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77)
177 화 수도 도착.
수도 도착.
여섯 선지자, 리베라티오를 이끄는 여섯 거물들.
여태까지 내가 만나 본 선지자는 총 둘이었다.
절망(絕望)의 데스페라시오.
좌절(挫折)의 루디피코르.
절망의 이름을 쓰는 선지자는 세 치의 혀로 기적을 보였고, 좌절의 이름을 건 선지자에겐 손 쓸 틈도 없이 공격 한 번에 진짜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보니, 둘 다 사라진 탓에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선지자란 이들은 리베라티오를 이끈다는 그 이름값을 하듯 무척이나 기괴하고 강력했다. 당장 내가 만전의 상태로 그들과 다시 맞닥뜨려서 충돌하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상상 속에서조차 내가 승리하는 모습이 쉬이 그려지질 않았다.
애초에 나는 그들이 자신의 밑바닥까지 드러낸 진짜 실력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펄리는 과연 의도적으로 내게 언니의 정체가 여섯 선지자 중 하나란 사실을 숨긴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펄리는 딱히 내게 언니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전에 유적에서 아테르와 함께 마주쳤을 때도 자신의 언니가 카디쇼를 묵사발 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도 했었고.
언니가 손가락 네 개짜리인 카디쇼를 쉽게 뭉개 버렸다고 했을 때, 뭔가 조금 이상하단 걸 알아챘어야 했네. 너무 가볍게 이야기해서 나는 그냥 펄리의 언니라는 사람이 한 끗발 날리는 숨은 강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대놓고 강자였다.
“역시 전혀 몰랐던 거지?”
지젤은 잔뜩 겁먹은 쟈멜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친구라 그런지 이런 데서 조금 닮은 면이 있는 건가.
떠오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눈앞의 지젤이 당장 화를 낼 게 분명했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혹시 그 펄리의 언니라는 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여자 이름은, 고난(苦難)의 페르페쇼야. 저 펄리라는 여자처럼 보랏빛 머리와 눈을 가지고 있고, 평소엔 보라색 로브와 가면으로 몸을 가리고 다녀.”
절망과 좌절에 이어 이번에는 고난인가.
“이거 내가 봤을 땐,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지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저 펄리라는 여자가 짠 함정일 확률이 엄청 높다고 생각해.”
지젤은 불안 가득한 눈으로 펄리가 있을 선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실 안에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손끝이 잘게 떨렸다. 겁에 질린 그녀는 조금 안타까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손 좀 건네줘 보시겠습니까?”
“어? 응? 손? 그건 갑자기 왜?”
지젤은 내게 반문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든 손바닥의 중심을 엄지로 꾹꾹 눌러 주었다. 곧,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얏! 아, 아프잖아! 그만! 그마안!”
하도 손을 파닥대는 통에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지젤이 살짝 찡그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그저 키득키득 웃었다.
“아픈 건 잘 참으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예상외로 엄살이 심하시군요.”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안 주도 곧장 아프게 하니까 그렇지! 아니, 애초에 왜 갑자기 내 손바닥을 달라고 한 거야!”
“너무 몸을 떠시기에 살짝 자극을 줘 봤습니다. 아무래도 제 의도가 아주 잘 먹힌 것 같군요. 더는 몸을 안 떠시지 않습니까.”
그제야 지젤은 어느새 자신의 떨림이 멎었음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잠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후, 지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난 겁쟁이가 아니야.”
그 한마디를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상처 입은 소동물을 닮아 있었다.
“저는 겁쟁이란 단어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지젤이 몸을 많이 떨어서 조금 염려가 되었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게 그 말 아니야?”
“겁은 누구한테나 있는 법입니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니까요. 누군가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이기 위해서는 사소하게 몇 번 겁을 먹을 먹는 것쯤이야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 중요한 몇 번의 순간들. 우리가 ‘진짜’ 선택의 갈림길 위에 서는 그 몇 번의 순간에만 자신의 두려움을 디디고 넘어설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일 겁니다.”
