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1)
331
잠깐의 여유?
“하아.”
“하아.”
그림자를 너머를 건너 드디어 우리는 다시 페르카네의 고향 도시에 도착했다. 해가 고개를 빼꼼 내밀던 아침에 떠났던 우리들인데, 정작 다시 돌아오니 해는 이미 어둑하게 져서 밤하늘의 별들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사실, 그 화물 창고의 물건들을 전송하는 것도, 구원의 사도 작은 교전을 치른 것도 실제로 따지자면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전송된 화물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다시 나타난 마라트가 아직 ‘미분류된 화물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안내했을 뿐.
그곳엔 그림자 교단의 사제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인부들까지 합쳐 수십이 넘는 사람들이 바쁘게 화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지젤은 그곳에서 화물들이 분류되는 대로 계속해서 권능을 사용해 화물들을 전송했고, 마라트는 권능들을 난사해대면서 지젤이 옮기기에는 지극히 소량인 물건들을 이곳저곳으로 옮겨댔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무척이나 신중하게 하나씩 정확한 장소로 보내는 걸 보면, 아마도 마라트가 직접 옮기는 물건들은 고객 중에서도 VIP들에 해당하는 자들이 운송을 의뢰한 것들로 추측됐다.
정작 문제는 열심히 일하는 지젤 옆에서 뻘쭘히 서 있던 나였는데, 이게 다들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나만 덩그러니 서서 시간만 죽이고 있자니 시간도 잘 안 가고 눈치도 조금 보여서 그냥 빨리하고 빨리 가자는 마음으로 일을 돕기 시작했다.
마라트 녀석은 진짜 교단의 사업에만 미쳐있는 거 같아서 굳이 지젤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기도 했고.
그렇게 하루종일 바삐 움직여서 일한 결과, 거의 산처럼 쌓여있던 화물들을 대부분 처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조금 남긴 했지만 마라트가 말하길 그 정도는 자기들끼리도 충분하다며 이만 가봐도 괜찮다고 말했다. 지젤과 나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었다. 마라트가 내뱉은 말을 번복할 기회 따윈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지젤을 쳐다보며 말했다.
“갑자기 마라트가 우리를 쫓아서 뛰어올 땐 진짜 놀랐어. 또 일 시킬까 봐.”
지젤은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완전 동감이야.”
나는 마라트가 건네준 새카만 구슬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마라트가 우리를 쫓아온 건, 아직 덜 끝마친 일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직접 찾아와서 오늘 도와준 사례를 따로 하겠다고 다음 만남을 위한 매개체인 검정 구슬을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이게 있어야 좌표를 따서 찾아오기 쉽다나.
새카만 가운데, 페르카네 고향 도시의 안은 도시 특유의 빛을 내뿜으며 빛났다. 나는 바로 찾아갈까 하다가 지친 지젤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지하 요새에서 밥 먹고, 씻고 한숨 잔 다음에 페르카네를 찾아갈까?”
오늘 하루종일 권능을 흩뿌리다시피 한 지젤은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밥도 네가 내 방으로 가져와 주면 안 돼? 나 진짜 당장은 손끝 하나 제대로 못 움직이겠어.”
“디스펜스한테 부탁하면 가져다줄 거야.”
털썩.
지젤은 잡초가 무성한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거로 모자라서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하아. 지친다.”
나는 서서 그런 지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권능 한 번은 더 써야 할걸. 여기서 지하 요새로 바로 가려면 네가 직접 힘을 써야지.”
“못해! 아니, 안 해! 그냥 네가 옮겨줘. 마르낙. 나 진짜 힘없어. 혹시나 마라트가 기습하는 건 아닌가 하고 계속 긴장하면서 권능을 쓰느라 더 지쳤다고! 네가 옆에 서 있었으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중간부터 자기 일도 아닌데 도우러 가서는…”
지젤은 나를 올려다보며 연신 투덜댔다.
대범하게 굴길래 그런 건 전혀 걱정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그건 내 실수가 맞았다. 지젤을 생각했으면 눈치가 보여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옆에 있어 줘야 했을 텐데.
나는 디스펜스를 호출하고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미안.”
“됐어. 탓하려고 말한 거 아니야. 그냥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신경이나 좀 써달라고 말한 거지.”
“알았어.”
잠시 내려앉은 침묵 속, 자그마한 벌레가 지젤의 하얀 얼굴 위로 기어오르고 지젤은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기어오르는 벌레를 손가락으로 쳐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거 알아?”
“뭐?”
