아요!!! 제가 훨씬 더 먼저 마르낙 사제님과 만나고, 마르낙 사제님을 이해하려 했는데!!! 어째서!!!”
성난 질타가 이어졌다.
“어째서 제가 모르는 것들을… 그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거죠? 어째서 제게는 설명하지 않는 것들을, 그녀들과 함께하는 거죠? 거슬려요. 진짜 너무 거슬린다고요!!!”
드러난 민낯. 비집고 튀어나온 질투. 그녀는 숨겨 두던 자신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증명할 수밖에 없겠네요.”
파직.
이글거리는 불꽃들 위로 새하얀 뇌전이 춤을 춰 댔다. 그녀가 피워 낸 빛이 어두운 밤을 제멋대로 밝혔다. 환한 빛 속에서 그녀는 환히 웃었다.
“그 둘을 힘으로 뭉개 버려서, 누가 더 마르낙 사제님에게 쓸모 있는 존재인지 증명할 수밖에 없어요.”
그간 너무 스스로를 잘 통제해서 잊고 있었지만, 쓰고 있던 가면을 내던진 그녀는 역시 한 명의 마법사였다. 스스로의 감정에 독선적일 정도로 충실한 마법사.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그녀는 정말로 쟈멜과 지젤을 깨워서 단어 그대로 ‘뭉개’ 버릴지도 몰랐다.
누구든 그녀를 멈춰야만 했다.
“물론, 마르낙 사제님을 생각해서 멀쩡하게 되돌릴 수 있을 정도로만 짓눌… 앗?!”
손을 뻗어 한 손에 잡히는 얇은 손목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당김에 중심을 잃은 다키아가 내 품 안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집중을 잃은 탓인지, 허공을 수놓던 뇌전과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품에 안은 다키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제가 많이 미안합니다. 이번 일은 제 실수가 맞으니, 이대로 잠깐만 진정하십시오.”
다키아는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다키아를 토닥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다키아가 느꼈을 감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처음 만났던 시절, 제가 다키아에게 상의 없이 날뛰지 말라고 해 놓고, 이제 보니 설명 없이 혼자 날뛰고 있었던 건 오히려 저였군요. 면목이 없게도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정작 많은 피를 봐야 하는 상황이 닥쳐 오면 나는 배려라는 명분을 내세우고서 일행에게 말없이 항상 홀로 나섰으니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맺은 인연들이 너무나 애끓게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 도저히 무엇 하나 감히 놓기가 싫을 만큼.
그래, 지독한 욕심쟁이인 데다 이기적인 나는 나와 대적하는 타인의 것을 너무나도 망설임 없이 부숴 버리면서도 내가 가진 것들을 잃는 것이 항상 두려웠다.
그래서 자그마한 상자 속에 내 것들을 모아 두듯, 내 동료들을 마치 이 싸움을 통해 얻어 낸 전리품처럼 내 곁에 장식해 두려 한 건지도 몰랐다.
혹은 한 번 내 사람을 잃었던 상처가 아직도 쑤셔 대는 통에 망설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스스로의 이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내가 틀린 방법으로 동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것.
“다키아.”
작게 코를 삼키는 소리가 나고, 코맹맹이 소리가 뒤따랐다.
“…네.”
“예전에 저는 한 번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소중한 사람을요. 뭐라 말하든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내 품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예전에 상투스라는 은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
처음으로 상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마냥 쉽지는 않았다. 오래된 상처를 헤집자 제멋대로 울컥대는 목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키아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가길 기다려 주었다. 무척이나 고맙게도.
“…그렇게 저는 상투스를 차가운 땅에 묻었습니다.”
마침내 고된 이야기를 끝내자, 무언가 조금 후련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저는 제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잃을까 봐 너무 무섭습니다.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죽어 버리고 마니까요.”
특히나 너무나 쉽게 폭력이 횡행하는 이런 세계에선.
다키아는 여전히 내 품에 묻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 저한테만 해 주신 거예요?”
