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85)
285 화 칼라게인(붉은색)
칼라게인(붉은색)
반쯤 죽은 피처럼 어두운 핏빛 갑옷. 붉은 금속은 새카만 눈구멍과 숨구멍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착용자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새카만 어둠만이 가득한 눈구멍으로 주변을 둘러본 사내는 곧장 자신의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는 외쳤다.
“사람!”
투구를 벗고 드러난 얼굴은 꽤나 선이 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덥수룩한 붉은 머리칼에 비해 턱은 방금 면도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털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붉은 갑옷과 붉은 머리칼에 색을 맞추기라도 한 듯 붉은 사내의 왼쪽 눈은 붉은빛으로 일렁였다. 다만, 그 반대편 눈동자는 타인의 것을 취하건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으로 새파랬다.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하하하하! 온 세상이 사람 투성이야! 하하하하하하!”
뭐가 그리도 좋은지 사내는 붉고 푸른 두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웃어댔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내를 보고 잠깐 당황했던 경비대도 그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붉고 푸른 눈동자가 움직였다. 사내는 경비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그립고 다시 듣길 바라왔던 질문이군. 내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연옥에서 억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민하며 나를 지칭할만한 수많은 단어를 떠올렸었지. 잘 낳은 장남, 효도를 잊지 않는 사내, 옆집 미소녀 소꿉친구와 결혼한 남자, 신의를 위해서라면 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자, ‘마왕(魔王)’의 측근이자 그에게 신뢰받는 남자, 신살(神殺)의 업을 스스로 짊어진 자. 이중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칭호는 바로 ‘옆집 미소녀 소꿉친구와 결혼한 남자’지! 하하하하!”
– 그냥 지금 기습해서 죽여라. 저 정도면 좋은 ‘재료’가 될 거다.
한쪽 귀에서 울려오는 임페트로의 속삭임.
– 안됩니다. 언제나 대화가 우선입니다. 저 사내는 어떠한 적의도 내비치고 있지 않지 않습니까.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더욱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시야 한구석에 나타나 나를 바라보는 자칭 상투스. 문득 나는 만화에서 천사와 악마가 양쪽 귀에서 속삭여대는 장면이 떠올랐다.
솔직히 그냥 뭐 둘의 이야기에 혹한다기보다는 그저 시끄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주인공들도 다들 이런 기분이었겠네.
드디어 붕괴한 ‘연옥’에서 빠져나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난 5년 동안 천상의 신들이 그렇게 고치려고 아등바등하더니 결국 못 고쳤네. 내가 조금 훼방을 놓은 탓도 있겠지만.
연옥(煉獄).
임페트로에게 들은 바로는 멋 옛날인 고대제국보다 그 이전 시대인 ‘비뚤어진 마법사들의 시대’에 유폐된 존재들이 있는 공간이었다.
아직 천상의 신들이 이 땅 위를 거닐던 시절. 그들이 직접 처리하자니 손해가 막심하고,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존재들을 처박아둔 공간.
연옥은 천상도 지상도 아닌 다른 이공간이자, 신들의 골칫거리들을 처박아둔 쓰레기장이었다.
그 안에 누가, 어떤 것들이 유폐되어있었는지는 그 대충 뭐든 다 아는 임페토르조차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자신조차 연옥이 붕괴하는 건 처음 본다면서.
내게 있어 저 남자는 말 그대로 예상외의 변수였다. 과연 그를 살려두는 것이 내게 이득이 될까 손해가 될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허리춤의 절망에 손을 올리고 언제든 베어낼 준비를 끝마쳤다.
온통 붉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는 저 혼자 계속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홀로 고독하게 갇혀있다 보니 깨달은 것들이 있지. 고결한 명예니, 인류의 숙원이니, 한 종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이니, 닿고자 바라는 이상이니, 그 모든 커다랗고 광대한 가치는 결국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 듯 홀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오랜 시간의 고독 끝에도 내 이 마음을 붙잡아주었던 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시절 가슴에 품었던 자그마한 것들. 자고 일어난 내 뺨을 핥아주던 개의 축축한 혀와 하루를 끝마치고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술 한잔, 알딸딸하게 취한 채로 돌아와 껴안아 보는 아내, 따뜻하고 익숙하지만, 더없이 소중한 광경들. 바로 그런 자그마한 것들이야말로 가장 단단하고 꺾이지 않는 가치였다.”
