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02)
202 화 절망(絶望)
절망(絶望)
황제와의 외도?
그러고 보니 스승님께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오셨으니 그간 연애 한두 번쯤은 해보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런 오해를 받으신 겁니까?”
“그걸 전부 다 이야기해주기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단다.”
“간단하게라도 이야기해주시죠. 그리고 자세한 내막은 나중에 따로 날을 잡아서라도 꼭 듣고 싶습니다.”
“흐음…”
스승님은 로브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인 것 같구나.”
“그거야 스승님께서 워낙에 본인 이야기를 안 해주시니 당연히 이 제자는 스승님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란다. 거기다 나는 그리 입담 있는 이야기꾼이 아닌지라, 재미있는 부분도 재미없게 이야기하고 말 게 분명하구나.”
“스승님께서 아무리 재미없게 이야기하셔도 제가 재밌게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편하게 이야기해주시죠. 아, 마침 주제가 주제라서 그런데 혹시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새파란 두 눈이 가늘어졌다. 스승님은 뭔가 께름칙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표정이 무척 짓궂구나. 대체 뭘 물어보려는 거니?”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간 지내오시면서 마음이 맞는 남자분은 없으셨습니까? 예를 들자면 그 뭔가 일이 있었던 전전대 황제라든지요.”
“마음이 맞는 남자…?”
“예. 흔히들 말하는 연인말…”
로브 자락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거침없이 내 이마를 딱하고 후려갈겼다. 골이 울렸다.
“컥?!”
내 머리뼈는 이제 이모탈리움인데, 그 이모탈리움 뼛속까지 울리는 강렬한 딱밤이었다. 겨우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자 스승님의 손은 언제 내 이마에 딱밤을 먹였냐는 듯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걸 겨우 참아냈다.
“방금 그거 진짜 아팠습니다. 겨우 그거 하나 물어봤다고 너무 세게 때리신 거 아닙니까? 연애가 뭐 이상한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 맞는 사람이랑 알콩달콩 지낼 수 있는 거죠.”
평소답지 않게 잔뜩 투덜대자 스승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네 이마에 딱밤을 먹인 건, 네 질문에 농이 한가득 들어있어서란다. 이리 예쁘고 착한 스승님을 너는 꼭 그렇게 놀려먹고 싶은 거니?”
“놀리려는 의도라뇨. 저는 그저 순수하게…”
“아무래도 연이 네가 아직 한 대 덜 맞은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우리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느라 걸음이 지체되자, 앞서 걷던 치안감 브레임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나와 스승님을 번갈아 보았다.
“안 따라옵니까?”
그의 얼굴엔 너희 진짜 물건을 되찾고 싶어서 치안청까지 습격한 사람들이 맞냐는 의문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걸으면서 마저 이야기하자꾸나.”
“예.”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하고, 채 몇 발자국을 걷기도 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럽게도 이 스승님은 연애니 사랑 같은 그런 개념은 아직도 잘 모르겠단다. 어렸을 땐, 스스로의 감정을 도려내는 법만을 배운데다 커가면서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자연스러워진 덕에 딱히 감정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단다.”
“감정을 도려낸다니요…? 어린아이한테 그런 몹쓸 짓을 강요하는 어른이 있었습니까?”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거지? 그냥 장난삼아 물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아직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라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구나. 게다가 그 시절 이야기는 이렇게 걸으면서 편히 할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란다. 연아, 오늘은 백 년 전 북제국 황제의 이야기로 참아주련?”
내게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내보인 스승님의 얼굴 위로 드러난 감정은 내가 쉬이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저 정말로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어 나름의 정리가 필요하신 것 같았다.
“스승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일단을 알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렴.”
“그 몹쓸 어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이야기를 안 듣고는 이 제자, 오늘 밤 편히 잠자긴 그른듯싶어서 감히 조심스럽게 물어보겠습니다.”
“다 죽였단다.”
“예?”
무척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대답해서 나는 순간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스승님은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이 한 번 더 아까와 같은 답을 하셨다. 조금의 부연설명을 붙여서.
“내가 직접 다 죽였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이젠 100년 전 황제의 이야기 따윈 어떻게 되든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시기로 약속하신 겁니다?”
스승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으며 손을 쭉 뻗어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단다. 걱정 말려무나. 그리고 100년 전 황제 이야기는 너도 들어두는 편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 이야기에서 네게 줄 선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
“선물은 귀한 검이 아닙니까…?”
