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83)
283 화 사과.
사과.
새하얀 겉옷을 꺼내 걸친다.
떠날 준비를 끝마친 다키아는 마지막으로 챙긴 짐들을 확인하고 지난 5년간 지냈던 공간을 돌아보았다.
그간의 안락함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나아가야 할 때가 왔으니, 주저 없이 걸어 나갈 뿐.
“준비는 다 끝났소?”
천천히 열리는 문. 금을 녹여 낸 듯한 머리칼과 눈. 용왕국의 왕녀, 르소나 드라코는 떠날 준비를 끝마친 손님을 보곤 빙그레 웃었다.
“정말 떠날 것이오? 개인적으론 그대가 있어 제법 좋았는데 말이오.”
다키아는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지며 답했다.
“가야죠.”
르소나는 자신을 닮은 황금빛 눈을 마주 보았다. 흔들림 없는 저 눈의 주인에겐 한 점 미혹조차 없을 터.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지 않소?”
북제국 수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참사. 북제국의 황제마저 그 목숨을 잃었던 대사건 이후, 지난 5년 동안 악신의 숭배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활동을 중지했었다. 더욱 기이한 점은 악신의 숭배자들뿐만 아니라 선신의 사제들조차 교단에서 사제들을 소집했고 지난 5년 동안 정말 최소한의 대외활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지난 5년 동안 천상의 신들이 침묵했고, 그 침묵 뒤에 이어진 당연한 인과로 그 어떤 교단에서도 새로운 사제가 태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모든 교단들이 침묵했기에 떠도는 소문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낸 자는 없었다.
그리고 최근, 마침내 선신의 교단들이 5년간의 침묵을 깨고서 활동 시작하자 중지된 순례로 사제들의 은혜를 잃어버린 힘 없는 이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선신의 교단들만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대규모 실종.
악신의 종자들이 다시금 준동하고, 모든 나라에서 크고 작은 실종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최근 벌어진 그 사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바로 남제국의 교역 도시 미세레에서 일어난 참사.
무려 대규모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그 참사에 남제국의 수상은 유감을 넘어 선명한 분노를 표했다.
르소나 또한 방금 막 미세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를 듣고서 다키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어디서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키아는 이미 그 소식을 알고 떠날 준비를 끝마친 듯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는 해요.”
“그럼 좀 더 이곳에서 지내다 확실한 정보가 나타났을 때 움직이는 것이 어떻소?”
“아뇨.”
다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두 발로 뛰어서라도 찾아다닐 생각이에요. 또 모르죠. 현장을 직접 보면 다른 이들이 놓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요.”
“흠. 그럼 이걸 받으시오.”
르소나가 내민 건 자그마한 패였다. 다키아는 거절 한번 없이 냉큼 르소나가 내민 패를 받아 챙겼다.
“…보통 뭔지 물어보고 받지 않소?”
“이럴 때 줄 만한 게 별것 있나요? 대충 르소나 왕녀님을 뜻하는 패겠죠. 이거 어디에 쓰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요?”
르소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5년 전보다 사뭇 뻔뻔해진 식객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 패를 내보이면 우리 용왕국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내 이름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요. 발생하는 비용은 어차피 내가 내는 거니 부담 없이 쓰면 되오. 그리고 당장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하나 추천해주자면, 왕성을 나가자마자 그걸 들고 왕국군 주둔지로 가는 것이오.”
“그리고요?”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군의 보급을 이용해서 안전하게 이동하는 것이지. 적어도 우리 왕국의 군이 보급할 때 합류해서 움직이면 여행길에 귀찮은 일에 직면하는 걸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오. 극진한 손님 대접을 받는 건 덤이고 말이오.”
“좋네요. 감사히 쓸게요.”
다키아의 감사에 르소나는 다시금 웃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잠깐 이리 와 보시오.”
다키아가 다가오자 르소나는 두 팔을 펼쳐 그녀를 껴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대가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쉽지 않은 길이란 것은 아오. 분명 무척 힘들고 고될 것이겠지.”
다키아는 푹신한 가슴에 안긴 채 대답했다.
“…그렇겠죠.”
“만약 일이 잘 안 풀리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소. 나는 언제나 친우인 그대를 환영할 테니.”
“뭐래요.”
퉁명스러운 한마디. 다키아는 르소나를 밀어내곤 피식 웃었다.
“전 실패할 생각 따윈 전혀 없거든요? 설령 문제가 너무 꼬이고 꼬여버린 뒤라도 다 두들겨 패서라도 반드시 모두 똑바로 바로잡을 거예요. 그러니까 방금 그 악담은 못 들은 거로 할게요.”
“내 실수를 했소. 사과하지. 그럼 슬슬 가시오. 나도 잠깐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오.”
“그간 정말 고마웠어요. 르소나 왕녀님.”
“어허.”