마치 자신의 말을 음미하듯, 사내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은 이미 시간에 바스러져 사라졌을 터이니,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렇다. 좇던 길을 잃어버린 남자. 그게 바로 나, ‘붉은 멧돼지 칼라게인’이다.”
‘붉은 멧돼지 칼라게인’. 그 이름을 들은 경비대와 나는 고개를 돌려 좀 전까지 내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검은 멧돼지 칼라게인’을 바라보았다.
검은 멧돼지 칼라게인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나,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검은’ 멧돼지 칼라게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랑 동물도 같고 이름도 같잖아. 검은 멧돼지 칼라게인.”
“…음?!”
내 이야기를 들은 ‘붉은’ 멧돼지 칼라게인이 성큼성큼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언제든 벨 수 있게 녀석과의 간격을 재었다.
“네 이름도 칼라게인인가?”
사내의 질문에 칼라게인(검정)이 대답했다.
“그, 그런데?”
“나와 이름이 같군. 설마 내 이름이 이 시대에 유명한 영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건가? 그래서 내 이름에서 따와 네 이름을 지었고?”
“…그냥 우리 엄마가 지어준 이름인데.”
칼라게인(빨강)은 그 이야기를 듣자 너털스럽게 웃었다.
“네 어머니께서 제법 감각이 있으시군. 멋진 이름을 지으실 줄 알아.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뭘?”
그의 유일하게 푸른 오른쪽 눈이 밝게 일렁였다.
“너는 칼라게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내 이름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굳이 부끄럽게 살고 말고가 어딨…”
“어디에 내세워도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지 못한가 보군. 칼라게인. 대답이 빙빙 도는 걸 보니.”
푸른 눈에서 마력의 파동이 뻗어 나왔다.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붉은 투구와 할버드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두 손이 자유로워진 그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칼라게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남들에게 당당히 말하지 못할 그런 삶을 살지 마라. 칼라게인.”
“무슨 갑자기 나타나서 뭔 개소리를 장황하게…”
칼라게인 둘이 서로 말을 나누는 사이, 내가 집중한 건 방금 칼라게인이 보였던 물건 수납 능력이었다.
그건 분명 푸른 눈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만들어낸 작용이었다.
이 시대의 마법사들이 불을 뿜거나 전기를 뻗거나 하는 등, 자연현상을 이용한 물리적 상호작용 자체에 국한된 것에 비해 눈앞의 칼라게인은 역시 ‘비뚤어진 마법사들의 시대’에서 그대로 싱싱하게 연옥에 포장된 다음 이 시대에 떨어진 인간이니만큼 마력 사용의 응용력이 훨씬 뛰어난 듯했다.
저게 다가 아니겠지. 무방비하게 목을 내보이고 있는 지금, 바로 베어야 하나?
붉고 푸른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왜 그렇게 날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나?”
“널 죽일지 말지 고민 중이니까 좀 닥쳐봐.”
“일면식도 없는 날 죽일지 말지 고민 중이라니… 재밌군.”
칼라게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적대감 없이 물어왔다.
“내 죽음이 어떤 형태로든 네게 이득이 되나 보군. 안 그런가?”
“맞아. 쓸 방법이 있거든.”
“그런데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이득이란 게 당장 급하거나 절실하지는 않은가 보군. 그렇다면 내가 제안하지. 결정하기 전에 같이 밥 한 끼 먼저 하는 게 어떤가?”
“흠.”
하긴 나 방금 밥 먹다가 싸우느라 제대로 밥을 먹진 못했지.
“그전에 하나만 묻자.”
“그래.”
“너 밥 먹을 돈은 있어?”
칼라게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여차하면 날 죽이고 싶은 네가 내는 게 맞지 않나?”
“그건 그렇네. 그럼 들어가자. 밥은 내가 살 테니까.”
“고맙게 먹지.”
“잠깐!!!”
경비대 선임으로 사내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밥은 무슨 밥!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하지 마라! 너희 셋 다 체포다!!!”
***
“흠.”
“흠.”
“흠.”
검정, 빨강 칼라게인 둘과 나. 이렇게 셋은 경비대 건물 안에 있는 한 철창 속에 갇혔다. 잠시 후 우리를 이곳에 잡아넣은 경비대원이 오더니 이름을 불렀다.
“칼라게인.”
동시에 돌아가는 두 고개. 경비대원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곤 다시 이름을 불렀다.
“검은 쪽.”
“올 것이 왔군! 나 먼저 나간다. 멍청이들아!”
