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3)
23 화 이르멜.
이르멜.
또 하나의 적을 갈아버렸지만, 비명은 없었다. 적들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게 분명한 사내들이었다.
‘살해!’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한 명 한 명이 최소 손가락 두 개 이상.
허리를 살짝 뒤로 뺐다. 날카로운 검날이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성이 담기지 않은 이런 공격쯤이야 살짝 맞아주고 적의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카르멘이 진정한 내 정체를 모르는 이상, 굳이 내 몸의 특이성을 많이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밀며 그대로 올려 베서 반격한다. 저번의 엄청나게 잘 싸우는 산적 두목 때와 비슷한 싸움이지만, 그때와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왜애애애애앵!
지금은 내가 바로 장비의 수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
도살자가 거친 비명을 내뱉으며 적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아까 도살자를 정면에서 막으려다 곤죽이 되어버린 동료를 본 적은 감히 도살자를 막거나 흘려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적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렇다면 따라붙으면 끝이지. 육체 성능의 우위를 이용해 물러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다가간다.
“하압!”
도살자가 녀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거칠게 회전하는 톱날이 남자의 몸을 감싼 철판을 갈아내고 그 안에 숨어있던 연약한 속살을 탐했다. 피와 살점이 쏟아졌다.
또 다른 사내가 은밀하게 접근해 내가 자신의 동료를 죽이고 있는 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도살자를 이 남자의 품에서 뽑아내서 휘두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내겐 두 자루의 검이 있었다.
재빨리 왼손을 움직여 서리강철 검을 뽑아내고 휘두른다. 왼손을 사용하는 검술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기에 서리강철 검의 궤적은 무척이나 투박했다. 하지만 내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까앙!
내 검과 충돌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왜애애애애앵!
그리고 도살자는 또다시 남자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남은 건 이제 다섯.
까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카르멘이 있는 곳을 확인하자 머리에 활을 맞고 쓰러진 시체가 하나 보였고, 그 너머에서 카르멘이 두 명의 사내 사이에서 검을 빼 들고 분전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러 가려던 찰나. 나를 확인한 카르멘이 큰소리로 외쳤다.
“적 중 두 명이 마차 쪽으로 달려갔어! 아무래도 상황이 불리한 걸 알고 도망치려는 것 같아! 난 여유가 있으니까 당장 마차가 도망치는 것부터 막아야 해!”
카르멘의 외침을 신호로 이르멜 가의 마차가 빠르게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나는 격렬하게 검격을 나누고 있는 카르멘과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달려가서 마차에 올라탔다간 전투 중인 카르멘과 너무 멀어질 염려가 있었다. 아직 마차가 충분히 빠르지 않은 이때에만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안에 탄 사람이 조금 다칠 수도 있겠지만, 내 동료인 카르멘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도살자와 서리강철 검을 쥔 손을 바꾸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치켜들고 그대로 서리강철 검을 투척했다. 거칠게 회전하며 날아간 서리강철 검이 마차의 뒷바퀴를 부숴버렸다. 중심을 잃은 마차가 기우뚱 거리곤 눈밭 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나무들과 충돌한 뒤에 멈춰섰다.
쿵!
아니, 정확히는 멈춰선 뒤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차가 옆으로 쓰러졌다.
“어, 음.”
검을 던져서 마차 바퀴를 부숴본 건 처음이라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괜찮겠지?
나는 분명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재빨리 눈밭 위를 달려서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 도중에 튕겨 나간 남자는 나무둥치에 머리를 박고 목이 꺾여 있었다.
아직 하나가 남았···.
‘살해!’
마차의 벽을 부수며 검날이 튀어나와 내 심장을 노렸다. 빈틈을 노린 노련한 기습. 나는 왼손을 내밀어 검을 막았다. 검이 왼손을 관통하며 나아가 내 가슴의 한 치 앞에서 멈춰 섰다. 내 피가 눈밭 위로 튀었다.
