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9)
339
보랏빛 지네 켄티페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마력 기관의 일시적인 손상으로 정신을 잃었던 거다.”
역시나 깨어난 마법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팔다리를 꽁꽁 묶고, 혹시 몰라 눈까지 주변에서 구한 천으로 꼭꼭 가려뒀다. 마법사의 목에 올려둔 절망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만일 조금이라도 마력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바로 목을 쳐버릴 만반의 준비를 끝낸 채로.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날 보고 머릿속에 있어선 안 될 것이 들어있다고. 그 말도 기억 안 나?”
“흠.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그의 가려진 눈이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법사는 조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안 나는군.”
듣는 사람 힘 빠지는 대답. 나는 뭐라도 더 정보를 캐보려고 던질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내 옆에 서 있던 지젤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말을 걸어왔다.
“근데 묘하게 서늘해지지 않았어?”
한마디 질문과 함께 새어 나온 입김이 허공을 하얗게 수놓다 사라진다. 거대한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페리토드는 이불 틈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서 지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서늘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아예 추운데? 페르카, 레페. 너희도 춥지? 이리와. 이불 같이 덮자. 이거 되게 두꺼워서 제법 따뜻해.”
진짜로 추웠던 건지, 레페랑 페르카도 조용히 걸음을 옮겨 페리토드의 침대 위 아주 커다랗고 두꺼운 이불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창밖을 보니 분명 한낮일 텐데도 밖이 조금 어두웠다. 눈은 여전히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펑펑 내려대고 있었고.
아니,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이 내리나?
“뭐지? 갑자기?”
“그건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문제군.”
나는 다시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페리토드 말로는 이름이 보랏빛 지네 켄티페스랬나.
옛날 마법사들은 본인 이름 앞에 동물을 꼭 붙이는 게 전통 같은 건가. 아니면 저쪽 무리만 붙인 건가.
시답잖은 잡생각을 저편으로 구겨 던졌다.
“뭔데?”
“내릴 리 없는 때에 내리는 눈. 저 눈은 사도의 소행이다.”
“그건 이미 알아.”
“그리고 내가 그 사도를 억제하고 있었지. 아까보다 추워졌다고 너희가 느끼는 건 착각이 아니다. 그저 사도가 불러일으킨 현상을 억제하고 있던 내가 없어져서 벌어진 당연한 현상일 뿐.”
황궁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어도,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건 아니라는 거네. 하긴, 자신이 거점으로 삼으려는 곳인데 다른 놈이 망가뜨리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켄티페스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당장 풀려난다고 해도 이미 궤도에 오른 현상을 되돌릴 순 없다. 아마 빠른 시일 내로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릴 거다. 이 현상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이 도시 내에 숨어 있는 사도를 죽이는 것뿐.”
“아니지. 다른 방법이 있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야 여길 뜨면 그만인걸. 쓸데없는 주제로 말 돌리지 마. 흠.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한테 굳이 더 캐물을 것도 딱히 없는 거 같은데. 너, 아까 상황 기억도 안 난다며?”
“네 말은 틀렸다.”
담담한 어조로 날 부정한 마법사는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쳐다보았다.
“네가 내게서 무슨 대답이 듣고 싶었든. 설령 내가 네가 원하는 부분에 대한 기억을 잃었더라도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 한 번 알아냈다면, 두 번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기에.”
“오. 제법 말이 되는데?”
제법 솔깃한 말이었다. 하긴, 그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을 잃었으면 어떤가. 다시 또 알아내면 되는 거지.
“근데 그냥 딱 말만 돼. 내가 뭘 믿고 또 너한테 마법을 쓰게 해주겠어? 안 그래? 머리도 제법 잘 굴러가는 거 같은데. 너 같은 녀석한테 마법을 쓰게 해줬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당장 죽여버리는 게 나한테 있어 위험을 최소화하는 수라는 건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 오롯이 상투스가 내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려서 주저하고 있는 것일 뿐.
진짜 이걸 어쩌지.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하고, 그냥 죽여버리자니 상투스 때문에 너무 찝찝하고.
켄티페스는 조금 시간을 두고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의 목적은 페리토드를 데리고 떠나는 것이겠지?”
“일단은 그래.”
“그럼 잠시 그녀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 그녀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그러던가.”
어차피 상황은 내 통제 아래에 있고, 대화 정도야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다. 내가 페리토드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꼼질대며 침대에서 내려와 켄티페스의 앞에 놓인 의자로 와서 앉았다.