“너…”
나름 멋있는 말을 해 봤는데, 잘 먹힌 건가?
지젤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선신의 사제 흉내를 내고 다니더니 거기에 너무 심취해 버린 거야? 방금 너, 딱 떠돌아다니는 사제들이 자신의 정의를 설파할 때 모습 그 자체였어.”
“…그냥 못 들은 셈 쳐주십시오.”
내 대꾸에 지젤이 피식 웃었다.
“뭐, 네 딴에 달래 주려고 꺼낸 이야기겠지만. 고마워. 신경 써 줘서. 덕분에 조금 낫네.”
“나아졌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몸을 떠신 겁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마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내가 여섯 선지자의 뒷면을 조금 엿본 적이 있어서야.”
“대체 뭘 봤길래요?”
지젤은 촉촉한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슬쩍 핥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좌절(挫折)의 루디피코르, 그자의 추악한 취미를 봤어. 고대 유적에서 쟈멜이랑 떨어지게 된 나는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자가 취미로 운영하는 인간 목장의 관리를 돕도록 배치된 적이 있는데, 하아…”
짧게 심호흡한 그녀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너무 힘드네. 그냥, 정말이지 거긴 그 어떤 삶의 나락보다 더한 무저갱. 그 자체였어. 덕분에 나는 리베라티오를 떠나기로 굳게 마음먹었고, 기회를 찾아내서 너희한테 온 거야. 게다가 멀리서 저 펄리라는 여자와 그 언니를 본 장소도 바로 루디피코르의 인간 목장이었어. 내가 왜 질색하는지 이제 조금 알겠지?”
인간 목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만 보더라도 그곳이 어떤 종류의 장소일지 눈에 훤했다. 엄청난 비극과 가학이 넘치는 곳이리라.
그리고 그런 인간 목장에 언니와 단둘이 찾아온 펄리를 보고 지젤이 질색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여튼, 나는 여섯 선지자랑 관련되는 건 딱 질색이야. 내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는데. 게다가 내가 먼발치에서 봤을 때, 저 펄리라는 여자는 자신의 언니와 무척 살가운 관계로 보였어. 그런데 저런 귀한 위치의 여자가 리베라티오에게 불이익이 가는 계획을 짠다? 나는 도저히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내가 본 펄리는 좋게 말하면 아주 통통 튀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똘끼가 넘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고난(苦難)의 페르페쇼라는 선지자가 어느 파벌에 속한지는 아십니까? 듣기론 북제국의 수도에서 암약하고 있는 이들은 악신을 강림시키려는 베르시오 파라고 들었거든요.”
“…나는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어서 여섯 선지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라.”
“만약 펄리와 그 언니가 반대 파벌에 속해서 베르시오 파벌에 한 방 먹이려는 거면 이번 일의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지젤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민했다. 마침내 긴 고민이 끝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는 반대야. 네가 저 펄리라는 여자를 믿고 있는 거 같아서 일단 협조하긴 할 텐데, 나중에 저 여자가 사고를 쳐도 난 몰라. 난 아는 거 다 이야기했어. 그러니 일이 이상해져도 내 탓 하지 마. 알겠지?”
나도 마냥 펄리를 다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고, 내 우려가 현실이 될 경우엔.
나는 몇 번이고 그래 왔듯, 펄리의 머리를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 신의 그릇인지 뭔지도 분명 귀한 것일 테니 일단 차지해 두면 언젠간 쓸 데가 생기겠지.
호의에는 호의로. 적의에는 적의로. 딱 받은 만큼만 돌려주리라.
“알겠습니다. 충고, 귀담아들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알면 됐어. 그런데 이 김에 충고 하나만 더 해도 괜찮아?”
“뭡니까?”
그녀는 내가 꾹 눌러 주었던 손바닥을 매만지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너는 네 사람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친절해. 분명, 네 성격상 별생각 없이 호의로 하는 행동이겠지만. 받는 입장에선 오해하기 딱 좋은 행동들이라고. 나는… 이런 문제로 곤란해지고 싶지 않아. 알겠어?”
