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01)
301 화 빠밤.
빠밤.
– 그래서 소감은?
“후우. 무슨 소감이요?”
쉬지 않고 구른 탓에 얼굴을 타고 죽죽 흘러내리는 땀을 대충 닦아내며 임페트로를 쳐다보았다. 임페트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 처음으로 사도를 죽여본 소감 말이지. 또 뭐가 있겠냐? 응?
나도 임페트로를 따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대답했다.
“흠. 쉬웠는데 앞으로 쉽지는 않을 거 같다. 이 정도? 솔직히 하멜 그놈, 조금만 더 전투에 관심이 있던 놈이었으면 목숨 걸고 맞붙었어야 했을 거 같은데. 다른 사도들도 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잡는데 제법 고난과 역경이 있을 확률이 높아 보여요.”
– 하멜 그놈이 너무 호구 같은 놈이긴 했어. 사도가 되어서 쥐새끼들이나 풀어서 협박하는 시점에서 크게 되긴 아주 그른 놈이지. 암. 솔직히 이번은 사도 잡아본 경험이라기엔 가치가 없으니까 아예 없던 일로 치고 다음에 사도를 또 마주치면 처음으로 사도 잡아본다 생각하고 붙어. 알겠어?
“그러죠. 뭐. 하암.”
바닥에 아예 드러눕자 내 시야로 불쑥 새하얀 붕대투성이 얼굴이 튀어나왔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보고 말도 안 걸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나는 상투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할 말 있어? 설마 또 왜 하멜을 죽였느니,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라느니 헛소리할 거면 그냥 꺼져. 좀 쉬고 싶으니까.”
– 그럼 그 부분은 다시 말 안 하겠습니다.
내가 미리 말 안 했으면 또 말하려고 했단 거네.
“아니, 맨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느니 하면서 정작 너는 그 다른 방법이란 걸 제시하지도 않잖아. 그렇게 날 말리고 싶으면 잘나신 본인이 직접 방법을 짜내서 제시해보라고.”
–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한 번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럼 꺼져. 나는 너랑 더 할 말 없으니까.”
피부 하나 드러나지 않은 붕대투성이 얼굴. 그 단단히 감춘 얼굴 너머에 무슨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 옛날이랑은 너무 달라졌군요. 예전에는 그렇게나 절 따르면서 제가 하는 건 다 배우려고 하던 착한 아이였는데. 저랑 같이 시체 닦던…
“아, 닥쳐.”
신경질적으로 답한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상투스를 자칭하는 녀석이 나와 상투스와의 추억을 주워섬길 때마다 불쾌해서 참기가 힘들었다.
“가짜 주제에 자꾸 흉내 내려 들지 마. 상투스는 이미 죽었어. 대체 무슨 재주로 상투스의 기억을 얻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역겨우니까 그만둬.”
– 아무리 부정하셔도 제가 상투스입니다.
“꺼져. 아니다. 내가 꺼져줄게. 넌 엿이나 먹어.”
나는 녀석에게 중지를 먹여주고 곧장 심상에서 깨어났다.
안락한 침대와 내리쬐는 따스한 햇빛. 따사로운 그 온기가 내 뺨을 부드럽게 부벼대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암.”
작게 하품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주가 내게 제공한 장소는 그나마 멀쩡한 저택의 꼭대기 층이었다. 다만, 멀쩡한 집들이 너무 부족하단 명목하에 개인실까지 제공해주지는 않았다. 덕분에 넓은 방 안엔 침대가 대여섯 개쯤 더 들어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페르카, 레페, 솜니아와 함께 한 공간을 쓰게 되었다.
밥도 잘 나오고 따뜻한 물도 재깍재깍 제공되는 데다 침대까지 푹신해서 딱히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난 며칠간 그랬듯이 레페와 페르카 침상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창가 침대에 드러누워서 햇볕을 쬐며 골골대고 있는 솜니아에게 물었다.
“얘네 또 거기 갔어?”
끔벅끔벅 졸던 솜니아는 내 질문에 느릿하게 눈을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봉사활동 못해서 죽은 귀신에 씌였나. 무슨 하루종일 나가서 사람만 도와대고 있어. 이래선 집엔 대체 언제 갈 건데? 응?”
솜니아는 맹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한테 말해봤자 밖에 나간 둘한테는 안 들리는데.”
