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84)
184 화 레클레스.
레클레스.
빠가각.
손에 든 검을 휘두르려다 생각을 바꿔 손으로 직접 사슬을 붙잡았다. 조금 힘을 줘 당기자 벽과 연결되었던 이음매가 뜯겨 나가며 레클레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받아 줄까도 싶었지만, 그 정도로 친한 상대는 아니기에 굳이 그러지 않았다.
“끄으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레클레스의 몸 상태는 가벼운 찰과상들을 제외하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마 아직 제대로 된 고문을 받기 전이었던 듯했다.
나는 그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가볍게 손을 뻗어 방금 죽인 사내의 신성을 수확했다. 사내의 몸이 녹아 내려가며 내 몸으로 신성이 스며들어 왔다.
[신성 : 21299 -> 21399]어느새 권능 두 개 치의 신성이 모였지만 임페트로가 내게 주문한 5만의 신성이 되기엔 아직 채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마치 반만 차 있는 물컵과도 같은 상태인가. 어찌 보면 많고, 또 어찌 보면 적게 느껴지고.
마침내 레클레스가 무거운 몸을 다 일으켰다. 그는 초췌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 풀어주기는 하는군. 일단, 고맙다고 하겠네.”
“혹시 괜한 오해는 안 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제가 굳이 당신을 옭아매던 것을 풀어준 건, 언제든지 그 목숨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레클레스는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듯 찬찬히 내 몸을 훑었다.
“분위기가 낮과는 많이 다르군.”
“낮보다는 예의를 덜 차리고 있긴 합니다.”
나는 슬쩍 내가 지나온 복도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아 이곳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도달하긴 했지만, 방금 죽인 스벤이 말하기론 이 하수도 관리 시설엔 내가 죽인 셋 말고도 더 많은 악신의 숭배자들이 숨어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체 내가 납치된 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가? 납치되고 나서 불과 세 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을 텐데…?”
뒷조사를 하다가 얻어걸린 것에 불과했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질문은 제가 먼저 합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거든, 나중에 제가 허락하면 물으시지요.”
“뭐, 그럴 만도 한가.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딱 하나만 묻겠네.”
좋게 말하면 담대한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극히도 뻔뻔한 태도. 레클레스는 한 나라에서 손으로 꼽히는 상단을 운영하는 자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조건을 내걸어 왔다.
찌를까. 급소를 피해서 찔러 두면 당장 죽지는 않을 텐데.
내가 검 자루를 매만지자,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레클레스가 말을 덧붙였다.
“내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거네. 혹시 오는 길에 나처럼 갇혀 있는 다른 사람을 보진 못했는가?”
“갇힌 건 시체들뿐이었습니다. 전부 죽은 지 오래되어 보였으니 그 시체가 당신의 가족일 확률은 낮다고 봅니다만.”
“그렇군. 좋네. 뭐든 물어보게. 여기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답해 주겠네.”
일단, 이 남자의 말을 마냥 믿을 수는 없겠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내가 알아서 적당히 걸러 들으면 되니까.
“이곳엔 왜 갇히신 겁니까?”
“어디까지 알고 왔나? 거기서부터 설명해 주겠네.”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레클레스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날을 슬쩍 움직여 살갗을 베어 내자 새하얀 검날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자꾸 묻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하십시오. 신중하게.”
순순히 이쪽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많이 안다고 착각할수록 그는 말을 신중하게 고를 것이기에.
“알겠네. 내 처음부터 다 설명하지.”
레클레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처음이라면 그때겠지. 다키아 공녀님의 지원을 받아 이곳 북제국으로 내려온 그날이 바로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으니 말일세. 그건 절대 잊지 못할 은혜였네. 암. 그렇고말고.”
그는 감회에 젖은 듯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것이 정말 추억을 회상하는 행동인지, 그게 아니라 다키아의 동료인 내게 자신의 무해함을 내보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곳 북제국으로 넘어왔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외지인인 내가 이 나라에 기반을 마련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지. 차별과 냉소 속에서 조금씩 기반을 잡아 가던 나날 중 정말 우연히 내게 기회가 찾아왔네. 그 기회는 분명 독을 품은 성배였지. 언젠가 내 목을 졸라 올지도 모르는 그런 독이 든 성배.”
