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53)
53 화 빨래터.
빨래터.
이 세계에는 자신의 종족 한계를 초월한 자들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생물로서 불가능한 힘을 내는 존재들.
무예를 갈고 닦은 끝에 생물로서 한계를 벗어난 이들. 이들을 가리켜 ‘달인’이라고 불렀다.
원래 게임 설정 속에서는 근접 계통 계열 직업의 레벨을 일정 이상 찍으면 얻는 근접 특화 직업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달인’이란 하나의 경지로서 알려져있었다.
‘달인’은 대륙 전체를 뒤져서도 각 나라마다 손에 꼽을 숫자만이 존재하는 이들.
나의 스승 프리디야는 그런 ‘달인’이었다.
그것도 그냥 보통 ‘달인’이 아니라 ‘달인’인 동시에 ‘사제’인 여인. 스승님은 손가락 네 개 반의 평가를 받을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스승님과 내가 처음으로 만난 장소는 바로 빨래터였다. 정확히는 성화교 본단 앞에 설치된 빨래터.
상투스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신성이 봉인된 성물을 찾아 나는 정처 없이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봉인된 성물 하나를 찾아냈다.
문제는 그게 성화교 본단의 성물고(聖物庫) 안에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튼튼한 몸뚱이 하나와 아직 말도 못하고 꿈틀대기만 하는 어머니의 손. 단 두 가지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패의 사제로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본 스킬인 ‘산 자는 넘을 수 없는 선’ 하나뿐. 문제는 이 기본 스킬로 숨길 권능이 하나도 없었다. 즉, 나는 그저 몸만 약물로 강화된 평범한 인간이었다. 약물로 몸을 강화한 시점에서 평범함이랑은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성화교 본단의 성물고는 그렇게까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을 지키는 성물고지기가 다름 아닌 내 스승님이었기에.
그때의 난, 솔직히 도저히 성물고에 침입해서 성물을 훔쳐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성물고지기가 무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제라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다른 성물을 찾아 떠나기에도 너무나 막연한 상황. 이 넓은 대륙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의 신성이 봉인된 성물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건 절대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성화교 본단 근처에 정착해서 이것저것 막일하면서 최대한 기회를 노려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내 몸은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했고, 그 말은 즉, 막일을 하기에 최적이란 이야기였다.
하지만 외지인이던 나는 북부 왕국 끝자락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렇게까지 환영받지는 못했다. 잡화점 주인 딸의 고백을 거절한 뒤로는 더욱.
부패의 사제로서 살아가기로 굳게 다짐한 나는 성물을 얻자마자 떠날 생각이었기에 그녀의 고백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잡화점 딸의 얼굴은 전혀 내 타입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뒤에 나타났다. 인근에 사는 아줌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날 씹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 텃세를 피해 아무도 없는 새벽에 홀로 빨래터로 나와 내 빨래를 했다. 인벤토리에 넣어놨던 유지의 사제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내겐 권능의 ‘권’ 자도 없었으니까.
추운 새벽 차가운 물에 빨래를 하던 나날. 그러던 어느 날 빨래를 하러 나온 나는 새벽에 빨래를 하러 나온 스승님과 마주쳤다. 물론, 나는 스승님이 성물고지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얼굴이 참 예쁘긴하네.’라고 속으로 감탄하며 조금 멀찍이 자리 잡고 내 빨래를 했을 뿐.
당연히 빨래를 하는데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날 나와 스승님은 말 한 번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서로의 빨래만 한 채로.
그 뒤로 나는 가끔 빨래하러 나온 스승님과 마주쳤다.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빨래를 하는 나와 달리, 스승님은 빨래가 한 소쿠리 가득 쌓여야 빨래를 하러 나왔다.
당연히 빨래는 양이 적은 내가 항상 빨리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승님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뒤에 나온 제안은 간단했다. 적당히 사례할 테니 그 빨래를 다 하고 나서 자기 빨래를 좀 덜어가서 해달라는 조건. 어차피 하루종일 하는 게 잡일이었던 나는 냉큼 그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 동네 아줌마들의 견제로 서서히 내게 떨어지는 노동 거리가 줄어들 던 참이었다.
