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54)
54 화 검은 늑대.
검은 늑대.
푹.
복부를 뚫고 들어간 검이 빠져나갔다. 천천히 검을 거둔 카르멘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 시체. 전부 시체.
적을 모조리 죽이는 건 실패했다. 지하 투기장 곳곳에는 빠져나가기 쉽도록 굉장히 많은 수의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던 데다 제대로 자신과 사지타가 날뛰자, 잠깐 동안 저항하던 적들은 어느 순간 무슨 연락이라도 들은 듯이 일제히 사방팔방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쫓으려면 충분히 쫓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지타와 자신이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 떠난다면, 그 틈을 노리고 적들이 이곳에 남은 왕국 병사들이 모조리 전멸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카르멘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투르디 십인장!”
“예!”
묵직한 대답.
“몇이나 죽었지?”
“현재 살아남은 인원은 총 스물넷입니다! 이중 중상자는 셋, 경상자는 열하나입니다!”
카르멘은 침음성을 삼켰다. 데리고 온 마흔 명의 병사들 중 열여섯이 죽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예병으로 일백은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단순한 단속 업무가 될 줄 알고 경험이나 쌓아줄 겸 신병들만 데리고 온 게 큰 실수였다.
잠깐의 고민 끝에 카르멘은 이들을 일단 이곳에서 내보내고 자신과 사지타 둘이서 마저 수색을 이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병사들에게 투기장 곳곳에 뚫린 좁은 통로를 수색하라고 명령하는 건, 그냥 기습당해서 죽으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투르디 십인장, 나와 사지타가 입구까지 호위해 줄 테니 부상자들 챙겨서 당장 이곳을 떠···.”
콰앙!
굉장히 먼 곳에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쾅! 쾅! 쾅! 쾅!
무언가 거대한 것이 눈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카르멘이 빠르게 소리쳤다.
“당장! 당장 모두 도망쳐라! 투르디 십인장! 어서!!!”
“예!!!”
부상자들을 챙긴 병사들이 다급하게 발을 놀려서 출구로 향했다.
“사지타!!!”
카르멘의 부름에 사지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떨어진 단창을 주워들고는 언제라도 던질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쾅! 쾅! 콰아아아앙!!!
마침내 소리의 근원이 통로를 무너뜨리며 지하투기장 한가운데로 튀어나왔다.
낯익은 복장. 그것도 굉장히 많은 수의 낯익은 복장.
카르멘이 쫓길 포기한 일레흐의 요원들 대부분이 거기에 있었다. 누덕누덕 기워진 채로.
누더기 괴물의 몸을 이루는 인간들이 일제히 입을 열고 괴성을 내질렀다.
– 기에에에에에에엑!!!
“저건···.”
저것과 비슷한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에라디코. 그 도시에서 보았던 누더기 거인. 저 누더기 괴물은 그 누더기 거인과 무척 닮아있었다. 그때보다 시체가 적었던 탓인지 저 누더기 괴물은 제대로 된 사람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긴 했지만.
“하압!!!”
단호한 기합과 함께 단창이 맹렬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누더기 괴물의 머리로 추정되는 위치에 박혀 들어갔다.
푹!
– 기에에에에에엑!!!
괴물의 비명이 카르멘을 깨웠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서 단창을 던졌던 사지타는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괴물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사지타!!! 잠깐 시간만 끄는 거야! 병사들이 도망칠 시간만!”
사지타는 내달리는 발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새하얀 뼈 창을 틀어쥔 손이 억센 힘을 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련한 근육들이 그의 부름에 응했다.
– 기에에에에에엑!!!
인간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앞발이 사지타를 짓누르기 위해 떨어졌다. 사지타는 손의 궤도를 지켜보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옆으로 튀어 올랐다.
콰앙!
간발의 차이로 거대한 손이 바닥에 처박혔다. 거인의 손을 이루는 인간들이 사지타를 붙잡기 위해 게걸스럽게 손을 뻗어 왔다. 사지타는 침착하게 창을 내질렀다.
– 끼에에에에에엑!!!