“너, 우리가 구원의 사도를 쫓아내고 나서 나한테 옛날처럼 존댓말 썼다?”
“내가?”
그랬나? 안 그랬던 거 같은데.
“흐음. 기억이 없는데?”
“아니, 썼어. 나한테 ‘한동안 대륙 서부 쪽은 쳐다도 보지 말죠.’이랬다고.”
지젤은 답지 않게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시늉까지 하면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잘 못 들었겠지.”
“역시 너…”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반말은 컨셉? 그런 느낌이지? 사실은 너무 존댓말만 해와서 반말보다 존댓말을 쓰는 게 더 편하고 그런 거 아냐?”
“뭐래. 헛소리해대는 거 보니, 아직 덜 피곤한가 보네. 그럴 거면 권능 한 번 더 써서 요새로 바로 가자고.”
지젤은 그저 고개를 슬쩍 내게서 돌림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진짜 네 반말 들을 때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사람이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다니는 느낌이야. 아직 내가 덜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지하에서부터 무언가 파고 올라오는 진동이 느껴지고,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하요새로 향하는 승강기가 대지를 뚫고 튀어나왔다.
나는 지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일어나. 승강기 왔어. 가자.”
지젤은 여전히 잡초들 사이에 몸을 파묻은 채, 눈까지 꾹 감고서 말했다.
“네가 좀 옮겨줘. 나 진짜 힘없어서 손끝 발끝 하나 까딱 못하겠어.”
“하아.”
작게 한숨을 내뱉은 나는 드러누운 지젤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지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목에 팔을 감아왔다.
“손끝 발끝 하나 못 움직인다며?”
지젤은 내 품에 안긴 채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목을 안 받쳐주니까 이렇게 내가 널 붙잡을 수밖에 없지. 안 그럼 목 아파~.”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을까도 생각했지만, 디스펜스가 지젤을 옮기러 단말을 보내는 것도 한 세월인 데다 지젤이 이렇게 퍼져버린 데는 내 책임도 어느 정도 있기에 그냥 지젤을 안아서 승강기 위로 올라탔다.
우리가 위에 올라서자 금속 승강기는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하강을 시작했다.
지젤은 내 품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말했다.
“방까지 옮겨줄 거지?”
“디스펜스한테 옮겨달라고 할 건데?”
“어차피 별 힘도 안 들면서 쩨쩨하게 굴기는. 쫌생이.”
지젤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이내 내 목에 감겨 있던 팔의 힘이 조금씩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젤의 목을 받칠 수 있게 조금 자세를 바꾸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 새에 곯아떨어지네.
“…밥은 나 혼자 먹어야겠네.”
요새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지젤을 방까지 옮겨다 준 후, 대충 알약들을 털어먹고 내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아침, 밥 먹으러 가자고 날 찾아온 지젤이 기세 좋게 기지개를 쭉 켜며 신음을 내뱉었다.
“으아아아. 살겠다. 완전 푹 잤네. 근데 오늘 뭐 할 거야?”
“페르카네 찾아가야지. 약속했으니까.”
“그럼 나 밥 먹고 좀 씻을 테니까, 같이 가자.”
“그래.”
가볍게 밥을 먹은 우리는 씻고 대충 준비를 끝마치고서 다시 모였다. 지젤이 가볍게 바닥을 발로 툭툭 두드리자 새카만 그림자들이 일어나 우리를 집어삼켰다.
찰나의 암전이 지나고 우리는 어둑한 골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는 지젤에게 물었다.
“여기 어디야?”
“디스펜스한테 추천받은 곳으로 이동한 건데? 여기 있으면 아마 페르카가 마중 나올 거랬어. 어, 저기 보인다.”
지젤의 말대로 저 멀리서 페르카가 환히 웃으며 우리에게로 재빨리 뛰어왔다. 우리 앞에 당도한 페르카는 잠깐 숨을 고르고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형, 조금 늦으셨네요! 전 어제 바로 오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 이거 받아.”
나는 미리 챙겨온 사람 머리만 한 주머니를 페르카에게 내밀었다. 페르카는 주머니를 받아서 안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야 안에 든 게 황금이었으니까.
“이거 뭐예요?”
“돈벼락 맞은 김에 너희 집이랑 레페네 집이 도시의 시장이랑 말해서 오늘 자그마한 축제를 연다며? 기껏 돈 번 걸 축제로 그렇게 낭비하면 어쩌잔 거야. 진짜. 그냥 좀 챙겨왔어. 축제여는데 보태 써.”
“와!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 이거 받아도 될까요?”
“됐어. 별거 아냐.”