프리디야 스승님은 내가 한 빨래를 보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쿠리를 들고서 나보고 따라오라고 턱짓했다. 나는 스승님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성물고(聖物庫) 옆에 지어진 널찍한 집. 그곳에서 프리디야 스승님은 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 새벽 빨래 친구가 소문만 무성한 ‘달인’ 성물고지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스승님에게 빨래의 대가로는 진짜 과분한 은화 한 닢을 받았던 탓에 성물을 찾고 말고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물론, 내 다 쓰러져가는 집에 되돌아왔을 때, 주머니에서 격렬하게 꿈틀대는 어머니의 손을 보고서 성물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긴 했지만.
그렇게 나와 스승님은 기묘한 빨래위탁업무 관계로 맺어졌다. 나는 스승님이 빨래하러 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거의 거저 얻는 은화 한 닢을 기대하면서.
어느 날부터 갑자기 스승님은 내게 더 이상 빨래를 부탁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스승님에게 물었다. 왜 더 이상 빨래를 부탁 안 하느냐고. 스승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볍게 대답했다.
“돈 다 떨어졌어.”
그날 나는 성물고지기에게 충분한 금전을 지급하지 않는 성화교에 대한 분노를 마음속으로만 터뜨렸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스승님이 돈이 없었던 건 스승님께서 그저 성화교 본단에 금전을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주었던 은화는 전임 성물고지기가 남겨두고 간 돈이었고.
나는 사라진 가외 수입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담긴 깊게 한숨을 내뱉고는 스승님에게서 빨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서 일 나가기 전까지 따로 할 일도 없었던 나였기에.
내 손짓에 스승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었다.
“왜?”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옆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꺼내며 대답했다.
“돈은 됐습니다. 어차피 지금 집에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거든요.”
스승님은 성화교 본단 근처에서 유일하게 나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건 내가 그녀의 빨래를 도와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거기에 내가 평소 받아온 은화들의 가치는 그깟 빨래 따윈 수백 번도 더 부탁할 수 있는 돈이었다.
평소처럼 빨래가 끝나자 스승님은 뭔가 골똘히 고민하면서 빨래 바구니를 든 채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스승님은 내게 제안했다.
“너 나한테 검 좀 배워볼래? 대신 빨래는 계속 도와줘.”
기연이었다. 이건 진짜배기 기연이었다. 빨래터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 나는 너무 놀라서 되물었다.
“네? 그게 대체 무슨···.”
“싫음 말고.”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달인’에게 직접 받는 검술 교육. 체계적인 무기술에 대한 교육은 언제나 많은 돈이 필요했고, 나는 그런 돈을 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수익이 좋은 용병으로 활동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내 몸의 재생력은 그 누구보다 확실히 튈 것이며, 이런 이상을 주변 사람들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악신의 숭배자라는 정체를 들킬 수도 있고.
그 비싼 무기술에 대한 교육을 스승님은 그저 빨래를 조금 도와주는 것으로 베풀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정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은 뒤엔 집안일의 대부분을 내가 혼자 했지만.
‘달인’이 전수해주는 무예. 이 얼마나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단어인가. 나는 드디어 내 인생에도 빛들 날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앞으론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만이 내 입에서 나올 거라고.
정작 수련이 시작되고 내 입에서 나오는 건 곡소리뿐이었다. 스승님의 수련은 지극히 원초적이었다. 헬스트레이너의 나직한 PT와 같은 방식을 기대했던 나는 시작 첫날부터 목검만 쥐여준 채 전신을 두들겨대는 스승님의 매타작에 진짜 앓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게다가 두들겨 맞은 내 몸이 빠르게 회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승님께서는 손에 쥔 목검에서 한 가닥 남아 있던 마지막 자비를 거뒀다.
맞고, 맞고, 또 맞는 나날. 아니, 정확히는 맞고 집안일 하고를 반복하는 나날.
스승님은 날 두들겨 패는 데 재미를 들리셨는지 먹을 것과 잘 장소를 제공해주겠으니 아예 자신이 사는 집에서 아예 살라고 내게 제안, 아니 ‘통보’했다.