“맞단다.”
“시간이 묵을수록 가치가 늘어나는 건 포도주 같은 것들뿐이라 여겼는데, 백 년 전 검이 귀하다니 이거 굉장히 궁금해지는군요.”
상식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검 같은 무기들은 제 가치를 잃을 뿐이었다. 굳이 예외를 두자면 이모탈리움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이 있겠지만.
스승님의 고운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시작은 여느 때와 같이 한가지 의뢰였단다. 연이 너도 알다시피 평소에 나는 교단에서 이런저런 한직들을 맡아가며 조용히 지내는 게 보통이란다.”
확실히 스승님이 아무것도 안 하며 지내긴 했지.
“하지만 가끔은 밖으로 나서긴 했는데, 대개 교단에 처리하기 어려운 부탁이나 의뢰가 들어왔을 때였단다. 백 년 전에도 비슷했지.”
“북제국의 황제가 교단에 의뢰를 넣은 겁니까?”
“황제뿐만 아니라 북부 왕국의 왕도 함께였단다.”
왕과 황제가 같이 청한 의뢰라니.
“굉장히 커다란 사건이었나 보군요. 왕과 황제가 동시에 의뢰를 넣을 정도면.”
“사건이 크기도 했지만, 제국과 왕국의 국경지대를 오가며 발생한 사건인지라 조금 문제가 복잡했었단다. 거기다 사실은 나를 부르기 전에 다른 사제들을 불렀다가 그들이 모조리 전멸해버리는 일도 했었고.”
사제가들이 모조리 전멸? 그 정도로 큰 사건인데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대개 범인은 둘 중 하나였다.
“악마나 악신의 숭배자가 관련된 일인가 보군요.”
“맞단다. 100년 전 일의 경우엔 악신의 숭배자 쪽이었지. 들은 이야기지만, 첫 토벌 땐 왕국과 제국이 서로 경쟁하듯 자신의 기사들을 투입했다더구나. 국경을 혼란스럽게 하던 악을 타도하고 자신들의 위세를 증명하려 했었지. 하지만 첫 토벌대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멸해버리자 상황이 바뀌었단다.”
자국의 힘을 과시할 기회가 아닌 폭탄 돌리기가 되어버렸단 이야기인 건가.
“토벌대의 전멸 소식에 왕국과 제국의 달인들은 서로 나서서 자신이 그 극악무도한 악신의 숭배자의 목을 베어오겠노라고 했지만, 왕국과 제국은 허락하지 않았지.”
“혹시라도 달인마저 잃을까 싶어 그런 거군요.”
“그렇단다. 덕분에 두 번째 토벌대는 무척 더디게 모였단다. 그렇게 두 번째 소집을 의뢰받은 성화교 교단에선 새로 차출할 사제들을 선발하는 데 곤란함을 겪고 있었단다.”
“그래서 스승님께 까지 그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겁니까?”
스승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조심스럽게 의사를 물어오기에 나는 늘상 얻어먹는 공짜밥의 은혜도 갚을 겸, 흔쾌히 알겠다고 하고 길을 나섰단다. 그렇게 내가 토벌대에 합류했을 땐,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지.”
“악화라뇨?”
“첫 번째 토벌대를 전멸시킨 악신의 숭배자가 이젠 정말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과격한 행보를 이어나간 거지. 그 결과, 국경지대의 도시 중 여섯이 통째로 전멸해버렸단다. 단어 그대로 단 한 명조차 살아남지 못하고.”
내가 본 바로는 악신의 숭배자들이 도시의 인간들을 학살할 땐, 나름의 필요나 쓸모가 있어서였다. 여섯이나 되는 도시의 사람들을 통째로 바쳐서 뭔갈 했다면 그건 이미 평범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황제와의 외도 오해 따윈 어찌 되든 좋았다. 그 일이야 스승님의 미모가 워낙에 흔치 않은 미모인 탓에 벌어진 일이겠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스승님은 무척이나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어쩌긴 찾아가서 목을 베어버렸단다. 중간중간 많은 이들이 죽긴 했지만.”
“…”
내가 아무 말을 않자, 스승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니?”