진짜 별거 아니었다. 지난 5년간 디스펜스가 지속적으로 채굴하며 자원을 쌓아둔 결과, 제법 많은 광물들이 요새의 저장고에 축적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의 나는 제법 많이 부자였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돈이 많음에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럼 저희 집으로 바로 갈까요? 가족들한테 소개해 드릴게요!”
“아니. 그건 괜찮아.”
“네?”
페르카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나는 쓰게 웃었다.
“네 가족이 내 얼굴을 모르는 편이 더 좋을걸. 특히 한동안은. 다음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인사하자. 그편이 너나 나나 좋을 거야.”
“…형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요.”
“도시 구경이나 시켜줘. 마침 너희 집에서 축제도 열잖아.”
“예!”
언제 살짝 침울했냐는 듯, 페르카는 앞장서서 자신의 고향 도시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저기는 저희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이신…”
뭐 그리 다 아는지, 전부 페르카가 아는 집투성이여서 그가 소개를 하느라 우리의 걸음걸음은 무척이나 느렸다.
“근데 레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길래, 너 혼자야?”
“아, 레페는 축제 업무를 돕고 있느라 바빠요. 워낙에 갑자기 열렸다 보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요.”
“그건 그래. 나는 이렇게 급하게 열 필요가 있나 싶은데.”
페르카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날 바라보며 웃었다.
“그야 이렇게 급하게 안 열면, 형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실 테니까요. 정작 저랑 레페가 고향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형 덕이 제일 크니까, 웬만하면 형이 있을 때 축제를 열고 싶어서 제가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잘했죠?”
그 강력한 주장 때문에 레페랑 페르카네 가족들이 죽을 둥 살 둥 바쁘게 일하고 있겠구만.
갑자기 굳이 지금 페르카랑 레페네 가족들 얼굴 안 보러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분명 내가 얼굴을 보이면 반쯤 원망 어린 시선들이 꽂힐지도 모르겠어.
“…잘했네.”
기왕 한 거 저렇게 웃고 있는 애한테 잘못한 점을 지적하기도 뭐해서 칭찬해줬다. 그러자 페르카의 얼굴 위로 뿌듯함이 번져나갔다.
“역시 하루만 더 여유를 두고 축제를 여는 게 어떻냐고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는데 제가 절대 안 된다고 말하길 잘했네요!”
“…그래. 그래도 다음부턴 부모님 말씀 귀 기울여 듣는 게 좋아 보이는데.”
“그러죠. 뭐. 아, 여기부터가 저희가 축제를 연 구역이에요! 파는 음식들 다 재료값만 받고 팔고 있으니까 엄청 싸요! 나머지는 저희가 부담하고 있거든요! 조금 더 가면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곳도 있으니까 가서 드셔도 돼요!”
임시로 이것저것 지어진 거리에는 복작복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페르카를 발견하자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마다 말들을 건네왔다.
“페르카! 크게 한탕 벌었다며? 축하한다!”
“축제 열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하루 쉰다!”
“임마! 너 크게 한탕 했다며? 나중에 술 사! 축하한다!”
“야! 너 어디 갔던 거야! 당장 따라와! 축제를 연 주인공이 없어지면 어쩌자고! 기념으로 한두 마디라도 해야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너네 아버지도 너만 찾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허겁지겁 뛰어온 페르카의 친구 야울이었다. 그는 페르카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사라졌고, 끌려가던 페르카는 곧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그동안 축제를 즐기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는 그대로 끌려가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나와 지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저거 못 돌아오겠지?”
“아마 하루종일 붙잡혀 있을걸. 아무래도 페르카네 집이 도시에서 제법 위치가 있는가 본데. 지역유지인가 봐.”
“비슷할걸?”
지젤은 사람이 북적대는 거리를 바라보다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쩔 셈인데?”
나는 그녀를 따라 축제로 북적이는 거리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밝고, 행복한 그 거리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저 지금의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그냥 요새로 돌아가서 한숨 더 자고 와야겠어. 페르카랑 레페네가 좀 한산해지면 슬슬 작별인사하고 떠나야지. 내가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일 없어. 너는 놀고 싶으면 더 놀다 와. 먼저 간다.”
나는 등을 돌리고 지젤과 축제를 뒤로 한 채 지하 요새에 가서 쉬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젤은 구경을 좀 더 하겠다고 대답하곤, 굳이 떠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끼익.
지하요새로 돌아와 사람이 눕기엔 조금 많이 딱딱한 내 침대에 몸을 눕혔다.
