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95)
195 화 장미.
장미.
여인의 뒤를 따라 장미궁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용왕녀가 나를 부른 장미의 화원이라면 오는 길에 힐덴에게 가볍게 몇 마디 설명을 들어 둔 게 있었다.
황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소라고 했던가. 그는 만찬이 끝나고 시간이 남거든 르소나 공주님께 말해서 구경해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 짧게 덧붙였다.
먼저 살짝 보고 괜찮으면 다 함께 구경하러 가자고 해야지.
“이곳에 앉아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장미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이것도 저것도 참으로 비싸 보인다며 감탄하길 잠깐, 어느새 장미의 화원에 도착해 버렸다.
붉은 꽃들만이 한가득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화원에는 온갖 색의 장미들이 어우러져 한껏 만개하고 있었다. 아직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닐 텐데도.
그중 특히나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새카만 장미로 이루어진 화원의 길.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면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여인이 당겨 준 의자에 앉았다. 나를 안내했던 여인은 나타났던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그렇게 화원에 앉아 흐릿하게 풍겨 오는 꽃향길 맡고 있길 한참.
사각사각.
아까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원에 자란 나무들을 손질하는 정원사 말고는 그 누구도 화원을 찾아오지 않았다.
조금 늦네. 하긴, 르소나는 내 동료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키아를 좋아하는 거 같았고.
남매라 외모 취향이 비슷한 건가.
멍하니 화원을 보던 와중, 정원사와 눈이 마주쳤다. 곧,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가위질을 멈춘 그는 목에 두른 천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고서 느릿하게 내게 다가왔다.
얼굴 가득한 주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낡고 해진 멜빵 바지를 보니,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해 왔는지 대충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수십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이곳을 가꿔 왔으리라.
늙은 정원사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무래도 아까부터 멍하니 있느라 자주 눈을 마주친 탓에 내가 자신을 불렀다고 오해한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딱히 용무가 있어서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꾸시는 화원이 무척 아름다워 멍하니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일하는 데 불편을 끼쳐 드려서 송구스럽군요.”
늙은 정원사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름진 두 눈을 끔벅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내게서 이토록 공손한 사과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일하느라 땀을 뻘뻘 흘린 그를 이대로 보내기도 미안해,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는 찻잔 하나를 꺼내 차를 한가득 채워 그에게 건넸다. 다행히 차는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미지근했다.
“이렇게 오신 김에 한잔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찌 제가 감히…”
용왕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던 차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비어 있는 의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잠시 앉아서 제 말벗이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 장미궁은 처음인지라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군요.”
“그리 권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늙은 정원사는 목에 걸친 천으로 꼼꼼하게 땀을 훔친 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주름진 얼굴 위로 보는 사람까지 만족스러워질 정도로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나는 그가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홀랑 마셔 빈 잔에 다시 차를 채워 주었다.
늙은 정원사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역시 땀을 뻘뻘 흘리고 난 다음 마시는 음료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데… 혹시 타국에서 오신 귀족분이십니까?”
매번 입고 다니던 사제복을 방에 벗어 두고 르소나가 준비해 준 예복을 입고 있는 탓에 자그마한 오해를 한 듯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르소나 공주님의 호의를 받아 이곳에 초대받은 사제일 뿐입니다. 그러니 말을 편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는 노인답지 않게 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과연 사제님이셨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곳을 찾는 귀족분들은 제게 이런 식으로 앉아 차를 마시라고 권해 주시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정원사는 호록 하고 한 모금을 더 넘기곤 말없이 온갖 색의 장미가 만발한 화원을 찬찬히 감상했다.
“사제님,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매번 일하러 오는 저이지만, 색색깔 장미들의 아름다움에 항상 감탄을 내뱉곤 합니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 큰 규모인데도 체계적으로 잘 꾸며진 화원을 보는 건 이 세계로 와서 처음이었다. 다른 정원사들이 딱히 눈에 띄진 않으니, 아마 이 늙은 정원사 홀로 자신의 세월을 쏟아부어 화원을 가꿔 왔으리라.
“정말 훌륭하게 가꿔 내셨군요.”
“하하하! 저는 저 아름다운 정원을 칭찬했건만, 사제님께선 제 노력을 칭찬해 주시는군요.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아름다운 화원이야, 그 누구든 칭찬해 마지않을 테니 저라도 이렇게 정원사님의 노고를 칭찬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달콤하십니다. 사제님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꽃의 꿀과도 같군요.”
그는 여전히 한 줄기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화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거 아십니까?”
“어떤…?”
“저는 화원의 아름다움을 위해 저 장미들의 가지를 칠 때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장미들은 자신들의 살을 제멋대로 잘라 내는 저를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을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우묵한 눈빛만이 남았다.
“기실 장미들에게 있어선 인간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장미의 눈으로 세계를 관조한다면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섭리에 의거해 거역할 수 없는 횡포를 저지르고 있는 존재로 비칠 겁니다.”
주제가 무거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하하호호 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하지만 말씀대로 만약 이곳이 자연이었다면 저리 많은 장미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정원사분께서 열심히 비료를 뿌리고 가꿔 왔기에 저 장미들은 저렇게나 아름다운 꽃들을 한껏 피울 수 있었던 것일 테지요.”