“하긴 그것도 그래. 아니지. 네가 가서 들은 대로 직접 전해주면 되잖아? 갔다 와 봐.”
“…귀찮아.”
“나도 그래.”
며칠동안 침대에 드러누워서 실컷 잠만 잤다. 정확히는 심상세계에서 임페트로와 수련을 한 거지만.
너무 누워있기만 했나. 그래도 살짝 몸이 찌뿌둥한데. 안 되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지개를 쭉 켰다. 놀기만 하던 근육을 쭉쭉 당기는 데서 나오는 특유의 시원함이 뇌를 시원하게 자극했다.
“…어디 가게?”
“산책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게.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누워있는 것도 질려버렸어.”
“…그럼 나도 갈래.”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솜니아가 나를 따라 기지개를 쭉쭉 켜더니 하품을 쩍쩍했다. 번져온 하품에 입이 저 혼자 솜니아를 따라 하품했다.
“하아암.”
“하아암.”
“으으으.”
시원하게 하품한 우리는 앓는 소리가 들려온 침대를 쳐다보았다.
그래, 멀쩡한 집이 부족한 탓에 이곳엔 우리 일행 말고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선홍빛 머리카락들과 그 사이사이 주홍빛으로 몇 가닥씩 물든 머리칼들. 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여인은 하멜한테 불을 갈기던 마법사였다.
명줄이 질긴 건지, 체키타가 응급처치를 잘한 건지는 몰라도 그렇게나 피를 철철 흘려댔음에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원래 이 세계 사람들이 몸의 내구도가 좋기는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충분히 치명상이었을 텐데.
이름이 아도라라고 했던가.
“그냥 죽는 게 나한테는 더 좋았는데 말이지. 신성도 얻고 말이야.”
내 말에 솜니아는 끙끙대는 아도라를 힐끔 보더니 내게 말했다.
“…저 정도는 나도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죽일까?”
“됐고. 산책 가기 전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으으으으…”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신음과 함께 무겁게 닫혀 있던 아도라의 눈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그녀는 드러누운 채로 힘을 쥐어짜내 말했다.
“다…들…리…거…든…”
나는 피식 웃었다.
“네가 들었다고 뭘 할 수 있는데?”
“물…좀…”
“너 손닿는 데 있는 물통, 아침에 레페가 채워뒀어. 그거 마셔.”
“힘…없…어…”
그냥 죽일까?
“솜니아. 네가 물 먹여주고 와.”
“…귀찮은데.”
“너 귀찮다고 내가 할까?”
“…칫.”
솜니아는 아도라용 물통에 빨대를 꽂아 아도라의 입에 물려주었다.
“밥 타 놓을 테니까 걔 물 다 주면 내려와.”
솜니아가 무척이나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휘적휘적 걸어 저택의 꼭대기 층에서 내려왔다.
이 건물의 또 다른 장점.
몇 안 남은 멀쩡한 건물 중 하나인 탓에 이 저택의 1층은 사실상 난민들을 위한 조리시설로 개조되어 하루종일 음식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밥 타 먹는 거 하나는 엄청나게 편했다.
계단을 따라 1층까지 내려오자 고기 익는 냄새가 훅하고 풍겨왔다. 바삐 돌아다니는 요리사 중 하나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대충 인사는 됐다는 의미로 손짓하고서 말했다.
“밥 2인분 챙겨줘.”
“예. 이미 조리된 거 있는데 바로 드릴까요?”
“우선 1인분만 바로 줘. 다른 1인분은 위에서 솜니아 내려오면 갖다 주고.”
“예.”
몇 없는 탁자들 가운데 대충 빈자리에 가서 앉아 기다리자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고기구이가 그릇에 반듯하게 담겨서 나왔다. 고기 말고는 딱히 다른 반찬이 없었지만.
나는 그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뻥 뚫린 창밖에는 머리 없는 거대한 괴수의 시체가 보였다.
대지의 마수 발라암은 이곳, 라투스에 떨어진 재앙이기도 했지만 모든 일이 대충 정리된 지금 일종의 구원이기도 했다.
저 엄청나게 커다란 덩치의 고깃덩어리는 그냥 저렇게 방치되어 있음에도 며칠 동안 썩을 기미도 없이 엄청나게 싱싱했다. 덕분에 발라암의 시체는 자칫하면 식량부족으로 위기를 겪을 수도 있었던 난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나야 맛이 안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들 말로는 고기 자체도 엄청 맛있다고 하고.
