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48)
48 화 아직.
아직.
“경기 잘 봤어. 아주 인상적이던 걸.”
여인의 두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눈가에 눈물점이 악마의 눈웃음을 따라 살랑였다.
땀을 좀 식힌 내가 씻고 나오자, 언제 찾아왔는지 모를 버둥대는 호기심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키아는 악마의 주변에 앉아서 조금 불편해하면서도 버둥대는 호기심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관찰했다.
“꽉 막힌 샌님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잘만 날뛰는 걸 보면 평소에 잔뜩 참고 있나 봐?”
차가운 물에 씻고 나오니, 나는 슬슬 분위기에 취해서 신나게 날뛰었던 과거가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무 흥분하긴 했지.
“그런 거 아닙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악마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여전히 맨살을 거의 다 내놓은 옷차림에 어깨 위로 두른 가벼운 가운 하나. 그녀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자 가운이 들춰지고 새하얀 살결이 한가득 보였다.
“아직 쌓인 게 많이 남아 있으면 내가···.”
‘살해!!!’
찰싹!
잽싸게 소녀의 모습으로 튀어나온 어머니가 공중에서 악마의 손을 쳐내곤 멋들어지게 바닥에 착지했다. 악마는 두 눈을 끔벅이곤 피식 웃으면서 냉큼 어머니를 품에 안아 들었다.
‘살해!!!’
당장 이거 놓으라며 버둥대는 어머니를 악마는 그저 품속에 더욱 꼭 안아 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자기 거라 이거야? 귀엽네. 귀여워.”
‘살해…’
결국 저항을 포기한 어머니가 축 늘어졌다. 악마는 무저항인 어머니의 볼을 조물딱 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나저나 인상적이었다는 내 말은 진짜거든? 중간부터는 그냥 둘이 짜고 친 거 맞지?”
짜고 치다니. 나와 빅풋이 했던 건, 짜고 치는 걸 넘어선 무언가였다.
“짜고 친 게 아니라, 그저 빅풋과 제 마음이 서로 통했던 겁니다. 그 ‘유대’를 통해서 한 편의 멋들어진 극을 완성시켰죠. 그는 무척 뛰어난 파트너였습니다.”
“그게 결국 짜고 친 거지. 아냐?’
“아닙니다.”
버둥대는 호기심은 어머니를 품에 꼭 안은 채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근데 그 짜고 친 게 굉장히 반응이 좋았단 말이지. 앞으로 따로 짜고 치는 경기들을 좀 만들어 넣어볼까 싶어. 물론, 그 전에 괜찮은 배역들부터 일단 구해봐야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너 나랑 같이 일 안 할래? 너라면 내 지하투기장의 간판스타가 될 자질이 아주 충분해 보이거든.”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칼 같네.”
“저는 어머니의 봉인을 풀어드려야 하니까요.”
‘살해…!’
진한 감동으로 물들어가는 두 눈. 어머니는 남은 힘을 모조리 쮜어짜내서 격렬하게 버둥댄 끝에 악마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나를 향해 달려와서 폴짝 뛰어올랐다.
‘살해!!!’
나는 손을 뻗어 어머니를 품에 안아 들었다. 내 품에 안긴 어머니가 악마를 노려보며 양손의 중지를 치켜들었다.
‘살해!’
악마는 다시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뭐, 아쉽지만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렇게 짜고 치는 네 아이디어를 내가 마음대로 써도 괜찮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나도 내가 옛날에 본 걸 그냥 응용한 것뿐이었다.
“그래?”
“예. 마음 편히 쓰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냥 쓰는 건 내가 거슬리니까, 나중에 이게 대박을 치거든 너한테 후하게 보상해줄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주신다면야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
지하 투기장을 벗어난 나는 다키아와 함께 빵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빵을 사 왔던 그 빵집으로.
솔직히 나도 어머니께 맛있는 걸 잔뜩 사드리고 싶었지만, 맛있는 걸 사드리기엔 내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미각의 상실. 그 결점 때문에 나는 뭐가 맛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 대신 맛을 봐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거기 슈크림빵 말고도 맛있는 게 엄청 많으니까 맛을 못 느끼는 마르낙 사제님 대신 제가 책임지고 골라드릴게요!”
‘살해!’
내 가슴주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손이 잔뜩 신이 나서 꿈틀댔다.
“그런데 줄을 조금 서야 할지도 몰라요. 거기 인기가 워낙에 많아서 매번 빵 사 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잔뜩 있거든요.”
버둥대는 호기심 없자, 다키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내 옆에서 재잘댔다.
“그 빵집은 너무 잘 팔려서 하루에 빵을 두 번 굽거든요? 지금쯤 가면 저녁 빵이 막 따끈따끈하게 나왔을 거예요. 아주 따뜻하고 폭신폭신하게요!”
‘살해…!’
‘따뜻하고 폭신폭신’이라는 말에 어머니가 따뜻한 빵들을 먹을 생각으로 잔뜩 기대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기예요!”
다키아가 가리킨 방향에는 빵집이라고 보기엔 무척이나 거대한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수십 명은 족히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의 입구 앞에는 적당한 길이의 줄이 쭉 늘어서 있었다.
다키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힘차게 말했다.
“얼른 가서 줄 서요!”
“그러죠.”
그녀를 따라 줄의 뒤꽁무니로 향하던 와중, 나는 저 멀리 제법 눈에 익은 얼굴의 붉은 머리 여인이 빵을 한 아름 사 들고 가게를 빠져나오는 걸 발견했다. 건물을 나온 붉은 머리 여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가득 사 들고서 어디론 가로 향했다. 내가 있는 방향에선 그녀의 등만이 보였다.
