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37)
237 화 꽃밭.
꽃밭.
그릇이 완성되기 직전이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한마디는 ‘드디어.’였다.
지나고 보니 애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이 도시에서 눌러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얼마 안 가서 그릇이 완성될 줄 알았는데.
“그릇의 완성까지 정확하게 얼마쯤 남은 겁니까?”
데스페라시오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저라도 그릇의 상태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기간까진 알기 어렵지요. 혹시 이곳에 상주하는 인원은 대충 몇 명쯤 됐습니까?”
뒤에 서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부엉이 여인이 짧게 답했다.
“열댓 명 정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많은 수도 아니군요. 그렇다면 이거 습격을 당한 곳이 이곳 한 곳뿐만이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
“무슨 뜻이기는요.”
데스페라시오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볍게 말했다.
“말 그대로 동시다발적으로 반황제파의 은신처들이 털렸을 수도 있다는 거죠. 여기 한 곳만 완전히 전멸했다면 모르겠는데, 혹시나 다른 곳들까지 무기력하게 다 털려버렸다면 제가 예상했던 반황제파의 전력 평가를 조금 하향 조정해야겠는걸요.”
“이곳에 있던 사람들, 구출 가능?”
“흐음. 구출이라…”
그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걸어 다니며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죠. 일단 저희는 적들의 아지트 위치를 모르는 데다, 설령 알더라도 그곳까지 쳐들어가기엔 이쪽 쪽수가 너무 적죠. 아마 운이 좋아서 방어를 뚫었을 즈음엔 잡혀간 사람들은 이미 푹 고아져서 뭐라도 됐지 않을까요?”
“포기하란 뜻?”
“그렇죠!”
가볍게 답한 데스페라시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잡혀간 사람들 중에 반드시 구해야만 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나요? 목숨과 바꿔서라도 구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요.”
“없음. 애초에 여긴 돈 주는 고용주일 뿐. 목숨까지 걸 의리는 없음.”
“그럼 여기에서 일하던 사람들보다 좀 더 높은 사람이 숨어있는 은신처도 아시나요? 이번 습격으로 반황제파의 피해 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해두고 싶은데요.”
“알고는 있음. 다만…”
부엉이 여인은 데스페라시오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갈 땐, 저 사제는 동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함.”
“지금 마르낙 사제님 말씀하시는 거 맞죠?”
“긍정.”
나는 안된다고?
“왜입니까?”
“잊음?”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울토르. 기억 안 남?”
울토르? 아, 기억이 났다. 반황제파 소속이면서 ‘어긋난 초침’을 섬기는 사제였던 사내였지. 그는 실론의 유물을 두고 나랑 다퉜었다. 뭐, 정확히는 그것 때문에 다툰 게 아니긴 했지만.
“살아있었습니까? 분명 마력포를 쏴서 마무리했던 거 같은데.”
저 부엉이 여인이 울토르를 들고 튀려는 걸 보고 바로 쏴 갈겼었지.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부엉이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곤 짧게 답했다.
“살아있음. 멀쩡하진 않음.”
“상태가 어떻길래요?”
“사지가 날아간 채로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음.”
“잘됐군요.”
애초에 그는 지젤을 고문하고 우리를 공격하다 죽은 자기 스승의 복수를 하러 온 자였다. 그런 자가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있다는 이야기엔 한 조각의 동정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쪽 은신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울토르를 그 상태로 만든 전 이미 밉보였으니 협상 과정에 얼굴을 안 비추는 게 더 좋을 거란 이야깁니까?”
“긍정.”
부엉이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란의 여지는 적은 것이 좋다고 생각함.”
데스페라시오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저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이거 마르낙 사제님은 두고 저만 다녀오는 편이 낫겠어요.”
지금 여기서 나 혼자 돌아가면 괜히 따라 온 게 되는 건… 아니었네.
어차피 내가 반황제파에 딱히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과 동맹을 하든 말든 펄리의 계획은 나와 내 일행들로만 실행할 거라 큰 차이는 없었다.
데스페라시오를 시원하게 한 번 두들겨 팬 덕분에 다음 성물의 위치도 대략적으로 알아내기도 했고.