축제나, 푹신한 침대, 그런 기분 좋고 밝은 일들은 지금의 내겐 허락되어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앞으로 내가 저지를 일에 대한 염치가 내게 있다면.
임페트로랑 수련이나 해야지.
누워서 천천히 눈을 감으려 하자, 일렁이는 신성과 함께 천장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천장을 집어삼킨 거대한 그림자가 그대로 떨어져 내려 나를 집어삼켰다.
왁자지껄한 소리.
찰나의 부유감과 함께 나는 어느새 축제의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는 나를 이곳에 불러낸 범인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지젤, 지금 이게 무슨 짓…”
잘 익은 냄새가 나는 고기 꼬치가 내 입안으로 쑤욱 밀려들어 와 내 말을 끊었다. 내 입에 꼬치 하나를 밀어 넣은 지젤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혼자 궁상떨 시간은 내가 충분히 줬잖아? 그러니 이제 나랑 좀 놀아줘. 앞으로 한창 바쁠 텐데. 이 정도 여유는 괜찮다고 봐.”
내가 아무 맛도 안 나는 고기들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자, 지젤이 고기 먹고 남은 나무 막대를 뺏어서 근처의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내 손을 멋대로 잡아끌었다.
나는 지젤을 멈춰 세우고서 말했다.
“너는 몰라도, 나는 이래선 안 돼.”
시끄러운 소음들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하얗고 검은색이 일렁이는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엔 그녀가 말한 대로 궁상맞을지도 모르는 표정을 한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아이 같아 보이는 멍청한 얼굴이.
나를 비추던 거울 같은 눈 위로 눈꺼풀이 내려앉고, 한 쌍의 아름다운 눈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왜 나는 되고, 너는 안돼? 우린 이제 공범인데?”
“착각하지마.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전부 온전히 내 죄야. 너는 그저 내게 이용당할 뿐인 거고.”
“아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거구나? 그럼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지젤이 내 목에 팔을 감았다. 불쑥 다가온 새하얀 얼굴이 내 귓가에 대고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여댔다.
“앞으로 지을 네 죄의 반은 내가 덜어갈게. 그러니 내가 덜어간 만큼만 좀 더 여유를 가져봐. 마르낙, 주위를 봐. 다들 웃고 있잖아.”
그녀의 말대로 축제의 한복판엔 미소와 웃음들이 만연한 꽃처럼 가득했다. 그녀는 내 귀를 간질이듯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리고 적어도 아직은 우리 아무것도 안 했잖아? 아직까지는 우린 완전 무죄라고. 그러니 조금 즐기더라도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구. 안 그래?”
그 꽃의 꿀 같은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 지젤이 내 몸을 어디론가 이끌었다.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이 물러나 공간을 비우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악사들과 함께 즐거운 음악 소리가 광장 속으로 울려 퍼지며 여러 쌍의 남녀들이 빈 광장을 채우며 저마다 음악에 맞춰 간단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젤은 지금, 이 순간을 노리고 나를 불러내기라도 한 듯, 나를 이끌며 주변의 남녀들과 같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뻣뻣하게 굳어있자, 지젤이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나, 무안하게 만들 거야? 네가 그렇게 뻣뻣하게 있으면 다들 내가 바람맞은 여자인 줄 알걸? 봐, 슬슬 조금씩 우리를 쳐다본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조금씩 움직여 지젤과 춤을 맞추자, 지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내가 너 없는 사이에 여기 춤을 조금 배워뒀으니까 나만 따라와. 너, 몸 쓰는 건 잘하잖아. 금방 배울 거야.”
“대체 뭘 하자는…”
“뭐긴 뭐야.”
춤 동작의 일부인지, 의도적인지는 몰라도 거의 품에 안기듯이 지젤이 내게 불쑥 다가왔다. 훅하고 밀려오는 향긋한 체취. 주변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악 소리 속에서 자그마한 속삭임이 귓가로 들려왔다.
“조금, 아주 조금만 놀자는 거지.”
다시 멀어진 지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르낙, 샌님 같은 말은 딱 여기까지만 하고 춤이나 춰. 콱 발 밟아버리기 전에.”
***
축제가 끝나고 다음 날.
레페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말했다.
“큰일 났어요! 페리토드 언니가 납치당했어요!!!”
“그게 무슨…”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 오른팔의 팔찌에서 또 하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스펜스는 유례없이 급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 후계자님! 황금! 황금빛 용이 지금 도시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관측한 바에 따르면 용의 등에 타고 있는 건 바로 다키아 공녀님입니다! 당장! 그곳에서 당장 도망치십시오! 후계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