잘못 봤나? 내가 아는 붉은 머리는 이곳 수도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닮은 사람을 본 거겠지.
홀로 결론을 내린 나는 다키아와 함께 빵집의 줄을 섰다. 이번에 투기장에서 돈을 꽤 번 김에 나는 돈 걱정 따윈 접어둔 채, 어머니가 먹어보길 원하는 빵을 모조리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
“후욱.”
숙소에 도착한 다키아와 나는 널찍한 여관 뒷마당에서 홀로 단련하고 있는 사지타를 발견했다. 그는 땀에 푹 젖은 채로 새하얀 뼈 창을 허공으로 찔러댔다. 또 한 번의 찌름. 힘껏 창을 내지른 사지타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짓고서 입을 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나는 빵이 가득 든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지타 몫까지 사 왔으니, 방에 따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오늘 하루종일 단련만 한 거예요?”
다키아의 물음에 사지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전에는 수도 대장간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고 장비의 정비를 좀 맡겨뒀습니다. 오후에는 공녀님께서 물으신 대로 단련만 한 게 맞습니다.”
“항상 성실하시네요.”
“제가 딱히 성실한 게 아니라, 용병은 몸이 재산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굳이 칭찬하실만한 일이 못 됩니다.”
창을 쥔 손가락을 잔뜩 달싹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지타는 땀이 식기 전에 좀 더 몸을 단련해두고 싶은 듯했다.
“공녀님. 저희는 이만 올라가도록 하죠.”
“네?”
이내 내 말뜻을 이해한 다키아가 사지타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조금 이따 저녁 먹을 때 봬요.”
“예, 공녀님.”
대답을 끝마친 사지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창을 내지르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지타를 뒤로 하고서 내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서 방문을 닫자마자 어머니가 희미한 빛과 함께 소녀의 모습으로 튀어나왔다.
‘착’하고 바닥에 착지한 어머니는 나를 향해서 양손을 활짝 펼쳤다.
‘살해!!!’
“예, 여기 있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커다란 빵 주머니를 그대로 어머니의 품에 건넸다. 어머니는 빵 주머니를 안아 들고서 기쁨에 겨운 탄성을 내질렀다.
‘살해!!!!!’
***
더없이 진중한 얼굴. 어머니는 여태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섰다.
‘살해.’
모두 조용히 하라는 목소리. 나와 다키아는 숨죽이고서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라 침대 모서리 위에 꼿꼿이 섰다. 그야말로 감탄만 나오는 완벽한 균형 감각.
“와아!”
다키아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감탄했다. 침대 모서리 위에 선 어머니가 다키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손짓했다. 그 손짓을 본 다키아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방안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가 힘껏 침대 모서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회전. 날듯이 뛰어오른 어머니가 공중에서 완벽한 두 번의 회전을 끝마치고서 절도 있게 자세를 취했다.
작지만 날카로운 송곳. 어머니는 팔꿈치를 송곳의 형태로 오므린 채, 침대 위로 쏜살같이 낙하했다.
‘살(殺)!!!’
빛살처럼 떨어진 팔꿈치가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베개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고통에 잠겨 들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비정한 어머니는 베개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래, 내가 했던 것처럼.
‘살해!’
“와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
다키아가 격렬하게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수치심에 잠겼다. 열심히 박수를 치던 다키아가 내게 말했다.
“봤어요? 완전 똑같았던 거? 진짜 마르낙 사제님이 딱 저랬거든요!”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음했다.
“어머니. 이런 걸 따라하시는 건 조금 참아주시지요. 제발.”
‘나는!!!’
어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해!!!’
‘모조리 살해!!!’를 따라 외치면서.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
“자자, 나옵니다! 저희 지하투기장에 떠오르는 신성! 그날 이 자리에 오셨던 관중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신인! 모두들 불러주십시오! 그 이름을!!!”
“인간도살자!!!”
“인간도살자!!!”
“당장 나와라! 인간도살자!!! 나 이번엔 너한테 걸었다고!!!! 전부!!!!”
“살해! 살해! 살해!!!”
기기기긱.
웃통을 벗고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거대한 쇠 곤봉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걸어 나왔다. 아주 천천히.
환호하던 관중들은 곧 인간도살자가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저, 저거 빅풋이 쓰던 곤봉이잖아!”
“설마?!”
“그래!!! 인간도살자가 빅풋을 죽이고 그의 무기를 취한 거야!!!”
“이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플라잉 빅풋을 ‘살해’한 인간도살자가 빅풋의 무기를 취했다!!!!”
“자신의 적이라면 골수까지 우려먹는 건가!!! 너무나도 무서운 자다!!!”
인간도살자는 저번 경기와 달리 그저 아주 조용히 걸음을 옮겨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와아아아아아아!!!”
그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음에도 관중석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연 그가 이번에는 어떤 쇼를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 그 기대감이 관중들이 열광시켰다.
마침내 경기장 중앙에 도착한 마르낙이 미리 나와 있던 자신의 상대, ‘헤드브레이커’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딱 그만이 들리도록.
“본명이 ‘게툼’이 맞나?”
헤드브레이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게툼이군.”
두 선수가 자리에 선 걸 확인한 사회자가 유물에 대고 소리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콰직!
악신의 숭배자. 아니, 악신의 숭배자였던 게툼의 머리통이 뭉개졌다. 비산하는 살점과 뇌수, 그리고 피. 머리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뭉개진 목의 단면을 따라 흘러나온 피가 경기장 바닥을 적셨다.
침묵. 관중석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르낙은 적막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이 나왔던 입구로 돌아갔다. 관중들을 뒤로 한 채.
그는 사람의 죽음을 가지고 즐길 생각은 없었다.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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