페리토드는 지극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켄티페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뭔데? 뭘 제안하려고?”
내게로 향해있던 켄티페스의 얼굴이 페리토드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는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황실의 피가 이어진 마법사다. 나는 마법사를 이 나라의 황제로 앉히고자 하고 있지. 그게 굳이 ‘너’여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내게 계획이 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나라의 수상과 거래했다. 이 나라 황제의 자리에 앉는 마법사와 그의 자식을 결혼시키기로. 수상의 자식과 결혼해서 아이를 하나만 낳아다오. 나는 동족의 자식이라면 강제로 그 능력을 일깨울 방법이 있다. 너희들 말로 설명하자면 그 아이를 강제로 마법사로 만들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그는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는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아니, 더 좋은 제안을 하지. 굳이 수상의 자식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어디서 적당히 아이 하나만 만들어와서 낳아라. 그 뒤의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해주지. 그럼 넌 평생 자유다. 페리토드.”
“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페리토드는 자그마한 감탄사와 함께 나와 켄티페스를 번갈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켄티페스의 옆구리를 그대로 후려 찼다.
“컥?!”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켄티페스가 바닥을 한바퀴 데굴 구르고 페리토드는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빽하고 소리쳤다.
“내, 내가 무슨 애 낳는 가축이야?! 무슨 사람한테 누구랑 결혼해서 애만 하나 낳아오라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고 자빠졌어!!!”
“자빠진 건 걷어차인 내 쪽이다만. 날 좀 일으켜주겠나? 팔다리가 묶여서 혼자 일어날 수가 없군.”
내가 녀석을 일으켜서 다시 앉혀주자 그는 다시 페리토드를 향해 진지한 설득을 이어나갔다.
“결혼은 해야겠지만, 수상의 자식과 굳이 동침하지 않아도 좋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지. 너는 그저 네가 마음에 드는 남자와 아이 하나만 만들어오면 된다. 그럼 네 아이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거다. 거기다 살짝 덧붙여서 설명해주자면 수상의 자식들 얼굴은 꽤 괜찮은 편…”
“싫어! 이 자식아!!!”
빡!
“컥?!”
다시 걷어차인 켄티페스가 바닥을 데굴 굴렀다.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가 벗겨지고 연한 붉은 빛이 도는 자주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지극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도.
아까 포박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저 녀석 생긴 것만 보면 채 20살도 안 되어 보였다.
고대 마법사들은 나이를 안 먹는 비법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두 번 연속으로 차인 건 조금 억울했는지, 켄티페스는 당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네 아이를 황제로 만들 기회다. 네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주기에 더 없는 선물이지. 객관적으로 봐도 네게 지극히 유리하고 이득밖에 없는 제안이다. 대체 왜 거절하는 거지?”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모르는 남자랑 정략결혼하고 적당히 마음에 든 남자랑 애 만들어오라는 게 대체 어떻게 이득밖에 없는 제안이라는 건데?! 너 머리가 맛 가도 제대로 맛 가 버린 거 아냐?”
페리토드는 씩씩대며 켄티페스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 그렇게 황제가 좋으면 그냥 네가 황제해! 뭘 귀찮게 다른 황실 혈통의 마법사를 구하고 난리야!”
“그것이 충돌을 최소화하는 길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내가 황제 자리에 앉으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게 될지 생각은 해보고 하는 말인가?”
그는 페리토드에게 걷어차여서 바닥에 쓰러진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구차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무척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나는 그저 신들이 우리에게서 앗아갔던 것들을 되찾고자 할 뿐이다. 이 지상은 본디 우리 동족의 것이었다. 너는 네 것을 누군가 멋대로 앗아간다면 이미 빼앗겨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물러날 것인가? 빼앗긴 것을 되찾고자 하는 건, 그 원주인 된 당연한 도리다. 나는 그저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질 유혈사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뿐.”
마력의 전조도 없이 튀어나온 자그마한 보라색 마력의 사슬이 그의 손발을 묶고 있던 줄과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잘라냈다.
녀석을 향해 반사적으로 절망을 내뻗었지만, 그는 사슬들을 움직여 내 간격에서 가뿐히 벗어났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녀석을 추격하려던 그때. 켄티페스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 사제. 나는 대화를 원한다.”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화를 원했으면 묶인 채로 바닥에 계속 드러누워 있지 그랬어?”
어느새 회복한 건지, 그는 선명한 자줏빛 문양이 떠오른 눈으로 페리토드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옆구리를 한 번 더 찰 기세라 피했다.”