나는 그가 말하는 기회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비호를 받는 어용 상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겁니까?”
레클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어용 상인을 모집하는 공고가 났기에 내가 직접 지원했네.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발표가 나니 내 이름이 떡하니 붙어 있더군. 처음엔 무작정 기뻐했지만, 기쁨이 가시자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더군. ‘어째서 나지?’ 하는 의문이 말일세. 당시 나와 경쟁하던 지원자들은 그때의 내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만큼 거대한 상단들이었네. 지금이야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뒷조사를 진행했네. 그리고 실패했지.”
“실패했다?”
“그래, 실패. 후우. 벽에 매달려 있어서 그런가. 조금 서 있기가 힘들군.”
깊은 한숨이 뒤따랐다. 그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주저앉아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시 내가 풀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사라졌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내 침실로 황제의 거미들이 찾아왔지. 그들은 언제든 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고하며 다시는 쓸데없는 일로 힘 빼지 말라고 내게 경고했네. 나는 간신히 용기를 쥐어짜 내 물었지. 어째서 나인 거냐고. 그러자 그들은 무척이나 쉽게 대답해 주었지.”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그냥 네가 외지인이어서다.’라고.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문장이었네. 어째서 외지인이어야 하는가. 아마도 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덜한 자를 고르기 위한 거름망이었겠지. 또 외지인인 편이 적당히 치우기도 쉽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여튼, 나는 괜히 뒤를 파 볼 생각을 멈추고 어용 상인으로서 시키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네. 뒤를 알아낼 기회는 분명 다시 찾아올 테니 말일세. 그렇게 몇 년이 흘렀지.”
레클레스는 다시 한번 침을 삼키고 말을 골랐다.
“그동안 나는 내가 가진 권한을 십분 이용해서 나름의 수완을 발휘했네. 이래 보여도 나름 재주가 있는 편이라, 내 덕에 북제국은 금전적으로 꽤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지. 공을 세움에 따라 내 사회적 지위도 덩달아 올라갔고. 그러니 자연스레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 자네는 알고 있나? 이 나라의 황제가 바로 악신의 숭배자들을 후원하는 뒷배 중 하나라는 사실을?”
당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역시 알고 있었군. 이 장소에 도달할 정도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네. 이곳은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들 중 하나니까.”
“계속 설명해 주시죠.”
“알겠네. 여튼, 나는 이 나라의 황제가 악신의 숭배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무척 놀랐네. 새로운 사실을 깨닫자, 내게 떨어지는 명령이 완전 다르게 느껴지더군. 내가 공급하는 모든 물자와 옮기는 상품들. 그것들이 아주 음험한 계획의 일부분이었던 것일세. 그리고 그 계획의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 쓸모를 다한 내 목숨이 위태로울 거란 사실은 분명했지. 당연히 가만히 앉아서 당해 줄 순 없었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레클레스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그래서 몰래 준비했네. 여기서 쌓은 모든 기반을 모국인 북부 왕국으로 옮길 준비를 말이야.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일을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네만… 결국, 이렇게 내 계획을 들켜서 여기 갇히게 된 거네.”
뭐야. 그럼 다키아가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해서 여기 갇힌 게 아니었던 거네.
“저희가 부탁한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내가 이곳을 몰래 뜨는 날 넘기려고 했네. 사실, 계획의 실행일까지 며칠도 채 안 남았던지라 자네들에게 줄 정보는 전부 정리해 뒀지. 바로 이 머릿속에 말일세. 이곳에서 날 꺼내주기만 하면 정말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해 주겠네. 단 하나도 빠짐없이.”
그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정말 몰래 뜨기 전에 모은 정보를 우리에게 넘겨주려던 것일까 하는 당연한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레클레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콩콩 쳐 댔다.
