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70)
270 화 선언.
선언.
잔인한 진실을 마주한 카디쇼에게 처음 들었던 감정은 분노도, 슬픔도, 배신감도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바로 자책.
어찌하여 자신은 알아채지 못했는가? 돌이켜보면 분명 그에게 수상했던 점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마르낙이 선신의 사제들에게만 허락된 사제복을 입고 있어서?
그건 변명거리가 되지 못했다. 최근 교단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리베라티오에선 권능을 발휘할 때 새어 나오는 악신의 신성을 숨기는 도구까지 개발했다고 했으니 선신의 사제로 위장하는 도구가 나왔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 또한 그 방향이 틀렸을지언정 한 신을 모시는 사제임에는 분명했으니.
그의 수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한 건 순전히 자신이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
방심. 완전한 방심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속아 넘어간 자신이 나빴다. 악신의 추종자들이 타인을 기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광휘교의 사제로서 자신은 그 기만을 파악하고 그 너머의 진실을 좇아야만 했음에도.
자책이 떠나고 뒤이어 그 빈자리에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
그렇다면 왜 자신은 두 눈과 두 귀를 막았던 것일까. 이곳에 그들과 함께했던 순간이 행복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카디쇼는 결국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부끄러운 감정을 인정했다.
마르낙, 그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남자였다.
상냥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자신의 동료를 소중히 여기며,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내. 거기다 특히 꾸준히 단련하며 자신과 대련에 항상 어울려주었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었다.
주변에 여자가 꽤 많은 것은 약간의 흠이었지만, 가까이서 관찰해본 결과 그는 마치 성욕이란 것이 절제되어버린 인간처럼 여자든 남자든 순수하게 한 인간으로서 대했다.
자주 홀로 활동하며 마주쳤던 뭇 사내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던 희롱의 기미가 전혀 없는 담백한 시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순수하게 마주하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와닿았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다니는 동안 자연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했었다. 말로 내뱉기엔 무척이나 부끄럽고 달콤한 그런 상상을.
딱히 의도한 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정결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은 혹시 신께서 그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시고 자신에게 안배해둔 길이 아니었나 하는 망상까지 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이런 감정을 드러낸 적 또한 없었고. 그와 어떠한 교감을 한 적도 없었다. 전부 혼자 해본 망상이었을 뿐.
부끄러움마저 비워내자 그녀의 밑바닥에서부터 의심이 피어올랐다.
자신은 리베라티오의 은신처로 따라가지 않았다. 왜? 마르낙의 계획이 그랬으니.
그렇다면 악신의 추종자인 마르낙은 과연 리베라티오의 은신처에서 대체 무얼 하고 온 것일까?
자신에게 알려준 계획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그는 정말 리베라티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저 힘을 취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인가? 이곳 북제국의 수도에서 셀 수 없는 인간을 희생시킨 끝에 완성한 그 힘을.
설마 아직도 이 도시를 집어삼킨 저 막이 사라지지 않는 것 또한 마르낙이 한 짓인가? 아직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부족하기에 더 많은 희생을 원해서?
더 알려 하지 않고, 더 의심하지 않았던 탓에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었다.
뒤엉킨 의심이 꺾였다. 의심마저 치워버린 카디쇼의 마음속에 나타난 건 케케묵은 기억이었다.
추억이라기엔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언제나 지독한 악몽처럼 불현듯 찾아와 그 순간을 생생하게 되새겨주는 그런 끔찍한 기억.
눅눅하고 끈적한 악취. 적막한 가운데 간간이 들려오는 다 죽어가는 신음들. 곯을 때로 곯아 아프기까지 한 배. 비쩍 갈라진 혓바닥과 뻑뻑하게 마른 입안. 그 어두컴컴하던 창고 바닥 밑.
아사하기 직전 간신히 닿은 광휘교의 구원 손길.
그 어둑한 창고 바닥 밑에서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건 그들이 억지로 살려놓아 방 안에서 산 채로 썩어가던 부모님이었다.
그날 자신을 구해준 사제는 자신에게 부모님과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일 테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전혀 배려가 아니었다.
차라리 죽어있었다면 나았을 텐데.
인간으로서 망가져 버린 부모님의 모습에선 이성과 존엄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 하고 죽어가는 짐승을 닮아 있었을 뿐.
저것들이 정말 절대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말라며 창고 밑으로 자신을 숨겨주던 그 부모님이 맞는가.