짧게 다키아의 말을 끊은 르소나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둘만 있을 때는 친구로서 대하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래요. 르소나.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건강히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그런데 그거 아시오?”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르소나는 다키아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여행이란 건 본디 예상치 못한 만남을 마주하게 되는 법이라오. 그럼 이제 정말 가보시오. 이별이 길어봤자 미련만 기뻐할 터이니.”
“네. 그럼 이제 진짜 가볼게요. 르소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용왕국의 왕성을 나선 다키아는 르소나의 말대로 군부대를 찾았고, 그곳에서 르소나가 말한 ‘예상치 못한 만남’을 마주했다.
다키아는 군부대 입구 앞에서 여행용 복장을 갖춰 입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르소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아니, 그냥 같이 간다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요. 뭘, 그렇게 빙빙 돌려서 말했데요?”
르소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답했다.
“나도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내가 다키아의 지금 이 표정을 보려고 그랬나 보오.”
용왕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군부대의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느릿한 군부대의 보급 마차보다는 아무래도 용(龍)을 타고 날아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오.”
“그런데 왜 저랑 같이 가시는 건데요? 그럴 이유가 없으시잖아요.”
“이유야 있소.”
그녀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4년째 가출 중인 바티스 오라버니를 찾아와야 할 일이 생겼소.”
***
“어이.”
커다란 배낭을 맨 둘을 부르자, 이내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이 내 얼굴을 확인하곤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페르카와 레페가 날 어떻게 바라보든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끌고 온 디스펜스제 금속 리어카를 가리켰다.
“일단 들고 있는 짐 전부 여기다 실어. 너희 둘 다 여기 오래 있으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까.”
당연히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저 둘이 말 한마디 했다고 ‘네, 알겠습니다.’하고 내 말에 따를 리가 없었다. 나는 주먹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맞고 할래? 아니면 맞기 전에 할래? 며칠 지났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마 다 까먹은 건 아니지?”
머리가 안 굴러가는 건 아닌지, 페르카와 레페는 순순히 내 말대로 자신의 짐을 내가 끌고 온 리어카 위에다 실었다.
“너희 고향이 어느 쪽이야?”
“…”
“…”
둘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레의 광경을 본 이상 저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뻔했다.
아마 방향을 알려주면 자신들의 고향도 몰살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이미 며칠 전에 너희 입으로 고향 도시 이름까지 다 말해놓고 이제 와서 방향 하나 안 가르쳐준다고 뭔가 달라질 거라 생각해? 그냥 빨리 말해. 당장은 너희가 생각하는 거 할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진짜 여기 오래 있으면 안 좋거든?”
페르카는 여전히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의외로 레페는 상황을 빨리 이해한 것인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해가 빨라서 좋네. 따라와.”
내가 둘의 짐을 실은 리어카를 천천히 끌며 나아가자 레페와 페르카가 뒤에서 천천히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둘을 힐끔 보곤 다시 말했다.
“사람이 짐을 다 옮겨주고 있으면, 보통 옆에 와서 말상대라도 해줘야 예의가 아닌가?”
둘은 말없이 조금 걸음을 빨리해 내 옆으로 와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레페보다 유독 페르카의 얼굴이 더욱 어두웠는데, 아무래도 저 녀석은 자신이 한 선택 때문에 미세레가 몰살당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야.”
내 부름에 페르카와 레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페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부른 거야. 페르카. 혹시 오해하고 있을까 봐 말해두는 건데 미세레가 이렇게 된 건 네가 사랑을 선택하기 하루 전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네 선택은 이 광경이랑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거지.”
애초에 내 결정에 페르카의 선택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끝마쳤었으니.
페르카에게 강요했던 선택은 그저 일종의 자기 긍정이었다. 누구라도 이러지 않았을까 싶은. 쓰레기 같은 짓이긴 했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쓰레기가 맞으니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뭐라 할 수 있나?
내 말을 들은 페르카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다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자신의 탓이란 게 아닌 걸 알아도 미세레의 멸망을 생각하면 그게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거겠지.
페르카가 홀로 고민하는 사이, 여태 침묵하던 레페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희는 왜 찾아온 건데요.”
왜 찾아왔느냐. 그건 답이 쉬웠다.
“너희 먹을 거 없잖아. 먹을 거 좀 챙겨주러 왔지.”
이 녀석들의 짐은 아마 미세레에서 추가 보급을 할 작정으로 최소한의 식량만 남긴 채 전부 황금으로 가득 채워뒀을 게 뻔했다. 그런데 정작 보급을 해야 할 미세레가 저렇게 되어버렸으니 식량 때문에 곤란해지겠지.
그래서 이 내가 이렇게 리어카에 식량까지 실어서 친절하게 찾아와준 것이었다.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레페가 움찔거렸다.