내가 쳐다보자 페리토드는 그제야 조용히 살짝 들었던 발을 내려놓았다. 켄티페스는 페리토드의 발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좋다. 그럼 1년. 딱 1년만 네 시간을 투자해라. 원하지 않는 남자와 동침할 필요도,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내가 1년 뒤에 적당한 마법사 아이 하나를 찾아와 네 아이라고 꾸밀 테니, 너는 그저 수상의 자식과 명목상 결혼하고 그 아이가 네 아이라고만 공표하면 된다. 어떤가?”
“싫어!!!”
페리토드는 질색하는 얼굴로 외쳤다.
“전국민에게 공표된 애 딸린 유부녀가 되라고? 아니, 내가 나중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만나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날 볼 때마다 수군댈 거 아냐! ‘애 딸린 여자가 또 결혼했네.’라든지, ‘저거 바람피우는 거 아냐?’라든지!”
그녀는 멀쩡한 상태의 켄티페스를 경계하며 거리를 슬슬 벌리면서도 할 말은 다 내뱉었다.
“너 완전 진짜 미친놈아냐? 사람의 마음이란 게 없니? 넌?”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
“보상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내가 싫다고! 내 인생은 내가 그려나갈 거야! 완벽하게 새하얀 백지에 내가 내 뜻대로 그려나갈 거라고! 아니, 그렇게 동족을 위해서라고 해대면서 정작 그 동족 중 하나인 내 뜻은 네가 필요에 따라 짓밟겠다는 것도 웃긴 거 아냐? 응? 대답해봐!”
그 통렬한 일침에 켄티페스가 조금 동요했다.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지적당하기라도 한 듯 혼자 무어라 작게 중얼대더니 페리토드를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군. 내가 그간 너무 오래 연옥에 갇혀 있었나.”
“그렇지?”
“그럼 황실의 피가 섞인 마법사는 어떻게 구해야 하지?”
“네가 직접 낳아! 네가 적당한 황녀 하나랑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되잖아! 안 그래? 응?”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못 들을 걸 듣기라도 한 듯이 켄티페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보고 저 되다만 것들하고 몸을 섞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상상만으로도 토할 거 같군.”
페리토드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내게 말했다.
“아니, 방금 쟤 표정 봤어? 지가 나한테 시키려던 거 그대로 하랬더니 표정 썩는 거?”
뭐가 ‘예상외로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냐.
역시 상투스가 한 이야기는 전부 헛소리였다.
저 녀석도 칼라게인처럼 어딘가 비뚤어진 마법사일 뿐. 그 긴 시간 갇혀 있던 탓에 잔뜩 뒤틀려버린 인간이었다.
나는 절망을 다잡았다. 녀석과의 간격을 재며 단칼에 목을 베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일그러져있던 켄티페스의 얼굴이 펴지고, 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무래도 이 건은 좀 더 고민해봐야겠군. 가라. 페리토드. 떠나도 좋다. 더는 붙잡지 않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의외의 허락이었다. 그 허락에 조금 당황해서 우리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쿵쿵.
묵직한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고, 닫혀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살이 잔뜩 찐 근엄한 인상의 중년 사내는 헐떡거리면서 땀까지 뻘뻘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켄티페스를 발견하곤 그에게 달려들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자, 자네! 여, 여기 있었군! 계속 찾았네! 조금 전부터 모든 게 이상해! 사, 삶이 지극해 불행해! 어, 얼른 다시 내게 마법을 걸어주게! 그 마법을!!!”
켄티페스는 중년 사내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다 깊은 한숨을 한 번 더 토해내고는 말했다.
“제 눈을 보십시오. 폐하.”
중년 사내와 켄티페스의 눈이 맞고, 켄티페스의 눈 위로 떠오른 문양이 빛을 발했다. 창백하게 질렸던 중년 사내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지극히 평온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천천히 걸어 다시 복도로 떠나갔다.
근데 방금 폐하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켄티페스를 쳐다보자, 그는 내 생각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금 저 사내가 바로 남제국의 황제다.”
“너, 황제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표현에 오류가 있군. ‘무슨’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다. 내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 황제는 이미 저 상태였다. 무언가에 중독되기라도 한 듯, 그 금단증상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 마법은 저런 중독자들에게 제법 효과적이지.”
“네 마법이 대체 무슨 마법인데?”
켄티페스는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내 마법은 그 사람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행복한 세계를 보여주지. 스스로가 바라던 이상적인 행복을 직접 자기 손으로 내버리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내 마법은 깨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까 내 마력기관에 손상이 가면서 황제에게 걸었던 마법이 깨졌던 거 같군.”