창에 찔린 누더기 괴물이 여태까지와는 달리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사지타가 내지른 뼈 창은 안식의 나팔수가 선물한 것. 죽음과 안식의 나팔의 힘이 깃든 창은 망자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흉기였다.
분노한 누더기 거인이 거칠게 앞발을 휘둘렀다. 범위가 너무 넓어 단순히 달려서는 피하기 힘든 공격. 사지타는 전력을 다해 뒤로 굴렀다.
콰앙!
누더기 괴물의 손에 얻어맞은 벽이 무너져내렸다.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틈. 거인이 큰 공격을 하자 생긴 틈을 노리고 은빛 기사가 투기장 바닥 위를 질주했다.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검이 아주 긴 선을 그었다. 깊게 베인 누더기 괴물의 뒷발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달랑거렸다.
– 끼에에에에에엑!!!
불길한 괴성과 함께 막대한 양의 신성이 터져 나왔다. 신성을 느끼지 못하는 카르멘과 사지타였지만, 불길한 직감을 느끼고 재빨리 괴물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새카만 그림자들. 투기장을 뒤덮는 그림자가 일제히 일어섰다. 서릿발과도 같은 냉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두 가지 권능이 동시에 폭발하듯이 터져나갔다.
카르멘은 재빨리 자리를 관중석으로 뛰어들어서 몰아치는 그림자와 냉기의 폭풍을 피해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 순식간에 일어났던 폭풍이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카르멘이 소리쳤다.
“사지타!!! 괜찮아? 대답해!!!”
대답은 누더기 괴물에게서 튀어나왔다.
–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카르멘의 시야에 누더기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몰아친 신성의 폭풍을 정면으로 맞은 탓에 반쯤 걸레가 된 갑옷. 갑옷의 틈 사이사이에선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만신창이가 된 사지타는 누더기 괴물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새하얀 창을 치켜들었다. 그는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대로 창을 괴물의 정수리 위로 내려찍었다.
– 끼, 끼에에에에엑!!!
누더기 괴물의 모든 입들이 하늘이 찢어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인간들이 절규를 토해냈다. 누더기 괴물은 절규하면서도 격렬하게 몸을 버둥거렸다.
푹. 푹. 푹. 푹.
사지타는 한 손으로 거인의 머리를 붙잡은 채, 새하얀 창을 찌르고 또 찌르고 찔렀다. 누더기 괴물의 절규가 일순 변화했다.
– 그만해!!! 그만해!!! 그만하라고!!! 아파!!! 아파아아아!!!! 아아아!!! 기워붙이는 바늘이시여!!!
간절한 부름과 함께, 투명한 실들이 누더기 괴물의 전신에서 촉수처럼 일제히 솟아났다.
푹.
투명한 바늘이 사지타의 발목을 꿰뚫었다. 사지타는 무덤덤한 얼굴로 새하얀 뼈창을 휘둘러 투명한 실을 베어냈다. 하나의 바늘이 무력화되자 수십의 바늘이 일제히 일어나 사지타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만하고 뛰어내려!!! 사지타!!!”
사지타는 손에 쥔 창을 그대로 괴물에 처박아 넣고 누더기 괴물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 아파아아아아아아!!!
쿵.
한쪽 발목을 꿰뚫린 탓에 사지타는 두 다리로 바닥에 착지하는 대신, 딱딱한 바닥 위로 몸을 굴려 착지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날듯이 뛰어온 카르멘이 사지타의 손을 붙잡고 그를 부축했다.
“다리! 괜찮아?”
아직도 발목을 꿰뚫고 있는 투명한 바늘. 절대 괜찮을 리 없는 상처를 보곤 사지타가 묵묵히 대답했다.
“그럭저럭.”
– 아프다고오오오오오!!!
“병사들도 다 퇴각했어. 저 괴물이 고통으로 버둥대는 사이에 우리도 얼른 빠져나가자!!!”
카르멘의 말에 사지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멘과 사지타가 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괴물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신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 팔뚝만 한 권능의 실들이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대며 지하투기장의 모든 통로를 향해 뻗어 나갔다. 당연히 카르멘과 사지타를 향해서도.
