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88)
288 화 난세의 간웅.
난세의 간웅.
웅성대는 소리.
히르멘툼의 죽음과 손에 든 유일한 무기를 던져버린 나. 병사와 기사들은 빈손인 날 보며 자신들의 영주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딱히 덤벼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묘한 대치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인질인 솜니아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가려다 바닥이 부서진 문 파편으로 더러운 걸 보곤 그냥 침대의 나무로 된 발받침에 걸터앉더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파비탄.”
“예.”
그녀의 부름에 대답한 건 히르멘툼의 수염을 잘랐던 기사였다. 솜니아는 탁한 우윳빛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곤 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마침 괜찮은 상황이 찾아왔으니. 계획, 그냥 오늘 실행해.”
“예!”
영문을 모르겠는 말. 그러나 병사와 기사들 중 누군가는 마치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눈을 빛냈다. 어떤 이들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그냥 멍청한 눈으로 솜니아를 쳐다보았다.
파비탄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모여든 기사와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움직여라!”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빛낸 자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멍청한 눈빛을 한 자들을 기습했다.
낭자 하는 선혈과 떨어지는 목들. 솜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끝자락 나무 발받침에 걸터앉아 발만을 까딱였다.
그녀는 피가 튄 바닥을 힐끔 내려다보곤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좀 옮겨줘.”
“내가 왜?”
“…그냥?”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그냥 네 부하들한테 부탁해.”
내 말에 솜니아는 잠깐 자신의 기사와 병사들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피 묻어 있잖아.”
“네가 시켜서 묻은 거지.”
“…네 물건, 그거 있을 법한 곳을 알려줄게.”
“이미 아는데?”
“…?”
끔벅거리는 두 눈. 그 눈엔 그럼 대체 이 난동은 왜 피운 거냐는 의문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뭘 원해?”
“흠. 딱히 없는데?”
“…그럼 후불로 할게. 일단 들어줘.”
왜 그렇게 들어달라는지 궁금하기도 한 김에 그냥 대충 번쩍 안아 들자 솜니아는 자연스럽게 내게 몸을 기댄 채로 자신의 기사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파비탄.”
“예.”
기사가 무릎을 꿇자 솜니아는 작게 숨을 들이키고는 깔끔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이번 상황은 감히 욕망에 눈이 먼 히르멘툼이 한밤중에 내 처소로 들이닥쳐서 날 겁간하려다 네 손에 죽은 상황이라고 공표해.”
“예.”
솜니아는 손짓으로 다른 기사를 가리켰다.
“너는 당장 사람을 모아서 사전에 작성해둔 리스트 순서대로 히르멘툼 쪽의 사람들을 포박해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즉결처형해도 좋아. 아니,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최대한 죽이는 방향으로 일 처리해. 이 기회로 압류한 재산의 양에 따라 논공행상을 추가적으로 할 테니까.”
“예!”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장 구석에 있던 기사에게로 향했다. 솜니아는 나른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지금부터 사전에 파악해둔 히르멘툼의 일가친척을 모조리 잡아 죽여. 노인이든 아이든 여자든 히르멘툼과 혈연으로 이어진 인간이라면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 잔혹한 명령. 솜니아는 떨림 하나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 명령의 끝을 맺었다.
“이 밤이 가기 전에 히르멘툼이란 인간이 남겼던 삶의 족적을 모조리 지워버려.”
“예.”
“예.”
“예.”
일제히 대답한 기사와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방을 빼져 나갔다. 우리는 졸지에 뭉개진 시체들이 나뒹구는 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솜니아는 빠져나간 빈자리를 두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던졌다.
“…신발 가져다 달라는 걸 깜박했어.”
“신발 어딨는데?”
“저쪽에.”
솜니아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걸어가며 떠오른 의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딱딱 할 걸 다 짜놓은 거 같던데?”
“…미리 짠 게 맞으니까.”
피투성이 바닥을 지나 부서진 문을 나섰다.
“오늘 내가 쳐들어올 걸 예상하지는 못했겠고, 내가 안 왔어도 언젠가 그 늙은이를 숙청하려고 칼을 갈고 있었구나?”
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평소엔 자기 사람이 확실한 자만 주위에 데리고 다녀서 상황을 만들기가 애매했는데, 마침 딱 좋게 네가 나타나서 사고를 쳐줬어. 덕분에 깜짝 놀란 히르멘툼이 무방비하게 내 공간으로 들어왔고.”
“주제도 모르고 못생긴 자기 자식하고 너하고 결혼시키려든 김에 그 원한으로 숙청한 거야?”
