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15)
215 화 간만의 호의
간만의 호의
또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고, 르소나와 바티스는 다시 교착상태로 돌아왔다. 겨우 진정하고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은 르소나. 그녀의 황금빛 두 눈은 아직 채 식지 못한 흥분으로 일렁였다.
“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지, 진짜!”
또 한 번 목을 졸린 탓에 바티스는 겨우 자그마한 목소리로 저 한마디를 내뱉고는 연신 켈록이며 자신의 목을 다독였다.
르소나는 그런 자신의 오빠를 지그시 노려보며 물 한 잔을 거칠게 마셔 넘기곤 인상을 찌푸렸다.
“오라버니가 말 같은 말을 해야 이 동생이 참고 들어보지 않겠소? ‘기부’라는 명목으로 돈 몇 푼에 자신의 비늘과 발톱을 팔아치운 용이라니… 정말이지 나는 할 말을 잃었소.”
쾅!!!
거칠게 탁자를 내려친 바티스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빽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판 게 아니라니까! 진짜 나는 선의로 내 발톱을 내어준 거라고!”
르소나는 황금빛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 기부에 대한 사례금이 없었어도 오라버니가 발톱과 비늘을 기부하셨겠소?”
“…”
무어라 궁색한 변명을 하려던 바티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허튼소리로 들릴 게 분명할 걸 깨달은 것인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여느 남매싸움이 그렇듯 한껏 타올랐던 불화는 이내 불편한 침묵이 되어 내려앉았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말문을 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그런 침묵.
경험상 결국 이런 때는 나 같은 제 삼자가 나서는 게 가장 해결이 빨랐다. 둘이 서로 마지못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용왕녀에게 빚을 하나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흠흠.”
나는 잠깐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선은 바티스부터. 누가 뭐라든 이번 일의 속사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은 당사자인 바티스일테니.
“바티스 왕자님.”
“…왜?”
그는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이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는 게 적잖이 부담스러웠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자그마한 반가움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한가득 실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만 설명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까도 그렇지만 바티스 왕자님께서 여유가 없으셔서 앞뒤를 잘라 이야기하신 것 때문에 오해가 더욱 깊어진 면이 적잖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바티스는 샛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척하면서 르소나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동생의 눈치를 몇 번 살핀 그는 몇 번 입을 우물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는 아까처럼 내가 말하는 데 르소나가 혼자 갑자기 흥분해서 목을 조르지 않겠다고 다짐만 하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마든지 설명해 줄 수 있는데.”
“바티스 오라버니가 적당히 어이가 없는 말을 해야 내가 참지 않겠소? 상상도 못 할 말같잖은 이야기를 내뱉어서 지리멸렬하게 스스로를 변명하려 하니 이 내가 어찌 흥분하지 않고 참을 수 있겠소?”
샐쭉하게 째려보던 르소나가 결국 바티스의 말을 참지 못하고 톡하고 쏘아붙이자 바티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 한껏 너그럽던 르소나도 자신의 가족인 오빠 앞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이번 일에 화가 많이 난 건지는 몰라도 약간 어른이 아니라 아이처럼 일에 대처하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 내쉬고 두 남매의 사이를 중재했다.
“르소나 공주님.”
내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르소나는 자신이 방금 쏘아붙인 태도가 어른스럽지 못한 걸 깨달은 듯했다. 그녀의 하얀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왜 부르시오.”
“어찌 됐건 바티스 왕자님의 이야기를 한 번은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르소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바티스를 바라보았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끊고 목을 조르지 않겠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르소나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자 바티스는 기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뭐,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이야기를 못 해줄 것도 없지.”
“…”
주객전도된 한마디에 재빨리 르소나의 표정을 보니, 르소나는 순간 튀어나오려던 험한 말을 겨우 삼킨 듯했다.
나는 르소나의 인내심에 자그마한 경의를 보내고 바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티스는 모두가 자신의 입에 집중하자 그것이 무척 기꺼운 것인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
용왕국의 삼왕자 바티스는 심심했다. 그것도 그냥 심심한 것이 아니라 무척 심심했다. 정말 격렬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을 정도로 심심했다.