이상의 행복을 보여주는 마법이라고? 나는 어째서 사도인 지젤마저 켄티페스의 마법에 쉽게 당해서 잠시 저지당했던 건지 깨달았다.
근데 지젤은 대체 그의 마법을 통해 뭘 봤을까?
내가 지젤을 쳐다보자 그녀는 눈을 끔벅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네가 저 마법에 당했을 때 뭘 봤나 싶어서.”
“…전혀 기억 안 나는데? 그냥 잠깐 멍해졌다 정신을 차리니까 마르낙, 네가 쟤를 둘러업고 나타났어.”
“내 마법은 기억이 안 남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대화로 켄티페스가 끼어들어 왔다.
“그 이상적인 행복에 대한 기억이 남으면 그 환상에서 깨어난 자의 남은 삶은 그저 계속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이상한데서 쓸데없이 친절하네.”
내 지적에 켄티페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내 마법은 의료용으로 개량한 마법이다. 방금 봤던 황제 같은 약물 중독자들이 약을 끊는 걸 돕고, 끔찍한 기억으로 고통받는 자들의 정신을 치료하는 게 내 주 업무였지.”
“뭐라고? 너, 마왕을 보좌하는 장군이나 사천왕 같은 거 아니었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는 굉장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사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여기 황궁으로 떨어지고 몇 명이나 죽였어?”
“아무도 안 죽였다. 애초에 내가 저들을 왜 죽여야 하지? 존재 자체가 역겹긴 하나 다 쓸데가 있는데?”
“…”
내려앉은 정적.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고 거친 눈보라가 방안으로 몰아쳤다. 그 쏟아지는 눈들을 켄티페스는 조용히 쳐다보았다.
“오늘 내로 사도를 처리 안 하면 다 죽어버리겠군. 시간이 촉박해. 너희, 그만 떠나라. 나는 이 나라의 제국민들을 구해야 한다. 기껏 황제의 자리에 동족을 앉히더라도 정작 지배할 자들이 없으면 안 되니까.”
켄티페스는 미련 없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서 새로운 마력의 문을 만들어냈다.
“잠깐.”
내 부름에 그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라는 듯이.
나는 절망을 한 바퀴 돌려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사도 머리통 안에 든 사리만 나한테 넘기겠다고 약속하면 눈 뿌려대는 사도 잡는 거 내가 도와줄 의향이 있는데.”
“그러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켄티페스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우리들의 앞으로 마력의 문들이 솟아났다.
그는 곧장 자신이 만들어낸 마력의 문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잠깐 뜸을 들이고 마력의 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간의 부유감. 그 끝에 우리는 한 공간에 도달했다.
“시민들의 대피 상황은!”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럼 계획대로 이뤄지면 안 되지 않나!!! 더 빠르게 움직이라고 당장 뛰어가서 전해!!!”
“예!!!”
“사도의 수색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현재 수도 내 전체 구역 중 칠 할의 수색을 끝마쳤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남은 구역은…”
거대한 사무실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저마다 떠들며 바쁘게 정보를 교환한다.
그 지극히 분주하고 부산스러운 공간 중심에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사내가 있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수없이 보고를 받는 와중에도 즉각 즉각 필요한 명령을 내렸다.
이내 마력의 문을 통해 나타난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사내가 주변에 무어라 소리치고는 바삐 걸음을 옮겨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켄티페스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켄티페스! 네가 예상한 것보다 진행이 수배는 빨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켄티페스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눈앞의 사내에게 대답했다.
“자그마한 사고가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상황의 해결에 집중할 때라고 보는데.”
잔뜩 헝클어진 머리의 더벅머리 사내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조금 진정한 눈으로 나와 일행을 쳐다보았다.
“저들은 누구지? 이곳은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인데.”
“사도를 사냥하는데, 제법 도움이 될 자들이지.”
대충 대꾸한 켄티페스는 더벅머리 사내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인사해라. 이쪽은 이 나라의 수상이다.”
이 더벅머리가 남제국의 수상이라고?
나는 조금 얼떨떨한 채로 켄티페스를 힐긋 보곤 수상이라는 사내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사도 머리 쪼개러 다니는 게 취미인 사람입니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남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 앞이라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존대가 튀어나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적당한 반말 소개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바람에.
수상은 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맞잡아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근래에 보기 힘든 아주 훌륭한 취미를 가진 분이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