내가 만약 전사나 기사 같은 근접 직업군을 했으면 방금의 기습도 멋지게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른손에 든 도살자를 무심하게 휘둘렀다. 시동조차 켜지 않은 정지한 톱날이 기습한 사내의 머리통을 뭉개버렸다. 나는 머리가 뭉개진 시체를 대충 걷어찼다.
이걸로 이쪽은 다 정리한 셈인데 카르멘은 괜찮으려나.
이런 내 걱정을 비웃듯, 마침 카르멘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마지막 남자의 목을 베어서 날려버렸다. 역시, 궁수는 팔힘이지.
카르멘 쪽도 정리가 끝난 걸 안 이상, 이 엎어진 마차 안에 묶여있을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차 넘어지는 바람에 많이 다쳤으면 조금 미안한데.
“읍읍읍!”
잠긴 문짝을 손힘으로 뜯어내고 안을 들여다보자, 코끝을 자극하는 묘한 냄새와 함께 꽁꽁 묶인 채로 꿈틀거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목까지 내려오는 선명한 은발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황금과 은이 조화된 그 모습으로 보건대, 그녀는 이르멜 가의 핏줄이 맞았다.
나는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지금부터 포박을 풀어줄 건데, 괜한 반항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가씨 편이거든요.”
묶인 채로 눈알을 데굴 굴린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쓰러진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우선 그녀의 입에 물려 있는 재갈을 빼내 주었다. 재갈이 빼내 지자마자 여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장 이 마차에서 날 안고 빠져나가야 해요! 아직 이 안에는 마취 연기가 가득···.”
나는 그녀를 대충 둘러메고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내 몸은 그런 약물들이 잘 안 들었지만, 굳이 그런 부연 설명을 하기보다는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훨씬 편했다.
“잠시만 가만히 계시길.”
품속에서 다용도 단도를 꺼낸 나는 여인의 팔다리를 묶고 있는 줄을 잘라냈다. 하지만 여인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조금 진정한 여인이 황금빛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저 아직 몸이 안 움직이는데, 지금 진짜 쏠려서 토할 거 같거든요? 제가 하늘을 보면서 활화산처럼 토하는 광경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저 좀 저쪽에 데리고 가서 등 좀 두드려 주실래요?”
“그러죠.”
지극히 논리적인 주장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곤 그녀를 허리째로 들어서 길가로 옮겨둔 다음 등을 두드려주었다.
“우웨에에에엑!”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굳이 그 참혹한 광경을 관찰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카르멘이 내게 속삭였다.
“누군지 들었어?”
“우웨에에엑!”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토하는 것 좀 도와달라는 것밖에 못 들었습니다. 게다가 약물에 취하셨는지 아직 사지를 못 움직이시더군요.”
끊임없이 헛구역질하는 은빛 뒤통수를 확인한 카르멘이 다시 물었다.
“눈은 금안이었어?”
“예. 아무래도 이르멜 가의 아가씨가 맞으신 거 같아요.”
“이, 이제 그만 두들겨 줘도 돼요! 더 두들겨 주면 더 토할 거 같으니까!”
“아, 예. 그런데 혼자 일어나실 수는 있으시겠어요?”
“잠시만요.”
여인은 혼자 몇 번 엉덩방아를 찍더니 기어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일어선 여인을 본 카르멘이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내게 속삭였다.
“참으로 마음이 넓으신 아가씨네.”
“동감입니다.”
‘살(殺)!’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따끔한 불호령을 들으며 나는 카르멘에게 눈짓했다. 여기선 내가 나서는 것보다 귀족인 그가 나서는 게 훨씬 대화가 쉽게 흘러갈 테니까.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카르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서 말을 꺼냈다.
“저는 엔시스 발타스 경의 아들, 카르멘 발타스입니다. 혹시 이르멜 가의 아가씨께서는 저희에게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전히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토닥이고 있던 여인이 나와 카르멘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다키아 이르멜. 미소공(微笑公) 칼토 이르멜의 장녀예요.”