“야.”
칼라게인(검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날 듯이 철창 밖으로 나가는 걸 불러세웠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기 전에 충고 하나만 할게. 너, 이대로 나가서 내 일행 둘한테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칼라게인(검정)은 철창 밖에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그 안에서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
“우선 이 철창을 손으로 뜯고, 나가서 너부터 찾을 거야. 왜냐? 네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네 사지를 잘라낸 다음 곱게 지혈해서 내 등에 업겠지. 그리고 나선 네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들을 전부 네가 보는 앞에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그리고 그 일이 전부 끝나도 너는 계속 살아있을 거야. 대신 이제는 쓸모없어진 네 눈을 파내…”
“그만.”
내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붉은 칼라게인이 내 말을 제지했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저 칼라게인의 이름을 가진 자는 네가 생각한 만큼 비겁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자고로 남자란 그렇게 말로 사람을 겁박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법이지.”
“뭐라는 거야.”
나는 그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행동으로 하기 싫으니까 미리 경고해두는 거잖아. 경고도 안 해줬으면서 행동으로만 보여주면 그게 진짜 쓰레기지. 안 그래?”
“흠. 그렇게 볼 수도 있군.”
칼라게인(검정)은 잠깐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는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닥쳐. 내가 네놈의 협박에 굴할 줄 알고?”
“그래서 내 충고를 무시하고 건드리겠다고?”
“내가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거다! 네놈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그 말을 끝으로 칼라게인(검정)은 씩씩거리며 떠나갔다. 나는 칼라게인을 풀어준 경비대원을 보며 말했다.
“근데 여기 밥은 언제 나와?”
“저녁 시간은 이미 지났다. 밥은 내일 아침에 어련히 줄 테니 조용히 있어라.”
그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경비대원마저 떠나갔다.
내려앉은 침묵. 여기 남은 붉은 칼라게인도 나도 딱히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궁금한 게 생긴 김에 내가 먼저 물었다.
“여태 연옥에 갇혀있었으면서 또 잡혀 와서 갇혔는데 너는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그 정도로 오래 갇혀있었으면 갇힌다는 것 자체에 질색해서 경비대를 두들겨 패며 날뛸 줄 알았는데.
칼라게인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우며 답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 어련히 알아서 풀어줄 걸 기다리는 것이지. 게다가 나도 이제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데 시작부터 이곳 경비대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군.”
“갇혀있는 건 아무렇지 않고?”
“그렇지.”
“어째서?”
푸르고 붉은 동공이 움직여 날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여기엔 네가 있지 않나?”
살짝 닭살 돋는 발언에 나는 조용히 엉덩이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살짝 벌렸다.
“무슨 뜻이야?”
“연옥은 ‘갇혀’있다기보다는 타인과 격리되었다는 표현이 맞는 곳이다. 오롯이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광대한 공간 속에 놓여버리는 것이지. 그래서 너라는 존재가 내 옆에 있는 이상, 이곳은 연옥과는 전혀 다른 곳이고 그곳에서 지냈던 기억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래?”
나도 칼라게인을 따라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 딱 봐도 하루만 자도 등이 배길 게 분명했다.
푹신한 침대가 그립네.
잠깐 눈을 붙이려고 눈을 감자, 감각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이 새끼들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서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칼라게인이 물어왔다.
“나갈 생각인가?”
“어.”
끼이익.
듬성듬성한 창살을 그대로 잡고 휘어서 나갈 구멍을 만들어냈다. 만들어낸 구멍으로 몸을 빼내자 칼라게인이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나왔다.
“왜 따라와?”
그는 날 바라보더니 또 빙긋 웃었다.
“이곳에 혼자 남으면 연옥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오를 거 같아 어쩔 수 없군.”
“따라오는 건 상관없는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말리면 그땐 너부터 죽일 거야.”
“친절한 경고로군. 기억해두지.”
나는 지하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건물의 1층으로 향했다. 조금 걸어가자 당연히 감옥을 지키는 경비대원이 있었다.
아까 까만 칼라게인 놈을 빼낸 놈이 아니네.
“뭐, 뭐냐! 어떻게 빠져…”
검을 꺼내 들려는 놈의 손을 걷어찼다. 빡하는 소리와 함께 무장한 경비대원의 손이 꺾여선 안 되는 방향으로 꺾였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목이 졸린 경비대원이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경비대원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압류품이라길래 잠깐 맡겨줬더니, 감히 내 검을 빼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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