“뭐, 일이 잘 풀리길 바라겠습니다. 전 그럼 이만.”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께 드릴 군것질거리나 사서 가야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데스페라시오가 나를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잠깐, 잠깐만요! 그렇게 바로 가버리시는 게 어딨습니까? 저희 여기까지 여정을 함께한 동료잖아요!”
“저희가 언제부터 동료였습니까? 은근슬쩍 개소리 마십시오.”
“이번 건은 제가 혼자 다녀올 테니, 일단 릴리라도 데리고 가시…”
“싫어!!!”
“싫습니다.”
날 저토록 싫어하는 인간이랑 아무 이유 없이 굳이 동행해야 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나와 릴리의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하자 데스페라시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안 되겠죠. 그건.”
“날 쟤랑 단둘이 보내면 아주 그냥 오늘부로 다 때려치우고 다신 너랑 일 안 할 거니까 명심해!”
언제 풀이 죽어있었냐는 듯이 릴리는 아주 그냥 방방 뛰어대며 자신의 거절 의사를 표출했다.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진짜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가더라도 이것만 듣고 가시죠.”
데스페라시오는 나와의 거리를 성큼 좁혀 다가와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신의 그릇’이란 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그릇이고 그 크기가 신을 담기엔 생각보다 작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사실 그건 촉매에 가까운 물건일 확률이 높습니다.”
“촉매?”
“진짜 ‘신의 그릇’은 이 도시 전체와 무언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일 확률이 높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왜, 어째서, 굳이 이렇게나 사람이 많고 누군가에게 발각되기 쉬운 장소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그릇을 만들고 있을까요? 인적이 드문 산골에 처박혀서 조용히 만드는 편이 훨씬 보안을 유지하기도 쉽고 안전할 텐데 말이죠.”
여태 리베라티오가 일을 벌였을 때처럼 또 뭔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며 무슨 일이 벌어질 확률이 높겠네. 어차피 그런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펄리가 의식의 핵심축인 그릇을 빼돌리겠지만.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제가 반황제파 쪽에 접선하는 동안,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신의 그릇과 공명할 예정인 지점들을 찾아서 파괴해주시면 안 되겠냐는 거예요! 그럼 당연히 그릇의 완성이 더 지체될 테고, 그렇게 번 시간을 통해 저희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식을 저지할 더 좋은 방법들을 고려해볼 수 있겠죠!”
그는 아무래도 내가 그릇이 완성 직전에 이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듯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대충 빈말로 대답하고서 데스페라시오와 헤어졌다. 그는 떠나가면서도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는 대로 정보 교환하러 찾아갈게요!’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댔다.
정작 그와 헤어지자 어딘가 속아 넘어간 기분이 들었다.
한 번 죽여보려고까지 했는데, 어느새 또 데스페라시오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다니.
그는 어딘가 미워하기가 힘든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아무리 적대감을 끓어 올리려 해도 적의가 없음을 내보이며 헤실헤실 웃어대는데 쉽사리 미워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겠지.
물론, 필요할 때 목을 베어버리는 건 다른 문제지만.
게다가 그의 이야기를 들은 덕에 펄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
“안녕! 안녕! 우연! 우연이네?”
“이젠 우연인 척 보이려고 노력도 안 하시는군요.”
데스페라시오와 헤어지고 어머니께 드릴 군것질거리를 사러 시장 골목으로 향하자 빵모자를 푹 눌러쓴 펄리가 벽에 기대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여기 올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계속! 계속! 미행했으니까?”
“언제부터요?”
“네가 데스페라시오의 머리를 벽에다 ‘쾅쾅!’하며 박아댈 때부터지? 히히!”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와선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커다란 보랏빛 눈망울엔 순수함이 가득했다. 저 순수가 진짜 순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만 들으면 제가 데스페라시오랑 단둘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부리나케 쫓아온 거로 들리는데요.”
“그게 맞아!”
펄리는 반쯤 내 품에 안긴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내게 바싹 다가와선 나를 한 마리 고양이처럼 올려다보았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 했어?”
“꼭 알려줘야 합니까?”
“가슴 만지게 해줄까? 그럼 알려줄래?”