“덤으로 너희가 혹시나 멍청하게 바로 안 떠나고 미세레에서 얼쩡거릴까 봐도 있고.”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황금을 보따리로 들고 얼쩡거리고 있다가 발견되면 잘도 그 황금이 너희 거라고 생각해주겠다. 안 그래?”
“…”
달달달.
적막한 가운데 리어카가 흙길 위를 달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슬슬 미세레에서 적당히 멀어진 김에 나는 리어카를 멈추고 가져온 식량을 꺼내 페르카와 레페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저 봉투처럼 생긴 식량을.
당연히 처음 보는 형태의 식량에 레페와 페르카가 멍청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전투식량이란 건데, 조리가 간단해서 들고 다니기 편해. 처음이니까 이번에만 내가 해줄 건데 잘 보고 다음부턴 혼자서 하라고.”
디스펜스가 만들어준 전투식량 세 개를 조작해서 간단하게 조리를 끝마치고 페르카와 레페에게 하나씩 건넸다.
“혹시 부족하면 말하고. 넉넉하게 들고 왔으니까.”
둘은 처음엔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전투식량을 한 입씩 밀어 넣었다. 제법 맛이 있었는지 녀석들이 다 먹고 내 눈치만 보길래 한 봉지씩 더 조리해서 둘에게 건넸다.
근데 제법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이건 보통 전투식량이 아니고 디스펜스가 후계자님이 드실 건데 대충 만들 수 없다며 좋은 재료들을 박아넣어 만든 특주품이었다.
어차피 나는 아무 맛도 못 느끼는데 말이지.
날이 어두워지고 대충 야영 준비를 끝마치고 잘 때가 되자, 조금 경계가 풀린 것인지 레페가 내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미세레를 저렇게 만든 게 당신이에요?”
“대충 맞아.”
“그런데 당신 말로는 그… 일이 있기 전날에 미세레가 저렇게 됐다면서요. 그 전날 당신은 우리랑 같이 고대 제국의 유적에 있었잖아요. 그런 당신이 대체 어떻게 미세레를 저렇게 만들 수 있죠?”
“그건 영업 비밀인데. 정 궁금하면 말해줄 수는 있어. 근데 듣고 나면 앞으로의 삶이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정말 알고 싶어? 감당하기 힘들 텐데.”
“…”
레페는 잠깐 고민하더니 더 묻지 않기로 결심한 듯 입을 닫았다.
잘 타오르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대여섯 개쯤 집어넣었을까. 레페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근데 케니랑 포사는 왜 죽인 거예요.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요.”
그 질문에 자는 척하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르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는 나뭇가지를 하나 더 밀어 넣으며 답했다.
“나한테 그 황금 공룡 죽이는 데 성공하면 너희 뒤통수치고 황금을 전부 가지자고 하길래 죽였지. 어차피 살려뒀어도 하등 도움 안 됐을 쓰레기들인데 살려줘서 뭐해. 안 그래?”
“그 말, 정말이에요?”
이번 질문은 레페가 한 게 아니었다. 자는 척하다 몸을 일으킨 페르카가 내게 물은 것이었다.
“정말 케니 형이 그랬다고요?”
“내가 너희한테 거짓말해서 뭐할까. 걔네 하는 짓 보니까 간 보다가 배신해본 게 딱히 이번이 처음도 아닌 거 같더라고. 뭐, 물론 안 믿어도 상관없어. 네가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또 덤빌래? 이번엔 저번처럼 사정 안 봐줄 거니까 그래도 덤비고 싶으면 얼마든지 덤벼.”
“…”
내 말을 들은 페르카는 제법 복잡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레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결국 당신이 저희를 구해준 셈이네요?”
그 아이 같은 발언에 나는 피식 웃었다.
“너 나한테 배 차이고 낑낑대던 거 벌써 까먹었어? 내가 뭘 구해줘.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했던 거지.”
“…고마워요. 구해준 건.”
“됐어. 별거 아냐.”
“그럼 이제 사과해요.”
“…?”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레페는 그 연둣빛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제 배 걷어찬 거 하고, 페르카를 두들겨 팬 거, 그리고 페르카한테 심한 선택을 강요했던 거 전부요. 그건 당신이 잘못한 게 맞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잠깐 키득키득 웃고는 미소를 지우고 둘을 향해 사과했다.
“미안해. 사과할게. 특히 페르카. 너한테 내가 많이 심한 짓을 했어.”
내 사과에 레페와 페르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기가 말하긴 했어도 진짜 내가 사과할 줄은 전혀 몰랐단 듯이.
레페가 두 눈을 끔벅거리며 말했다.
“…사과할 줄도 아시네요?”
나는 새로운 나뭇가지 하나를 더 밀어 넣으며 답했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구나. 원래 고민 없이 쉽게 사과를 내뱉어대는 인간이 제일 질 나쁜 종류의 악인이야.”
“그렇게 말하면 스스로를 욕하는 셈이지 않아요?”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난 굉장히 나쁜 사람이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