미소공(微笑公) 칼토 이르멜이라면 이르멜 가의 가주 본인이었다. 이 아가씨는 그 가주의 장녀인 거고. 생각보다 더한 거물에 내가 깜짝 놀란 사이, 카르멜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내게 속삭였다.
“그녀가 정말 미소공의 딸, 다키아 이르멜이라면 그녀는 ‘마법사’야.”
마법사는 평민이든 귀족이든 가리지 않고 무작위하게 태어나는 존재였기에, 당연히 대영주 가문에서도 충분히 태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귀족들은 자신의 가문에서 마법사가 태어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나저나 귀족에 마법사라 최고로 무례하기 딱 좋은 조합인데.
나와 카르멘이 긴장하든 말든, 다키아 이르멜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물어왔다.
“절 구해주신 그쪽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딱 보면 사제님이란 건 잘 알겠지만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매일의 삶을 수호하는 유지(維持)의 여신님을 모시는 사제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마르낙이라···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요.”
그녀는 하얀 손을 내게 내밀었다.
“저 지금 걷기가 조금 힘드니까 조금 부축 좀 해주실래요?”
‘살해!!!’
어머니의 격렬한 외침을 꾹 누르며 나는 카르멘에게 눈짓했다. 굳이 마법사와 깊게 얽혀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인 그가 도와주는 게 예의에도 맞았고.
고개를 끄덕인 카르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키아 공녀(公女)님.”
다키아는 새초롬한 눈으로 카르멜을 보곤 조곤조곤한 말로 대답했다.
“수도에 있을 정인(情人)을 생각해서 제가 배려해드린 건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모를 목격자들에 의해서 발타스 가의 ‘검은 들개’와 제가 달라붙어 다녔단 소문이 수도에 퍼질 수 있는데도?”
나와 카르멜은 입을 딱 벌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도 그럴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법사’들이 꺼내기엔 너무 교양이 넘치는 말이었으니까.
카르멘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마르낙, 아무래도 네가 좀 수고해줘야겠는데?”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키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살해!’
가슴주머니가 격렬하게 꿈틀댔지만, 애써 무시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이 주변에서 카르멘과 함께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시체를 거두어 주고 오겠습니다.”
***
대충 파낸 땅속에 열 명의 시체를 묻고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어머니. 이들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살해!!!’
제멋대로 품에서 뛰쳐나온 어머니가 소녀의 모습으로 화해서 내게 양손의 중지를 들어 보였다. 화나면 날뛰는 대신 조용히 중지를 들어 보이라는 내 부탁을 잘 들어주시는 게 무척이나 기꺼우면서도 막상 두 개의 중지가 나를 향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어머니, 손가락은 접어주시고, 얼른 다시 제 품으로 돌아오시지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 어머니가 중지만 편 손으로 내 뺨을 꾹꾹 찔렀다.
‘살해!’
“네, 어머니 말대로 감금된 아가씨를 구하는 건, 괜한 오지랖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살해!’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 좀 그만하고 좀 더 이기적으로 살라는 것도 분명 맞는 말씀이십니다.”
나는 여전히 중지를 치켜든 어머니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이득은 제가 알아서 만들어내면 됩니다. 그러니 혹시 제가 손해만 볼까 봐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제가 어머니를 믿는 만큼 어머니도 저를 믿으시지 않습니까?”
‘살…해…’
일단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내 품에 머리를 파묻은 어머니가 은은한 빛과 함께 손으로 화했다. 나는 소중히 손을 품에 넣고 다시 기도했다.
“이들의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어머니.”
내가 만든 무덤에서 새어 나온 부패의 신성이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신성 : 1241]신성의 수확도 끝냈으니, 이젠 돌아갈 때였다.
***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다키아는 마차의 잔해를 모닥불에 밀어 넣고, 죽은 말의 고기를 구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벌인 범인에 대한 명확한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어요. 아니, 뻔하죠. 이번 납치는 전부 절 눈엣가시로 여기는 제 오라버니, 데르소 이르멜이 벌인 짓이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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