그날 자신을 구해주었던 피투성이 광휘교 사제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 물었지만 단 한마디 말도 꺼내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부모님께 닿지 않을 게 뻔했으니.
고개를 젓자 광휘교 사제는 잠깐 집 밖으로 나가 있으라 말했고, 그 말대로 집 밖으로 나가자 무언가 뭉개지는 소리가 두 번 들려왔다. 잠시 뒤, 자신을 따라 집에서 나온 광휘교 사제의 피투성이 옷은 아까보다 조금 더 붉은 자국이 많았었다.
잠깐 이곳에서 기다리라던 사제는 마을의 모든 집들을 모두 한 번씩 들른 후에야 다시 돌아왔다. 이제는 완전히 새빨개져 버린 옷을 입고서.
그날 그렇게 혼자 살아남아 피 냄새로 절여진 사제의 등에 업혀 광휘교의 교단에 입교했다.
뒤늦게야 커서 안 사실이지만, 그날 그 사제가 자신을 굳이 교단으로 데리고 온 것은 홀로 남은 아이를 향한 순수한 선의보다는 혹시나 숨겨둔 실험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자신은 너무나 운이 좋았다.
교단의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마을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마을을 여럿 맞닥뜨렸지만, 그 어느 마을에서도 자신처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다.
어찌나 꼼꼼하고 악착같은지 악신의 숭배자들은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노인부터 아이까지 단 한 명도 쓰지 않고 남겨두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날과 비슷한 광경. 오늘의 북제국 수도도 그날의 광경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그 광경과.
기억마저 스쳐 지나가니, 그 빈 곳에서 마지막으로 피어오른 건 차디찬 분노였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의 기억을 장작 삼아 차갑게 불타오르는 분노.
카디쇼는 낮게 뇌까렸다.
“온기 없는 빛이시여. 부디 제게 눈앞의 악을 꺾어버릴 빛을…”
촉수와 은색 조각이 뒤섞인 봉에서 일렁이는 신성과 함께 붉은 빛이 곧게 뻗어 나온다. 온기 한 점 없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빛이.
마르낙은 가만히 서서 카디쇼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카디쇼가 대답했다.
튀어 오르는 불티. 부서지지 않는 절망의 푸른 날과 꺾이지 않는 붉은 빛이 맞부딪혔다. 이어지는 시리도록 선명한 붉은 궤적. 찰나의 순간에 붉고 푸른 궤적이 수십 차례 서로 부딪혔다.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카디쇼와 마르낙, 둘은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으며 공방을 나눴다.
같이 다닌 지난 시간 동안 수십, 수백 번 나눴던 경합. 그간 쌓인 대련의 경험들 탓에 서로의 궤적은 둘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피하지 못하는 것은 쳐낸다. 또 한 번 찰나의 순간에 수십 차례의 공방의 오간 끝에 검과 봉이 얽히며 한순간의 교착이 일어났다.
절망과 붉은빛이 서로를 마주 보며 잘게 떨리던 그때.
마르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당신의 대답입니까? 카디쇼.”
“나는 지금 내가 저지른 죄를 바로잡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죄를 말입니까?”
“그건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촉수들이 꿈틀대며 카디쇼의 붉은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네놈의 계획을 들었던 그 순간! 네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 나는 이 사태를 막기 위해 리베라티오의 계획을 모든 사제들에게 알렸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수천, 수만이 넘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흔들림 하나 없는 마르낙의 대답에 카디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리베라티오의 의식, 그 뒤에는 이 나라의 황제가 있었으니 카디쇼가 다른 사제들에게 오늘의 계획을 멋대로 퍼뜨리려고 했다간 아마 이 나라의 황제가 직접 손을 써서 막았을 겁니다.”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단조로운 한마디. 카디쇼의 얼굴을 이루는 촉수들이 꿈틀댔다. 그녀는 더욱 성난 목소리로 그를 질타했다.
“네놈의 비열한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루한 논리를 갖다 붙이지 마라! 악신의 숭배자!!!”
“저는 더 많은 사람을 집어삼키기 전에 리베라티오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을 저지한 게 아니라 네 계획을 성공시킨 것이겠지!”
성난 질타와 함께 카디쇼가 지루한 교착을 끝내고 마르낙을 거칠게 밀어냈다. 둘은 반동을 이용해 동시에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마르낙의 피부 위로 새겨진 부패의 문들이 아까보다 더욱 음산한 암녹빛을 내뿜었다. 마르낙은 다시 한번 자세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 하!”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토해낸 카디쇼가 붉은빛을 거칠게 휘둘러 주변을 가리켰다.