“이, 이게 뭐야?!”
“끄아아아악!!!”
“놔! 놓으라고!!! 야!! 당장 잘라!!! 내 다리를 자르라고!!!”
투명한 실들은 다키아를 쫓아 탈출구의 입구를 뚫고 있던 일레흐의 요원들, 그 요원들이 죽인 인간의 시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관중들. 그 모두를 꿰뚫어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서걱!
새하얀 검이 하나의 실을 베어냈다. 사지타를 자신의 뒤로 내던진 카르멘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일격에 하나의 실이 베여 사라졌다. 카르멘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검을 계속 휘둘렀다.
더는 무리라고 비명을 지르는 근육들.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땀. 입고 있는 판금 갑옷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벗어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카르멘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벤다. 베고 또 벤다. 오롯이 베는 것에만 몰입한 카르멘의 검이 춤을 췄다. 쏟아지는 투명한 실들의 파편.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가 베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실들이 카르멘과 사지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콰앙!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 누더기 괴물이 마침내 천장을 부수고 대지 밖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 끼 에 에 에 에 에 에 엑!!!
누더기 괴물의 포효가 북부왕국의 수도를 울렸다.
까앙!
결국 손에 힘이 빠진 카르멘이 검을 놓친 그 순간.
대지를 박차고 검은 기사가 뛰어올랐다.
전신을 가리는 새카만 갑옷. 흑기사의 두 손에는 서로 다른 크기의 검이 쥐여져 있었다.
그가 왼손에 쥔 칠흑색 검은 지극히 평범한 크기의 롱소드였다. 반면, 오른손에 쥔 대검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거대했다.
흑기사는 족히 성인 남성 둘을 일렬로 세워둔 크기의 대검을 장난감 다루듯이 가볍게 휘둘렀다.
– 끼에에에에···.
서걱.
누더기 거인의 목이 떨어졌다. 흑기사는 자신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한 푼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내, 그의 눈에 투명한 실들에 덮쳐지는 카르멘이 보였다.
거뭇한 투구의 구멍 사이로 일렁이는 안광이 반짝였다.
‘검은 늑대’ 엔시스 발타스는 카르멘이 있는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내달려 왼손에 쥔 검, ‘송곳니’를 휘둘렀다.
닿는 모든 것을 빨아당기듯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 검이 카르멘과 사지타를 향하던 투명한 실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잘려나간 실들이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쿵.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흑기사가 면갑을 들어 올렸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선이 굵은 미남. 덥수룩한 수염이 아니었더라면 족히 이십 대로 보이고도 남을 사내를 보곤 카르멘이 반갑게 소리쳤다.
“아버지!”
엔시스는 만신창이에 가까운 카르멘과 사지타를 보곤 짧게 말했다.
“걷는 건?”
“가능합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엔시스는 둘에게서 등을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럼 가거라. 저 괴물은 내가 죽이겠다.”
그때.
콰앙!!!
폭발적인 폭음과 함께 또 하나의 괴물, 본신을 드러낸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가 누더기 괴물을 보며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 당장 내놔!!!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
스승님의 눈치를 보던 다키아가 내게 슬쩍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실 거예요? 일단 저희는 여기서 빠질까요? 어차피 성물은 이미 받았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내가 잘 해주고 있는 걸 확인한 버둥대는 호기심은 내게 미리 성물을 건넸다. 다만, 봉인을 풀면서 흘러나올 부패의 신성 때문에 아직 봉인을 해제하지는 않았지만.
‘살해!!!’
당장 성물을 들고 저 여자 몰래 도망치자는 어머니의 외침. 나는 어머니를 토닥여드리며 다키아에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줄기 목소리가 내 귓가로 파고들었다.
– 도와줘!
그건 버둥대는 호기심의 목소리였다. 오롯이 내게만 들리는.
– 제발!
“후우.”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빙그레 웃었다.
“스승님.”
내 부름에 프리디야 스승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부르니? 제자야? 드디어 나랑 돌아갈 마음이 들었니?”
“저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푸른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게 뭘 부탁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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