“말로 꺼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합니다.”
꾸물거리는 손이 내 허리를 비집고 들어와 내 등을 덮었다. 그녀는 나를 한 번 꼭 안아 주며 말했다.
“아깐 제가 너무 흥분해서 죄송해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키아는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며 쓰게 웃었다.
“쟈멜이랑 지젤을 뭉개 버리는 건 조금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반짝이는 은발 사이로 드러난 하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말은 잊어 주세요. 제가 조금 말실수를 했던 거 같아요.”
“벌써 잊었습니다.”
“이제 다음에는 미리 설명해 주시는 거죠?”
“예.”
“저는 그거면 됐어요.”
다키아는 한참이나 내 허리를 꼭 껴안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쯤, 다키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해 왔다.
“슬슬 들어가서 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잠깐만 딴 데 보고 있어 주세요.”
“다른 곳 말입니까?”
“…아까 울어서 얼굴이 부었단 말이에요.”
“고개 돌렸습니다.”
그녀의 부탁대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자, 다키아 꾸물대며 내 품에서 벗어났다.
곧, 내 뺨에서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니, 촉촉하고 부드러운데 무척이나 시린 감촉이.
“무슨…?!”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마력으로 피워 낸 냉기가 덧씌워진 손가락이 보였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다키아와 함께. 얼음으로 뒤덮인 손가락이 내 뺨을 꾹꾹 찔러 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볼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금 괘씸해서 장난쳐 봤어요. 저는 이만 자러 가 볼게요! 마르낙 사제님도 잘 주무세요!”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날듯이 뛰어 물제비호 안으로 사라졌다. 다키아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어머니가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내 다리 위에 앉아 입술을 삐죽 내미셨다.
‘살해.’
이제 보니 저거 아주 폭탄 같은 계집애였다는 투덜거림. 나는 어머니를 달래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사람은 착하지 않습니까. 슬슬 저희도 자러 갈까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배 안으로 향하려던 그때. 갑판 밑으로 내려가는 입구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스승님이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연아, 아주 우연하게도 네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단다.”
“예? 대체 어디서부터요?”
스승님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우리 연이가 나를 만나기 전에, 아주 슬픈 일을 겪었구나. 이 착하고 자비심 넘치는 스승님이 안아서 달래 줄까 싶은데 어떠니?”
이거 절대 우연하게 들은 게 아니네. 하긴, 그렇게 마력이 요동쳤는데 스승님이 안 일어났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이 스승님은 네가 슬픈 옛날 생각에 잠겨 오늘 밤 베개 보를 눈물로 적시는 건 아닐까 걱정된단다.”
자그마한 장난기. 이건 스승님 특유의 놀림이었다.
“…가서 잠이나 마저 주무세요. 이제 진짜 저도 잘 거니까.”
***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물제비호와 함께 도시를 떠났다. 그 부엉이 여자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이상, 이곳에 계속 머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더 건질 게 없다고 하고.
지젤이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눈으로 훑으며 질문을 던져 왔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어디긴! 우리는 바람과 마르낙 사제님이 이끄는 대로 가지! 새로운 보물을 찾아서!!!”
어제 훔친 두 보따리 덕에 쟈멜은 한껏 신이 난 상태였다.
“너한테 안 물었거든? 그리고 우리가 보물 찾아서 여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짜 어디로 갈 거야?”
나는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 북제국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이자, 북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를.
북제국의 수도 피데스. 반 토막 난 세계의 중심. 북제국의 황제가 있는 곳.
“중간중간에 예정되었던 수색 지점은 그냥 지나쳐서 저희는 곧장 수도로 갑니다.”
그곳에서 펄리와 다시 만나, 신의 그릇 근처에 있을 성물을 탈취한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쟈멜이 환히 웃었다.
“수도라! 아주 좋네요! 거기서 어제 챙긴 보따리를 아주 비싸게 처리할 수 있겠어요!!! 히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