“…아니?”
자그마한 얼굴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내 친척과 엄마 아빠 모두 히르멘툼의 사주로 죽었을 확률이 높아. 정황증거도 있어. 게다가 딱 봐도 비정상적이잖아. 나 빼고 가문의 일원이 모두 죽어버린 상황 자체가.”
“그럼 복수를 한 셈이네.”
“…복수 아닌데.”
“음?”
솜니아가 한 방문을 가리켰다. 그 문을 열자 가지런히 정리된 옷들과 여러 치장품들이 우리를 반겼다.
“…내려줘.”
내가 내려주자 솜니아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옷들 사이를 누비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가문의 사람들은 무능해서 죽은 거야. 히르멘툼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을 했을 뿐이고. 거기엔 별다른 감정은 없어.”
하얀 손이 한 벌의 옷을 골랐다. 하얀 바탕에 분홍빛 장식이 달린 원피스를 곱게 접어 자신의 팔 위에 올렸다. 지극히 평온한 어조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말을 전해왔다.
“…기르던 개한테 물리면 그건 전적으로 주인 잘못이잖아.”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솜니아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확실했다. 그녀에게 히르멘툼은 딱 ‘개’ 정도의 위치. 아마 솜니아는 지금 그녀가 부렸던 기사와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딱 기르는 ‘개’ 정도로 보고 있겠지.
“역시 맛탱이 간 꼬맹이가 맞네. 생각하는 게 벌써 사람 목숨 알기를 개똥만도 못하게 알고있…”
스륵하며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솜니아의 옷자락.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대로 방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옷 갈아입으려면 말하고 혼자서 갈아입어. 별 자랑도 안되는 몸뚱이 이리저리 다 내보이지 말고.”
사락사락 옷과 살결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솜니아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누가 조금 봐도 몸은 안 닳아.”
요즘 꼬맹이들 무섭네. 한마디를 안 져.
“남자든 여자든 조신할 때는 조신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몸가짐이 너무 가벼우면 좋지 않아.”
탁탁. 신발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솜니아가 신발을 신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발언. 젊은 오빠가 아니라 나이든 아저씨 같았어.”
“나 나이든 아저씨 맞는데.”
“…그 얼굴로 아저씨라 하고 다니면 세상 모든 아저씨들한테 맞아 죽어도 그냥 자연사야.”
신발까지 깔끔하게 신은 솜니아는 휘적휘적 걸어 방을 나섰다.
“어디 가는데?”
“…검 찾아줄게. 따라와.”
어차피 슬슬 검을 찾으러 갈까 싶던 차여서 솜니아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태 모든 상황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던 칼라게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 난세에 태어나서 살아남았다면 누구보다도 높게 올라갔겠군.”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야 살아남았을 경우에 이야기고, 열에 아홉은 그냥 단명했겠지.”
“아니. 내가 보기엔 적어도 열에 다섯은 살아남았을 거 같다. 저런 종류의 인간은 상황이 나빠지면 얼마든지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연기하는 데 능해.”
하긴 솜니아의 지금 저 특유의 느릿하고 굼뜬 모습도 일종의 자기방어를 위한 연기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진짜 저런 게 편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솜니아는 종종 걸음으로 저택을 빠져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본디 어둠으로 가득했어야 할 코렌틴의 밤은 솜니아의 명령으로 인해 이곳저곳에 밝은 빛들이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거기에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흐릿한 비명과 고함 소리는 덤이었고.
나는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더 떠올랐다.
“근데 기사들이랑 병사들이 네 말을 왜 그렇게 잘 듣는 거야?”
대규모 숙청이 자행되는 도시에서 작게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걷던 솜니아가 대답했다.
“…내 말을 잘 듣는 게 아냐.”
“그럼?”
“…자신들의 복수를 하는 거야. 기사고 병사고 전부 실력보단 히르멘툼 일가에 대한 복수심을 중요하게 보고 뽑았어. 그쪽 일가가 여기저기서 제법 원한을 많이 사고 다닌 덕분에 조금 편했어.”
솜니아가 아니라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서 움직이는 자들이란 거네.
“그걸 잘도 히르멘툼이 눈 뜨고 봐줬네.”
“…최대한 신분세탁을 해서 하나씩 몰래 들인 거야. 연 단위로 조금씩.”
“아니, 이거 몇 살 때부터 계획한 건데? 너 열다섯 살이라며?”
솜니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세고는 대답했다.
“…대충 일곱 살?”
이건 똘똘하다는 영역이 아니라 그냥 애한테 귀신들린 것에 가까운데.