당연히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두들겨 맞기만 하며 나는 열두 번의 계절을 지냈다.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검술’의 기역 자도 배우지 못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살기 위해 최단 경로로 막고 베는 방법만을 배웠을 뿐. 급하면 주먹질하고 발길질하는 법을 조금 얹어서.
평소처럼 두들겨 맞고 실신해서 바닥에 누워있던 나는 하늘을 보며 굳게 결심했다.
이미 충분히 배웠으니, 몰래 성물고 열쇠를 가지고 튀자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더 맞아봤자 무언가 뾰족한 걸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메인퀘스트가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상투스를 죽인 리버켈을 찾아내 복수를 해야만 했다. 날뛰기 좋아하는 그가 운 없이 길거리에서 객사하기 전에.
결국, 나는 스승님이 외출한 틈을 타서 성물고 열쇠를 훔쳐 달아났다. 그 열쇠를 이용해 신성이 봉인된 성물 또한 훔쳐냈고.
그렇게 난 ‘부패의 거인’이라는 첫 권능을 얻었다.
***
나는 살짝 긴장한 채 물었다.
“제가 살아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설마 스승님이 내가 악신의 숭배자라는 진실을 꿰뚫어 보셨나? 프리디야 스승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몰랐지…?”
“네?”
“내가 널 한두 번 두들겨 팼니? 세상에서 가장 질긴 괴물보다 더 악착같이 회복하는 네 몸뚱이라면 머리가 한 번쯤은 잘려도 다시 붙지 않을까 싶었지.”
지극히 비이성적인 추리.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되신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신 겁니까?”
시리도록 푸른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내 추측대로 여기 이렇게 네가 살아있지 않니?”
따지자면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왠지 모를 억울함은 대체 뭘까.
“게다가 너는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단다.”
프리디야 스승님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보였다. 기괴한 상형문자들이 벌레처럼 뒤얽혀있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내가 이렇게나 네 얼굴을 똑같이 그려서 널 찾는 수배지를 뿌려달라고 부탁했거든.”
나는 멍한 얼굴로 기괴한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었다.
“진짜 이 그림으로 수배지를 만들어 뿌렸습니까?”
“그렇지? 직접 사람을 써서 찾기엔 의뢰비가 부족하다길래 수배지만 만들어서 뿌려달라고 했단다.”
“바가지 쓰셨군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스승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배지를 만든 덕에 이렇게 널 찾았는데?”
대체 그 수배지를 만든 것과 날 찾은 것이 무슨 상관관계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봤자 날 이해시킬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프리디야 스승님은 빙그레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제자야. 나는 네가 ‘무엇’이든 딱히 상관하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서 마저 수련을 하자꾸나. 내 자존심이 있는데, 이왕 가르치기 시작한 거 내 제자도 나처럼 ‘달인’은 되야 하지 않겠니?”
“스승님이 달인이 되는데 얼마나 걸리셨죠?”
“나?”
스승님은 1000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천재라 불렸다. 검지를 뻗어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린 스승님이 빙그레 웃었다.
“대충 하루도 안 쉬고 수련해서 꼬박 30년쯤? 너도 꽤 재능이 있는 편이니 27년 정도만 더 구르면 ‘달인’될 수 있을 거란다. 이 스승님이 보장하마.”
27년. 메인퀘스트에서 뭔가 터질 게 다 터지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단호한 거절의 말을 내뱉을 결심을 했다.
“스승님. 저는···.”
콰앙!!!
맹렬한 붕괴음과 함께 지하 투기장이 있었던 자리에서 두 마리의 거대한 괴물이 일어섰다.
본모습을 드러낸 악마와 신성이 철철 흘러내리는 누더기 괴물.
나는 그 광경을 보곤 재빨리 말했다.
“저기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스승님은 괴물을 보며 두 눈을 끔벅이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오는 길에 한 남자와 마주쳤단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검은 늑대 엔시스 발타스. 그가 저리로 갈 테니 내가 너무 급하게 갈 필요는 없는 것 같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