“생각해 보게. 다키아 공녀님의 이르멜 가문은 북부 왕국에 넷밖에 없는 대영주 가문일세. 북부 왕국에서 새로운 기반을 잡으려는 내겐 다키아 공녀님의 호의가 당연히 필요하지 않겠나? 거기다 나는 정의롭다고는 자부하진 못하지만, 은혜 하나만큼은 잊지 않는 사람일세. 그래서 나는 이 나라를 떠날 때, 공녀님과 자네들에게 같이 이 나라를 떠나자고 권유할 생각이었네.”
그는 처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돌들만이 가득한 감옥을.
“이 나라는 이미 글렀네. 북제국의 황제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네만. 그가 바라는 것이 악신의 숭배자들의 이해와 일치한 이상, 가까운 시일 내로 이 나라에 엄청나게 커다란 재앙이 들이닥칠 게 분명하네. 그 재앙은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을 집어삼키고 퍼져 나가겠지. 그러니 우리는 할 수 있을 때 이곳에서 도망쳐야만 하네. 지금 당장.”
솔직히 나는 이 노련한 사내의 마음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확신이 가질 않았다.
정말 우리에겐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는 어디까지 알고, 어느 정도까지 악신의 숭배자들을 지원했나? 사실,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비인외도의 수단을 사용하며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가?
정말 그는 악한 이가 맞는가?
사람은 다면적이고, 누군가에게 선인인 자가 어떤 자에겐 불구대천지의 원수일 수도 있는 법.
검을 쥔 손이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무작정 죽이는 건 무척 간단하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기에. 게다가 어찌 됐건, 다키아는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으니까.
“따라오십시오. 다키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레클레스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뒤에 따라붙은 레클레스가 작게 속삭여왔다.
“들키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 하네. 이곳 하수 처리 시설에는 이 나라에 숨어든 악신의 숭배자들을 지휘하는 세 명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가 있다네.”
지휘하는 세 명의 우두머리? 그러고 보니 펄리의 말에 따르면 신의 그릇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열쇠 조각이 세 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우두머리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름 대신 별명으로 주로 언급되네. 통칭 ‘금화’, ‘마개’, ‘발판’이라 불리는 자들인데,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금화’는 아비디타스 상단의 상단주로 직접적으로 악신의 숭배자들에게 지원을, ‘마개’는 이곳 제국 하수 처리 시설에 은신한 자들의 지휘를, ‘발판’은 제국의 황실 내부에서 황제와 소통을 한다고 알고 있네.”
나는 마음속 메모장에 금화, 마개, 발판이라는 세 별명을 적어 넣었다.
“그런데 ‘발판’은 누구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레클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둘과 달리 그는 누구인지 특정해 내지 못했네. 거기다 그들이 다가 아니라네. 나는 최근에 그 세 우두머리가 동시에 모시는 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
아마도 우두머리 세 명이 모시는 자라는 게 리베라티오의 여섯 선지자 중 하나겠지. 바로 이번 신의 강림을 주도하는 선지자.
레클레스를 데리고 내가 셋을 죽였던 관리실에 도착하자, 멀리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내가 죽인 셋과 교대하려는 근무자일 게 분명했다. 저들이 이곳에 닿도록 내버려 두면 전 근무자들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겠지.
나는 내가 내려왔던 계단을 가리켰다.
“따라 올라가서 복도를 쭉 걸어가시면 다키아와 제 동료들이 있을 겁니다. 가시는 길에 최대한 인기척을 내면서 걸어가십시오. 몰래 다가갔다간 공격받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키아를 만나거든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고하십시오.”
“자네는…?”
“지금 오는 교대자들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겁니다. 더 묻지 말고 가십시오. 어서!”
내 재촉에 레클레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 위로 뛰어갔다.
“후우.”
벽 뒤에 몸을 숨겨, 기습할 준비를 끝마쳤다.
가끔, 정말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머리가 복잡할 땐, 누군가를 썰어 버리는 편이 뭔가 조금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도.
“근무 끝나면 뭐 할 거야?”
“뭐 하긴, 뒹굴거려야지. 어차피 할 것도 없고.”
“하긴, 진짜 딱히 할 게 없긴 해.”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곧 다가올 적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아주 자그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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