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46)
346
나아감.
낯선 사도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창의력과 임기응변이다.
창의력이든 임기응변이든 두 덕목 모두 가리키는 바는 같았다.
낯선 상황, 낯선 능력, 낯선 상대.
사도를 상대할 땐 단 한 순간이라도 그간 쌓아온 익숙함에 젖어있다간 그건 곧 목을 내놓고 걸어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작금의 상황도 그렇다.
호시탐탐 땅속으로 튈 기회만 노리는 상대를 붙잡고 늘어지는 걸 대체 언제 연습해보고 익숙해진다는 건가.
그냥 대충 최선이라 생각하는 수를 떠올려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위에서 아래로 베는 건 단칼에 일도양단 낼 자신이 없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수였다. 눈앞의 사도는 내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베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힘을 이용해 그대로 땅속으로 처박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짜증 나는 점은 눈앞의 모랫빛 사도는 무척이나 무기술에 능숙한 자였고, 내가 일정한 공격 경로를 배제한 채 검을 휘두른다는 걸 알자마자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와서 성가시게 굴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배우는 상대의 검로. 나는 위에서 아래로 베어내는 대신 정확한 순간에 수평으로 절망을 그었다.
까앙!!!
푸른 절망이 은빛 검의 검면과 맞부딪히고, 은빛 검은 검면에 자그마한 흠집만을 남긴 채 절망을 흘려낸다.
절망의 검로를 재차 비틀어 다음 공격을 이어나간다.
까앙!!!
절망과 은빛 검이 수없이 맞부딪혔지만, 은빛 검이 토막 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앞의 사도, 시스테르나는 달인과 상대해본 경험도 제법 있는 건지 정말 최소한의 손해만을 감수하면서 공격을 빗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달인들만이 알고 있는 달인의 약점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달인의 약점, 그건 의외로 나도 달인이 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약점인데 달인이 자신의 의지를 벼려내서 벨 수 없는 것마저 벨 수 있게 만드는 건 정말 닿는 모든 걸 베어내는 만능의 비기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닿는 족족 금속이든 뭐든 쉽게 베어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오롯이 외부인의 관점일 뿐.
스승님같은 규격 외의 달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달인이 의념을 벼려내서 뭐든지 베어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달인들은 그저 자신이 그간 쌓아 올린 극한에 다다른 기예를 통해 원하는 순간에 딱 필요한 시간만 자신의 검로에 일체화시켜서 그 타점에서 자신의 힘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즉, 그 찰나의 순간만 읽어낼 수 있다면 그 틈을 비틀어내 엇박자로 피해를 최소한 채 달인의 검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말로는 쉬워도 상대가 달인들과 동급의 기예를 쌓아 올리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는데.
하필 그걸 지금 만나게 되다니.
아직 시스테르나가 땅속으로 도망치지 않은 건, 아무래도 땅속에 발이 잠기면 대지에 발을 디디고 움직일 때보다 몸이 굼떠져서 지금처럼 한계에 다다른 기예로 공격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 대치 상황이 마냥 내게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을 뒤덮고 일어선 거대한 그림자들이 이곳을 향해 무너져내리고 있긴 했지만, 나와 시스테르나가 움직이고 있는 시간의 영역에선 그림자들이 떨어지기까지 아직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지젤이 쓸데없이 너무 힘을 주고 그림자들을 커다랗게 만든 탓에 특히나 오래 걸리는 것도 있었고.
거기다 분명 저 그림자들이 그대로 지상을 덮치기 일보 직전에 지젤이 알아서 나를 빼내 줄 터인데, 눈앞의 시스테르나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되자마자 바로 땅속으로 숨어들 생각이겠지.
까앙! 까앙! 까앙! 까앙!!!
생각하는 와중에도 검들은 쉬 없이 맞부딪힌다. 은빛 검을 토막 내 버리려는 나와, 이미 수없이 많은 이가 나갔지만, 치명적인 공격은 허용하지 않는 시스테르나.
한계까지 사용한 근육들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까보다 그림자들이 가까워지면서 주변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권능을 사용할까.
내가 당장 권능을 사용하길 주저하는 이유. 그건 딱 하나 때문이었다.