늘 자신의 말 상대를 해주던 힐덴은 어느새 낮 동안에는 르소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용왕녀로서 그녀의 일을 도와주느라 무척 바빴다.
힐덴은 그에게 자신이 없어도 다 바티스 왕자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니, 바티스 왕자님께선 그냥 사고 치지 말고 이곳 장미궁에서 조용히 지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하지만 항상 시끌벅적한 곳을 찾아다니고 여기저기 쏘다니길 좋아하는 바티스로서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고로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바티스는 힐덴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듣는 시늉을 하는 터라, 그는 최근 거의 몇 주를 힐덴이 하란 대로 조용히 장미궁에 처박혀서 보냈다.
힐덴은 답지 않게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용왕자를 보며 드디어 저 철없는 용왕자가 철이 들었구나 감탄하며 자신의 일을 늘려버렸다.
그 결과, 유일한 말 상대를 더욱 오래 잃어버리게 된 바티스의 얄팍한 인내심도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는 고양이귀 수인족 하녀를 보곤 슬쩍 말을 꺼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어?”
“없습니다.”
사무적으로 짧게 답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혹시 바티스 왕자님께서 계속 누워계실 의향이시라면 침실 청소는 오후에 다시 와서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일어나서 잠깐 나가지 뭐.”
평소의 바티스보다 훨씬 친절한 답변이었지만, 그로서는 사실 이곳 장미궁 하녀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용왕국에서 르소나가 엄선해서 데리고 온 하녀들로 그녀의 총애를 한껏 받는 이들이었다. 자연히 르소나가 북제국에서 머무르는 장미궁에서 얹혀사는 처지인 바티스로서는 저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 응. 고생해.”
바티스는 무심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방청소를 시작하는 고양이귀 하녀의 등을 보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짜 심심하네.”
평소라면 다른 하녀에게 부탁해서 가벼운 먹거리를 챙겨서 장미궁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서 적당히 시간을 때울 테지만, 예쁘고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매일 보다 보면 자연히 질리게 되기 마련이었다.
“잠깐 산책만 갔다 오자. 진짜 잠깐 여기저기 구경만 하다 오는 건데 별문제 생기겠어?”
결국, 그는 힐덴이 그토록 누누이 벗어나지 말라던 장미궁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장미궁 정원에 몰래 묻어둔 비상금 금화 한 닢까지 챙겨서.
“어, 바티스 왕자님…? 진짜 바티스 왕자님이다!!!”
그렇게 장미궁을 벗어나 북제국 황궁 바깥으로 향하던 그를 누군가 불렀다.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 무척이나 반가움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라 바티스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황궁에선 저렇게 자신을 반겨줄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머리까지 풀 눌러쓴 로브. 그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는 나름 관리를 한듯 보였지만, 그녀의 눈가에 깊이 자리 잡은 다크서클과 살짝 푸석해 보이는 피부는 그녀가 마냥 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와, 용인족을 실물로 보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그녀는 피곤이 한가득 담긴 눈을 반짝이며 훌쩍 다가와서는 바티스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진짜 인간형일 땐 완전 감쪽같이 인간 같네요!!! 용인족은 수인족 중 유일하게 완벽한 의태를 할 수 있는 종족이라는 말이 진짜군요!!! 앗?!”
여인은 홀로 화들짝 놀라며 바티스의 손을 잽싸게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타국의 왕족분께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여인이 연신 사과하는 동안, 바티스는 여전히 반쯤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느낀 타인의 손길은 무척이나 보드라웠다. 최근 누군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대체 언제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뒤늦은 소소한 행복함이 그의 가슴 속에 사륵사륵 피어났다. 바티스는 미소를 미처 감추지 못한 채 허리를 숙인 여인을 일으켜세웠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정말 죄송합니다… 용인족을 이리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네요…”
“뭐,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사과는 그쯤 해둬. 그런데 누구…?”
“앗!”
그제야 여인은 제 소개를 깜박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두 눈을 끔벅였다. 그녀는 잽싸게 자신이 누구인지 바티스에게 소개했다.
“저는 제국 이종족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 페리스라고 해요! 부끄럽게도 제 전공은 수인족분이고요!”
바티스는 씨익 웃었다.