그녀는 슬쩍 옷깃을 내려 자신의 가슴골을 내비쳤다. 나는 잽싸게 그 발칙한 손을 잡아서 옷깃에서 떼어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그럼! 내가 뭐 해주면 알려줄래?”
“데스페라시오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대체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겁니까?”
펄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자못 서운하다는 듯이 답했다.
“내가 먼저 찜한 동업자가 속에 구렁이 백 마리는 넣고 다니는 음험한 놈이랑 단둘이 이야기했다는데 안 궁금하고 배겨?”
“제가 보기엔 그런 쪽으론 펄리가 더 음험하고 위험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뭐?!”
그녀는 잠깐 놀란 척을 하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오늘따라 묘하게 집착이 심하시군요. 마치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네가 들으면 안 되는 건 아닌데!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네가 나한테 실망! 실망! 할까 봐 그렇지! 나는 너한테 미움받기 싫어!”
뭐가 있기는 있나 보네. 여기선 굳이 내 패를 미리 보여줄 필요가 없지.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굳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뭔지 스스로 밝히시죠. 일단 듣고 제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치사하게 나오기야?”
“먼저 숨긴 게 누구인데요.”
“정확히는 숨긴 게 아니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여서 안 한 것뿐이야!”
“그래서 그게 뭔데요.”
펄리는 자신의 도톰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다시 히죽 웃었다.
“어차피 막바지 작업 중이니까 내가 뭘 숨기고 있던 건지 네 두 눈으로 직접 볼래?”
“말로 설명해주면 안 됩니까? 저 군것질거리 사서 돌아 갈려던 참인데.”
“내가 엄청! 엄청! 어마무시한 걸 숨기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녀가 나한테 뭘 숨기고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이번 일도 사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티를 낸다는 것 자체가 정말 절박하게 숨겨야만 하는 일이 아니란 이야기기도 했고.
“이번엔 그냥 말로…”
“안 돼! 거절할게!”
펄리는 내 손을 덥썩 붙잡고는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데스페라시오를 보낸 김에 드디어 슬슬 돌아가서 쉬나 했는데.
***
“그러니까 확실히 외웠지? 응? 내가 누구라고?”
나는 처음 입어보는 간편한 가죽 갑옷과 손에 낀 장갑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대꾸했다.
“얼굴 예쁘고 성격은 발랄하지만, 얼굴만큼이나 수완도 좋… 뒤에 뭐였습니까?”
“수완도 좋고, 가슴도 예쁜 완전 매력 덩어리 미녀 암상인!”
“그게 그냥 암상인 아닙니까?”
“암상인보단 미녀인 게 중요해!”
“미녀인 설정이 중요하면 얼굴에 화상자국은 왜 만든 겁니까?”
펄리는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화상자국을 톡톡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이런 상처가 있어야 사연 있는 미녀 같잖아! 그리고 그냥 예쁜 미녀가 왜 암상인을 해! 이런 상처 하나둘쯤 있어야 암상인을 하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도 기억했지?”
나는 하관을 가리는 가죽 가면을 쓰며 대답했다.
“그런 미녀 암상인을 사모해 위급한 상황에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순애파 호위 겸 짐꾼…”
“그게 끝이 아니잖아!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본인 스스로는 아직 모른다는 설정은 어디 갔어? 그게 제일 중요해!”
이제 보니 펄리의 머릿속 한구석엔 제 나름 정성껏 기른 꽃밭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기나 하죠. 대체 제게 뭘 숨기고 있길래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겁니까.”
“말로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직접 보여주려고 하는 거야! 곧 다 설명해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흠흠!”
펄리는 혼자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스스로의 역할에 몰입했다. 어느새 톡톡 튀는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차분한 인상의 흉터 있는 미녀 설정의 암상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제 얼굴을 왜 그리 쳐다보시는 거죠? 돈 받으셨으면 일에 집중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아니, 돈은 안 받았…”
턱.
그녀는 허리춤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내 손에 올려주었다. 단순히 내 손바닥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만 감안해도 여기 안에 든 건 꽤나 큰 돈일 게 분명했다.
나는 미녀 암상인 펄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목숨 바쳐 미녀 고용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말뿐인 남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가죠.”
펄리가 먼저 앞서가자 나는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수레를 끌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잘 관리된 수레바퀴 소리만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달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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