“이 광경이 정말 네 최선이었나? 마르낙? 수천, 아니 수만이 넘게 죽어 나간 이 광경이 정말 네 최선이었나! 너는 이 모든 일을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 너도 리베라티오와 다를 바가 없다! 네 알량한 목적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나!”
마르낙의 하얀 이마 위로 굵은 계곡이 파였다. 처음으로 그의 목청이 조금 올라갔다.
“희생? 정말 이 광경이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카디쇼?”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이 수도엔 저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카디쇼가 그토록 부르고 싶어 하는 사제들과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누구 하나 리베라티오의 계획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카디쇼! 당신을 포함해서! 아니, 당신조차 제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런 계획이 있었는지조차 몰랐겠지요!”
끓는 한숨을 토해내고 나서야 마르낙은 짓씹듯 한마디를 꺼냈다.
“당신들의 무능까지 덤터기로 제게 떠넘기지 마십시오.”
자리를 박차는 짧은 소리. 푸른 검이 그려내는 선과 붉은빛이 그려내는 선이 다시 한번 거칠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몰랐던 것과 알면서도 막지 않은 건 그 무게가 같을 수 없다! 마르낙!!!”
카디쇼의 질타에 마르낙의 새카만 두 눈 위로 암녹빛 정광이 거칠게 일렁였다. 부패의 문이 더욱 환한 빛을 내뿜자 마르낙의 몸이 더 거칠어지고 더 빨라져 갔다.
“왜 몰랐습니까! 왜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제가 막지 않았더라도 잘난 그 선신의 사제들이 알아서 이런 끔찍한 사태를 막아내야 했던 거 아닙니까!”
푸른 검이 꺾이지 않는 붉은 빛을 세차게 두드려댔다. 그 기세에 카디쇼는 처음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왜! 대체 왜! 리베라티오의 계획 하나 알아내지 못해 수천, 수만을 죽게 한 다른 사제들의 무능엔 그렇게나 관대하면서! 어째서 반쪽짜리일지라도 리베라티오의 계획을 저지한 제게는 그렇게 엄중한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겁니까!”
격렬한 공세에 그녀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마르낙의 거친 고성이 카디쇼에게 뒤따라 붙었다.
“단지 제가 악신의 사제라서? 카디쇼! 제가 거짓된 위선자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무능한 사제들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동안 적어도 저는 사람을 구했습니다! 제 여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서! 어째서 당신은 제가 행한 선은 보지 않고, 저지른 죄만을 바라보는 겁니까? 대체 어째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충돌음. 푸른 검과 붉은빛이 맞부딪히고 그 충격으로 카디쇼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카디쇼는 바닥을 한 바퀴 바닥을 굴러 빠르게 다시 중심을 잡았다.
마르낙은 카디쇼의 빈틈을 뒤쫓지 않았다. 그저 절망을 늘어뜨린 채 카디쇼를 시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신은 왜 제게 오늘 리베라티오가 저지른 죄의 무게까지 다 올려놓는 겁니까? 카디쇼도 알다시피 오늘 벌어진 의식은 제가 일으킨 게 아닙니다. 어째서 그 죄가 전부 제 것인 마냥 저만을 탓하는 겁니까?”
“몇 번이나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마르낙. 너는 이 모든 참상이 벌어질 걸 알면서도 방관했다. 그것도 오롯이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건 분명한 죄…”
“그러니까!!!”
거친 고함이 카디쇼의 말을 끊었다. 마르낙은 이를 악물고 카디쇼를 향해 으르렁댔다
“그 죄의 무게가 어떻든! 대체 왜 아직 살아있는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조차 제쳐두고 날 죽이려 드는 것이 네게 가장 최우선인지를 묻는 거다! 카디쇼!”
마르낙은 푸른 절망을 들어 검 끝으로 카디쇼의 붉은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말 네게 무고한 이들의 목숨이 소중하기는 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그저 날 죽일 핑계를 찾기 위해 입바른 소리만을 해대는 거냐?”
“…”
한 점 흔들림 없는 푸른 검끝. 마르낙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저 날 죽이고 싶은 거라면 그런 쓰잘데기 없는 핑계는 다 집어치우고 덤벼.”
천천히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눈꺼풀. 새카만 두 눈이 암녹빛 정광을 줄기줄기 흘려대며 카디쇼를 노려보았다. 그는 뒤이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짓뭉개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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