“그래서 날 보고 그리도 흥분했구나? 나는 정말 보기 힘든 용龍이니까.”
“맞아요!!!”
페리스는 다시금 두 눈을 반짝이더니 바티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바쁘세요?”
바티스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작금의 상황을 즐기기 위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건 왜 물어?”
여인은 볼을 발그레 붉히며 눈을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 저랑 차 한잔해주실 시간이 있으신가 싶어서요.”
문득, ‘저 없이 외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삼가십시오.’라고 신신당부하던 힐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지만 바티스는 콧김을 한 번 흥하고 쉬는 걸로 힐덴의 목소리를 가볍게 떨쳐냈다.
그는 근래 지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환히 지으며 고개를 잽싸게 끄덕였다.
“좋아.”
“와, 정말요!”
“이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줄 테니 어서 안내해보라고!”
“그럼 저희 연구소 쪽에서 차 한잔해요! 제가 엄청 잘 대접해드릴게요!”
심심한 바티스는 그를 반기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래! 어서 가자!”
***
황제의 호위, 솔도스는 여태 타국의 왕족에게 말을 꺼내는 것을 조심하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아주 제대로 호구 잡혔군.”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호구 잡히셨군요.”
르소나는 자신의 눈가를 매만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초대에 좋다고 따라가다니 바티스 오라버니는 정말…”
“다 조용히 해!!!”
벌떡 일어선 바티스의 샛노란 눈이 세로로 갈라졌다. 용왕자는 용의 눈을 빛내며 열변을 토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거지! 페리스는 정말 날 대접해주고 싶어서 데리고 간 것뿐이라고! 또 어쩌다 보니 이야기 주제가 용의 피와 비늘, 발톱으로 흘렀을 뿐이고! 그리고 또 어쩌다보니 그녀가 샘플이 조금 필요하다길래 내가 조금, 아주 조금 내어줬을 뿐이라고! 우리 만남은 매우 순수했어! 정말로!!!”
“피…? 지금 내가 들은 게 아니라면 오라버니께서 그 여인에게 발톱과 비늘뿐만 아니라 용혈龍血도 내어줬다고 했소?”
“그런데…?”
파들파들 떨리는 몸. 르소나의 황금빛 눈이 다시금 거칠게 일렁였다.
“이게 진짜!!! 용혈로 뭘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피를 냉큼 내줘?!”
“히이익!!!”
르소나의 고함에 펄쩍 뛴 바티스가 잽싸게 튀어서 내 뒤로 숨었다.
용의 피. 거기에 무슨 설정이 있었더라? 발톱과 비늘보다 피로 훨씬 크게 화내는 걸 보니 분명 뭔가가 있었다.
“용혈로 대체 뭘 만들 수 있길래 그러십니까?”
“만변萬變을 품은 용의 피는 제대로 된 정제과정만 거친다면…”
르소나는 말을 하다 말고 꾹 입을 닫았다. 그녀는 내 옆에 있는 솔도스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눈을 감았다.
“마르낙,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장미궁으로 오시오. 내 일을 하나 도와주셔야겠소. 그리고 솔도스 경도 시간이 된다면 찾아와주시면 좋겠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등을 돌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우뚝 멈춰선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티스를 째려보았다.
“오라버니는 안 따라오시오? 오늘 외박을 하겠다면 난 말리지 않겠소. 다만, 외박을 하더라도 내일 아침까진 일을 수습하러 장미궁으로 찾아오시오. 안 그럼 내가 오라버니를 찾아내서 아주 죽여버릴지도 모르겠으니까.”
바티스는 눈을 데굴 굴리곤 잽싸게 대답했다.
“오, 오늘은 밖에서 자고 갈게! 내일 아침까진 꼭 장미궁으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마!”
“현명한 선택이오.”
르소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댔다.
“지금 염치없이 따라와서 재워달라고 했으면, 아주 그냥 화병 나서 내가 오라버니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르겠으니.”
그 말을 끝으로 르소나는 거칠게 문을 닫고 떠나갔다.
쾅!
바티스는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슬쩍 말을 꺼냈다.
“혹시 너 지내는 데 남는 방…”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없습니다. 아무 여관이나 잡고 하루 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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