바로 미소. 눈앞의 시스테르나의 입가에 걸린 시원하다 못해 보는 이들까지 조금은 들뜨게 만드는 환한 미소.
그 미소는 내게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설마 저 여자가 제 목숨을 걸고, 일부러 힘을 아끼면서 나와의 교전을 음미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여기서 내가 먼저 권능을 사용하는 순간, 시스테르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권능을 사용해 이 상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건 아닐까.
덕분에 이 상황은 묘하게 내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달인이 된 뒤로 이제는 느낄 일 없을 거로 생각했던 그 감정을.
어째서. 어째서 나는 눈앞의 저 여자를 베어내지 못하는 거지.
까앙! 까앙! 까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묵직한 충격이 손을 타고 느껴진다. 이렇게나 짜릿한 손맛이라니.
시스테르나의 것과 비슷한 미소가 내 입가에도 걸린다.
그래.
무력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난 그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적수와 검을 나누는 즐거움이란 게 이런 것일까.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음이 점점 멀게 느껴진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몸뚱이를 넘어 의식만이 날카롭게 벼려져 부유하는 기분.
시스테르나는 아까보다도 더욱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게 ‘재밌지?’라고 묻고 있는 듯이. 그렇기에 나는 검으로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검로만 제한되지 않았어도 내가 이겼어.’라고.
그녀가 검으로 다시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해봐.’라고.
나 혼자만의 상상일까. 아니면 정말 우리가 검으로 대화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무언가 허락을 받은 기분이기에 나는 여태 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있던 검로를 마음껏 풀어냈다.
치켜들었던 절망이 위에서 아래로 선명한 푸른 선을 내리긋고, 은빛 검이 마치 그에 응하듯 절망에 맞부딪혀왔다.
푸른 날이 은빛 날에 닿음과 동시에 은빛 검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최소한의 흠만을 남긴 채 절망에 담긴 힘을 흘려낸다. 내 검이 가장 예리한 순간의 박자를 일그러뜨리며.
내 마음과 검이 하나가 되어 베는 순간이 망가지고, 또 한 번 여태까지 수없이 나누었던 공방과 똑같은 결과가 내 앞에 나타나려 할 때.
문득.
지금이라면, 지금의 나라면.
조금, 아주 조금 더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껏 달아오른 전신의 근육을 조금, 아주 조금만 더 쥐어 짜낸다. 자연스럽게 흘려지던 절망을 되돌린다.
검을 든 이래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힘으로 짓눌러서 억지로 궤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뱀이 그녀의 검면을 감싸며 거슬러 오르듯이.
지금, 내 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럽게 살아있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의지와 함께.
나의 뜻과 함께 뱀이 그 이빨을 드러내자, 사도의 모랫빛 동공이 커진다.
잘려나간 은빛 검의 토막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절망은 처음으로 자유롭게 사도에게 자신의 이빨을 박아넣었다.
신성이 요동치고, 피가 치솟아 오른다.
잘려나간 시스테르나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그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따라 피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시스테르나는 잘린 팔이 바닥에 나뒹굴게 버려두고서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잘린 팔을 부여잡고서 털털하게 웃었다.
“이야. 진짜 죽을 뻔했네. 진짜 죽을 뻔했어. 거기서 딱 한 단계 더 나아가 버릴 줄이야. 진귀한 광경을 봤네. 달인이 성장하는 광경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나는 반쯤 바닥이 집어삼킨 발을 뜯어내듯 꺼냈다. 조금 전, 요동치는 신성과 함께 축으로 삼은 발이 지지대가 되어주던 대지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검로가 뒤틀려버렸다.
명백한 권능의 발현.
시스테르나가 권능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절망에 의해 반 토막 났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일부러 권능을 안 쓰고 있었던 거네.”
시스테르나는 키득키득 마주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직하게 검만 휘두르길래 나도 정직하게 승부해줬지. 마지막에 죽기 싫어서 치사하게 권능을 쓰긴 했지만.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나름 삶에 미련이 많은 편이라 나도 모르게 권능을 써버렸네.”
“미안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넌 오늘 내 손에 죽을 텐데.”
“와.”
짧게 감탄을 토해낸 그녀는 모랫빛 눈을 끔벅이더니 내게 물어왔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왜 날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하는 건데?”