“저는 동료 간의 신의, 협동 같은 영웅서사시 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어째서 마실 나가서 감 하나 따오듯이 목을 벴다고 결과만 달랑 이야기하시니 아주 김이 빠집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이야기꾼이 아니란다. 그리 재미없을 거라 했잖니.”
“그래도 좀 더 과정을 이야기 해주…”
“다 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브레임이 반황제파가 훔친 물건들을 놓아두었을 거라 추측한 장소에 도착해버렸다.
높다란 담장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커다란 대저택. 넓은 마당엔 잘 가꿔진 꽃들과 곧게 뻗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좁은 골목을 그리도 굽이굽이 돌던 것에 비해 도착한 장소는 어느 귀족가의 대저택이라. 빙빙 돈 건 결국 행적을 노출하는 걸 최소화하려고 그랬던 건가.
그는 멀찍이 보이는 저택을 보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자세한 설명을 하려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너희는 물건만 되찾으면 될 뿐이니 부연설명은 필요 없지 않은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별로 안 궁금했다. 사실, 저 정도 크기의 저택이면 굳이 브레임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그 주인을 알 수 있기도 했고.
아마 반황제파에 가담한 귀족 중 하나가 자신의 저택을 제공한 거겠지.
“뭐, 그렇긴 하군요. 그럼 그 말씀대로 어서 물건이 있는 장소로 안내나 해주시죠.”
“…따라와라.”
그가 열쇠를 꽂아 열고 들어간 것은 저택이 아니라 저택 맞은편에 위치한 삼층짜리 건물이었다. 브레임이 익숙한 발걸음으로 건물의 외벽을 조작하자 벽이 갈라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아까 보았던 저택으로 통하는 게 분명할 기다란 복도가 우리를 반겼다.
“여기서부턴 떠들지 마라. 아마 앞에 보초가 있을 거다. 내가 알아서 잘 설득할 테니 너희는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
“걱정 마십시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옆에 서 있는 스승님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허튼 짓거리를 해봤자 다치는 건 당신이 속한 조직일 뿐일 테니.”
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하면서 불길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피 냄새였다.
“연아.”
“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복도를 쭉 걸어가자 예상대로 목 없는 시체 둘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를 본 브레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건 대체…?”
“음.”
프리디야 스승님은 어느새 시체 옆에 다가가 머리가 잘린 단면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만도 같구나.”
“예?”
스승님은 말없이 자신의 애검 ‘절명’을 뽑아 내보였다. 그 푸른 검날은 어느 때보다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연아, 아까 이 스승님이 했던 말을 기억하니? 여섯 개의 도시가 몰살당했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자는 여섯 개의 도시를 바쳐 네 덩이의 불길한 광석을 만들어냈단다. 사람들은 그 광석에 흉석(凶石)이란 이름을 붙였지. 나는 그자를 죽인 공로로 네 개의 흉석을 모조리 넘겨받았단다. 나는 그 네 덩이의 푸른 광석으로 그자와 싸우다 부러진 검을 대신할 검 세 자루를 만들었지.”
하얀 손가락이 푸른 애검을 톡톡 두드렸다.
“바로 이 ‘절명(絶命)’과 물수리 호에 두고 온 대검 ‘절체(絶體)’, 그리고 마지막 한 자루 ‘절망(絶望)’을.”
여섯 개의 도시를 삼키고 태어난 광석이라니, 듣기만 해도 불길했다.
“그 검들 설마 옛날 신화 속에 나오는 마검 같은 겁니까? 막 소유자를 이지를 빼앗고 조종한다든지 그런 거요.”
“만약 심지가 굳지 못한 사람이 그 검을 들면, 검에 조금 휘둘릴 수도 있긴 하단다.”
마검 맞네. 완전히 마검 맞네!
스승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뽑아든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둘 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을 걸 보니, 검이 정말 여기 있긴 한 것 같구나. 자, 어서 검을 되찾으러 가자꾸나.”
“설마 했는데… 역시 그 마검이 바로 제 선물이었군요! 그거 받고 제가 잘못되면 어쩌시려고 그런 선물을 준비하신 겁니까?!”
푸른 두 눈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이 어여쁜 스승님이 연이 네 옆에 있는 뭐가 그리 걱정이니. 그리고 이것 보렴.”
스승님은 무척 깨끗하게 잘린 목 단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검이란 건 원래 잘 들기만 하면 명검인 법이란다. 따라오렴. 연아. 어서 네 검, 절망(絶望)을 되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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