정말이지 두서없는 말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냐, 됐어. 나는 돌아가서 펄리라는 여자 감시나 할게. 이상한 게 보이면 바로 이야기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그렇게 지젤이 선실로 떠나갔다.
사실, 그녀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는 잘 알았다. 아주 잘.
내 호의가 이성에게 무슨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정도야 뻔한 일이었다. 나는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니까.
하지만 당장 바뀔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일행은 어찌 보면 내 순수한 호의에 의해서 묶인 이들이었다. 그래, 오롯이 나만을 구심점으로 뭉친 일행.
나는 전능하지 못했기에 아직 타인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 비겁하다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나는 일행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지금의 내 태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언젠간 분명 지금 외면하고 유예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답을 해 줘야만 할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아앗!!! 졌다!!! 다들 한 판 더 해요!!! 딱 한 판만 더요!!!”
“다 잃었으면 빠지는 게 어때요? 이제 저랑 펄리랑 승부를 봐야 하거든요.”
“아, 아직 지지 않았어요!!! 않았다고요!!! 조금만 주세요! 다키아 님… 아니, 다키아! 제발 자비를!”
자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쟈멜이 파닥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웃고 있는 다키아나 카디쇼도. 그리고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내 가장 소중한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끼익.
“앗! 마르낙 사제님 왔다! 마르낙 사제님도 왔으니까… 마르낙 사제님도 끼워서 처음부터 다시 새로 해요!!! 응응!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살해살해.’
같이 다 잃은 건지, 쟈멜의 주장에 어머니도 옆에서 참으로 옳은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한 번만 귀여운 속셈에 놀아나 줄까.
나는 쟈멜이 만들어 낸 틈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저도 껴서 새로 한 판 되겠습니까?”
제일 많은 판돈을 가지고 있던 다키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아요.”
“만세!!!”
그리고 이들 또한 내게 무척이나 소중했다. 내가 직접 엮어 온 소중한 인연들이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행복한 끝을 맞길 작게 바랐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겁쟁이인 데다 욕심쟁이인 내가.
***
펄리가 배 위에서 손을 팔랑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얼른 다녀와! 다녀와! 나는 열심히 뒹굴뒹굴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있을게!”
어젯밤, 다 모인 장소에서 들은 펄리의 말에 따르면, 미완성인 신의 그릇이 숨겨져 있는 은신처로 향하는 열쇠는 세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악신의 숭배자가 숨기고 있다고 했다.
누가 무슨 열쇠를 숨기고 있는 건지는 이제부터 알아내야 했지만.
“핫챠! 피데스 도착!!!”
배에서 쟈멜과 어머니가 자기 몸만 한 보따리를 챙겨 들고서 폴짝 뛰어내렸다.
‘살햇?!’
쟈멜을 따라 뛰어내린 어머니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린 걸 재빨리 붙잡았다. 어머니가 살았다며 한숨을 폭 내쉬는 사이, 다키아가 배에서 내려왔다.
“그럼 가 볼까요?”
쟈멜이 반짝이는 눈으로 다키아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다키아가 말하는 대로 가면 이거 다 비싸게 팔 수 있는 거 맞죠?”
“제가 데리고 왔다고 말하면 분명 후한 값에 매입해 줄 거예요.”
“만세!!! 다키아 만세!!!”
로클레스 상단, 다키아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북제국 유명 상단의 본부가 바로 이곳 피데스에 있었다.
거기에 물건을 처분하는 김에 로클레스 상단의 인맥을 이용해서 나름의 조사를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내가 어머니의 보따리를 받아 드는 사이,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건지 몰라도 쟈멜은 묵직한 보따리를 어깨에 가볍게 들쳐메고 앞서 걸어 나갔다.
“금화가 날 부른다!!! 이얏호!!!”
“멈춰!!! 왜 이렇게 뛰어가는 거야!”
“왜…?”
쟈멜이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뒤이어 내린 지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여기 길은 알고 그렇게 뛰어가는 거야?”
“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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