발라암의 가죽이나 발톱도 제법 질이 좋아 다 같이 달라붙어서 열심히 채취하고 있다고 들었다. 듣기로는 아마 제대로 팔아치우기만 한다면 도시를 다 복구하고도 엄청나게 남을 거라던데.
이 도시의 영주는 아주 그냥 돈방석에 앉은 거나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자면 저 괴물의 시체는 내 전리품이었지만, 이젠 딱히 돈 문제에 구애되는 상황도 아닌지라 그냥 별말이 없이 내버려 두고 있었다.
영주 놈이 눈치란 게 있다면 알아서 나한테 뭘 좀 챙겨줄 텐데 말이야.
근데 정작 아직도 나는 영주랑 따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무섭기라도 한 건지 영주는 딱히 내게 별다른 요구를 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영주쪽 사람이랑 접촉하는 건 가끔 체키타가 내 안부를 물어보는 정도뿐.
고기를 몇 점 더 집어먹자 계단에서 솜니아가 느릿느릿 걸어서 내려왔다. 솜니아는 내가 앉은 자리를 발견하더니 걸어오면서 요리사 하나를 불러 자기 몫의 식사를 요청했다.
따뜻한 고기가 접시에 담겨 나오고 솜니아는 고리를 잘라 한 입 집어넣더니 짧게 감상을 말했다.
“…물려. 맨날 같은 거만 먹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 과일 먹고 싶어.”
“그 고기 맛있다며?”
“…맛있으면 뭐해.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어야 하는데. 너무 똑같은 맛이라 이젠 삼키기가 힘들어.”
투덜투덜대면서 한 점 더 고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은 솜니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바쁘게 요리하는 요리사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좀 다양한 조리 방법을 썼으면 좋겠는데.”
“도시 사람들 다 먹여야 하는데 그건 힘들겠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임시 조리소가 있긴 했지만, 겨우 몇 곳이 도시 전체를 먹이는 요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쉬운 조리방식으로 통일해서 하루종일 요리한다고 해도.
“…안 되겠어.”
“안되면 네가 어쩔건데?”
솜니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주의 식량창고를 털 거야. 거기엔 분명 과일이 있을 거니까.”
“그냥 체키타한테 말해. 그럼 과일 몇 개 가져다주겠지. 과일이 있다면 말이지만.”
“…체키타랑 자주 접촉하면 원래 신분이 들통날 확률이 높아져. 그래서 안 돼.”
“그래. 열심히 해봐.”
“…도와줘.”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내가 왜 널 도와서 과일을 털어야 하는데? 어차피 나는 음식에 별 불만 없어. 어차피 맛이 안 느껴져서 다 똑같거든.”
“…엄청 심심하잖아.”
“…”
“…그리고 사과는 아삭해. 맛은 못 느껴도 사과가 아삭한 건 알지 않아?”
맞는 말이긴 했다. 맛을 못 느끼는 거지 촉감이나 이런 건 멀쩡했으니.
“…아삭아삭. 과즙 철철.”
“하아.”
나는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입에 밀어 넣고 피식 웃었다.
“견과류나 말린 오징어 같은 거 같이 씹을 것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내 대답에 솜니아는 주먹을 꼭 쥐고는 승리의 표정을 지었다.
“…좋았어.”
***
저택을 나와 문 앞에 서 있자 잠시 후 솜니아가 쪼르르 튀어나왔다. 나는 솜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어?”
“…요리사들한테 정보 수집하고 왔어. 털었는데 개털이면 김 새니까.”
“그래서 뭐 좀 건졌어?”
“…계획 변경. 영주 말고 딴 사람 터는 게 나아 보여. 영주 식량창고는 이미 깔아뭉개져서 없대.”
그렇네. 식량창고가 뭉개졌을 수가 있었네.
“그럼 어딜 털자고?”
“…이 상황에 보따리를 안 푸는 악덕 상인이 있대. 그 사람 창고를 터는 게 좋아 보여.”
“그래. 어딘지 알아?”
“…대충 들었어.”
나한테 대답한 솜니아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하나 꺼내더니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 마스크처럼 입가를 가리고는 말했다.
“…괴도 출현. 빠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울리는 동질감을 느꼈다.
“너도 어지간히 심심했구나?”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