“그건…”
암녹빛 문신이 신성과 함께 내 신체 위를 내달린다. 한계까지 증폭된 내 신체 능력이 여태까지와 차원을 달리하는 속도로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시스테르나는 실실 웃고 있었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는 듯이 내가 권능을 발현하기 무섭게 그녀도 곧장 권능을 발현했다.
신성과 함께 발을 디뎠던 대지가 깊은 수렁처럼 물렁해진다. 그러나 그 권능이 완벽하게 완성되기 전, 내 육체가 조금 더 빠르게 대지를 박찼다.
붕 떠오른 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시스테르나를 향해 쇄도한다. 시스테르나는 침착하게 대지 속으로 빠져들어 가려 했지만, 내 손이 그 전에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나는 그녀의 모랫빛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정말 재밌었어. 그럼 이만.”
“…!”
한껏 팽팽히 잡아당겨진 근육들이 그 힘을 한 번에 터뜨렸다. 땅속으로 잠겨 들어가던 시스테르나를 그대로 잡아 뜯어내듯이 대지에서 꺼내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그녀는 채 대답도 못 한 채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내게서 멀어졌다.
발을 디딜 대지라곤 주변에 단 한 곳도 없는 허공 속으로.
그리고 그곳엔 이미 대지에 처박히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온 단어 그대로의 거대한 그림자들만이 모든 공간을 점하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질량째로 모든 걸 짓뭉개기 직전. 내 그림자가 날 집어삼켰다.
잠깐 눈을 깜빡이자 나는 어느새 지젤의 옆에 서 있었다.
콰아아아앙!!!
막대한 질량이 떨어져 내린 반동으로 거친 진동과 함께 그 후폭풍이 몰아쳤다. 머리칼이 흩날리고 나는 간신히 나도 모르게 ‘해치웠나?’라는 부활의 주문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아냈다.
지젤의 머리 위로 떠 올랐던 헤일로가 꺼지고 그녀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맞았어?”
“일단 붙잡아서 허공에 집어 던지긴 했는데. 등에 날개라도 달리지 않은 이상, 아마 맞았을걸?”
“그럼 곤죽이 됐겠네!”
지젤은 한 건 해냈다는 듯이 작게 폴짝 뛰더니 내게 당당히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어때? 사도마저 한 방에 보내버리는 내 힘이?”
솔직히 쓸데없이 과하게 대규모로 권능을 일으킨 탓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건 굳이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대화하면서 말해도 될 사안이었다.
지금 내가 기뻐하는 지젤에게 해줄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최고였어.”
***
그림자가 찍어눌러 생긴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시스테르나의 시체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지젤은 과하게 커다란 크레이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내게 물었다.
“너무 크게 만들었나…? 시체를 어떻게 찾지?”
“대충 찾았는데.”
“어떻게?”
나는 내 코를 톡톡 두드리고는 대답했다.
“흐릿한 피 냄새가 나. 아마 뭉개진 시스테르나 시체에서 나오는 냄새겠지. 저쪽이야.”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가자 저 멀리 새빨간 피와 살점이 뒤섞인 대지가 보였다. 나는 지젤의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지젤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뭔가 이상해. 사람 하나 뭉개졌다고 저렇게 넓은 대지가 붉게 물들 수 있나? 사람 하나 죽어서 나올 면적이 아닌데.”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아까 공격으로 뭉개진 게 그 사도 혼자가 아니라 걔가 땅속에 처박아놨던 병사들 시체까지 같이 뭉개진 거잖아.”
아, 그 머리만 튀어나와 있던 병사들이 있었지.
“그런…”
내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 낯선 신성이 느껴지며 붉은 대지를 뚫고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아귀가.
시체들이 얼기설기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열리고, 처음 보는 음침한 인상의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시스테르나를 옆구리에 끼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스테르나는 비록 피투성이이긴 했지만, 얕게 가슴이 가라앉았다 다시 솟는 걸 보니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이 은은한 노기를 흘렸다. 음침한 인상의 여인의 입이 열리고 성난 목소리가 나를 질타했다.
“얘, 얘가 죽으면 시체는 내 꺼 하기로 했는데! 아, 아주 고기 반죽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뭉개지면 내가 못 쓴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