“과연 그 원치 않는 호의를 장미들이 바랐겠습니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화원을 바라보던 늙은 정원사 눈이 무겁게 가라앉아 나만을 또렷이 마주했다.
“답하기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지시는군요.”
“사제님.”
에둘러 곤란하다는 의사를 전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허허롭던 노인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그 자리엔 기이한 무게감이 나를 내리눌렀다.
“만약 사제님께서 화원 속 장미이고, 자신을 멋대로 가꿔 대는 정원사를 몸에 돋아난 가시로 찌를 수 있다면.”
자글자글한 주름. 낮은 목소리. 침전된 눈빛. 그 어느 것도 평범한 정원사의 것은 아니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어 왔다.
“사제님께선 그 가시를 높이 치켜들고 저 드높은 정원사를 찌르시겠습니까?”
“제가 찌른다 한들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오히려 찔린 정원사가 분노해 제 꽃송이를 싹둑 잘라 버리고 말겠지요.”
기묘한 짓누름이 사라졌다. 그제야 노인의 입가로 미소가 번져갔다.
“찌른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히 정원사를 향한 그 선택만은 한 점 의심 없이 스스로 온전히 선택한 결과일 테니.”
“순수한 호의로 꽃들을 아끼는 정원사들도 있을 텐데요.”
“진정으로 아름다운 꽃은 이런 화원에서 곱게 자라난 꽃이 아니라 길가를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들꽃들입니다. 정원사들 없이 스스로 역경과 고난을 겪어 내고 억세게 자라난 들꽃들 말입니다.”
노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낡은 멜빵 바지에서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지금 열지 마시고, 오늘 이곳에서의 만찬이 끝나고 집이라 생각하는 곳으로 돌아가시거든 열어 보십시오. 아마 이곳에서 찾길 바라시던 것이 들어 있을 겁니다.”
역시 이 노인은…
주머니를 받아 가슴팍에 챙겼다. 나는 늙은 정원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체 제게 뭘 바라시고 이러는 겁니까?”
늙은 정원사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과분하리만큼 답해 주었다.”
“제가 아직 부족하다 하면 어쩌실 겁니까?”
“언제나 답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네. 젊고 유능한 사제여. 그리고 내가 나의 답을 알려 준다 한들, 그것이 그대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군.”
“저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또한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잠깐 빠져나온 것이니. 그대도 이만 돌아가게나.”
노인은 그렇게 그답지 않게 터덜터덜 걸어 정원을 가로질러 떠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곧게 선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악신의 사제여, 내 그대에게 더 이상의 질문은 허하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나를 남겨 두고 장미궁 너머 높게 치솟은 황궁을 향해 떠나갔다.
***
복도를 걸어 내게 배정된 방으로 향하던 중, 이곳의 주인과 맞닥뜨렸다.
“대체 어디를 갔었소? 내 그대를 불러오라 사람을 보냈건만 그대에게 배정해 준 방에 그대가 없었다는 이야기밖에 들을 수 없었소.”
가늘게 뜬 두 눈. 용왕녀는 한 점 무거움 없이,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르소나 공주님께서 사람을 보내 제게 화원으로 가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화원에서 르소나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만약 내가 그대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 사람을 보내는 대신, 내가 직접 그대를 찾아갔겠지 않소?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그러고 보니 그렇네. 황금빛 두 눈이 반짝인다. 용왕녀는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거기다 만약 내가 사람을 보냈더라도 그대를 화원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장미궁의 화원은 마음 편히 쉬거나 밀담을 나누기엔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니.”
“어째서입니까?”
르소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그마한 투덜거림을 담아 내게 말을 건넸다.
“그곳엔 가끔 이 나라의 황제가 찾아와 제 손으로 직접 화원을 가꾸니 말이오. 나름 비밀이라면 비밀인지라,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말이오.”
역시 그 노인이 바로 이 북제국의 황제였나.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드높은 정원사와 장미란…
커다란 두 눈이 내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곧,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답을 내렸다. 이 장미궁에서 그녀 몰래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이는 무척 적을 테니 그리 어려운 답도 아니었다.
“역시 그대는 이 나라의 황제를 알현한 것이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해 줄 수 있소?”
“대화를 했다기엔, 몇 마디 나누지 않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래, 단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늙은 황제는 내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기에.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나라의 황제는 드높은 천상의 신들을 혐오하고 있습니다.”
***
“배가 고프면 언제든 찾아오시오. 내 밥 한 끼 정도는 언제든 대접해 드리겠소.”
“정말정말요?”
“정말정말이오!”
“와앗!!!!”
호화로운 만찬이 끝나고, 눈을 반짝이는 쟈멜을 필두로 다들 르소나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이곳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 틈을 타 황제에게 받았던 주머니를 살짝 벌려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건 예상대로의 물건이었다.
내가 찾던 세 조각 난 열쇠의 마지막 파편이 자그마한 주머니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댔다.
이로써 신의 그릇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가 온전한 모습으로 내 손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너무나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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