“애가 귀여운 맛이 없네.”
“…나 귀여운데? 봐.”
솜니아는 자신의 귀여움을 증명하겠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브이 두 개를 만들어 나를 향해 내밀었다.
“…귀엽지?”
“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네.”
“…난 객관적으로 귀여워. 이대로 잘 크면 아마 얼굴은 미인이 될 거야. 가슴은… 아직 모르겠지만.”
“안내나 해. 헛소리 말고. 꼬맹아.”
“…”
의외로 솜니아가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지 점점 절망이 있는 장소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솜니아가 멈췄다. 솜니아의 안내 끝에 도착한 곳은 제법 커다란 창고였다.
사람들이라도 있는 건지 창고의 안쪽이 제법 시끄러웠다. 나는 그대로 우리를 막고 있는 건물의 외벽을 걷어찼다.
콰앙!
벽이 부서지고, 수많은 상자가 가득 쌓인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시끄럽게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는 건 경비대 복장을 한 이들이었다.
“누구냐!!!”
“하.”
이 꼬맹이가 왜 날 이리로 안내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야. 너. 쟤네들이 여기 있을 줄 알고 날 이리로 이끈 거지?”
솜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다른 방향을 보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꼬맹이라.”
“하, 너 안 되겠다. 완전 아픈 꿀밤 세 대 예약이야. 너.”
“…예약 취소.”
“그런 거 없어. 아주 그냥 쓰디쓴 꿀밤으로 네 몸이 어쩔 수 없는 꼬맹이란 걸 증명해줄 테니까 여기서 딱 기다려. 아주 눈물 펑펑 쏟게 만들어 줄 테니까 두려움 속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다려.”
“…솜니아?”
유일하게 익숙한 얼굴이 경비대원들 사이로 나타났다. 나와 칼라게인을 체포한 칼라게인(검정)과 커넥션이 있던 경비대원. 그가 앞으로 나서자 솜니아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히르멘툼의 막내아들, 히르탄이야.”
“개똥 같은 예상은 다 맞는 다더라니. 대충 그럴 거 같았어.”
나는 가볍게 발을 굴렸다.
그러자 내 발끝에서 타오른 암녹빛 선이 창고를 감싸 집어삼켰다.
‘산 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지고, 이제 내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살려줘도 네가 다 죽일 거지? 꼬맹아?”
“…응.”
“코렌틴 사법체계의 정점이 그렇다니 그럼 누가 뺏어서 죽이기 전에 내가 얼른 죽여야겠네.”
히르멘툼의 막내아들, 히르탄은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내 옆에 선 솜니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은 우리 가문의 사유지다. 대체 이 한밤중에 무슨 말도 안 되는 무례…”
“와, 진짜 무능하네. 쟤 정말 밖의 상황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은데.”
내 옆에 서 있던 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히르멘툼의 자식들이 전체적으로 좀 그래. 덕분에 몰래 일을 벌이기 꽤 쉬웠어.”
“자식 교육엔 영 젬병이었구만. 그 늙은이.”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제 말이 끊긴 히르탄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패였다.
“무례가 도를 넘어섰…”
“그건 네가 먼저 넘었지. 임마. 너, 내 검 왜 빼돌렸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최 모르겠군.”
발뺌하겠다는 건가. 나야 좋지.
“좋았어. 합격. 너, 고려의 여지도 없이 최초 합격이야. 축하해.”
원래는 최대한 아무도 안 죽일 예정이었지만, 이미 한 명 죽이고 온 이상 이젠 다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시체가 한 구나 두 구나 그게 그거니까.
“내가 딱 말해줄게. 내 검, 그거 멋대로 건드리면 설령 이 나라의 황제라도 내 손에 죽어.”
“무슨 그런 불충한…”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 팔목의 검은 팔찌에서 자라난 금속 선들이 서로 엉켜 들며 수많은 톱니가 달린 검의 형상을 취해갔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도살자가 굶주린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 굶주림에 먹잇감을 던져주었다.
도살자에 내려 찍힌 이름 모를 경비대원의 머리가 통째로 산산이 갈려 고기 조각이 되어 튀어 올랐다.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들이 내 얼굴을 흠뻑 적셨다. 아주 흠뻑.
또 하나의 살생을 저질렀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고기 조각과 핏물. 나는 깨끗한 손으로 대충 얼굴에 묻은 핏물과 살점들을 닦아내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히르탄을 향해 히죽 웃어주었다.
“야, 그거 알아? 네 아빠, 내가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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