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6)
6 화 뚜둔!
뚜둔!
탁자 위에 놓인 푸른 잔.
교단에서 거의 방치하듯이 관리하던 성물. 그렇게까지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성화교(聖火敎)의 사제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사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성물을 훔쳐간 자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레인저에게 성물을 받아온 수습 사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인저들에게 듣기론 그 자리에서 목을 벴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사제는 다시 한동안 침묵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체는··· 어떻게 했답니까?”
“굳이 시체까지 회수할만한 여력이 없는 상황인 탓에 성물만 회수했다고 합니다.”
수습 사제의 손 위에 푸른 잔이 놓였다.
“사제님?”
“가지고 먼저 돌아가시지요. 저는 지금부터 ‘순례’를 갈 생각입니다.”
“갑자기 순례를요?”
“예.”
성화교의 푸른 불꽃, 청염(靑炎)의 사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혹시 레인저분들에게 그 도둑을 죽인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들으셨습니까?”
***
10년 전, 모든 교단에 한 가지 신탁이 내려왔다.
– 종말이 생명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이 땅 위에 떨어져 내릴 것이다.
굉장한 혼란이 잠시 찾아왔었지만 우습게도 지난 1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탓에 어떤 이들은 이 신탁이 먼 미래를 뜻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또 어떤 이들은 눈앞의 삶에 집중하라는 신의 계시라 여겼다.
***
어두운 밤. 달은 빛나고 눈들이 그 달빛을 반갑게 환영했다.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길 속에서 난.
한 손엔 여덟 명의 머리를 묶어 둔 줄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부상으로 정신을 잃은 남자를 받쳐 들고서 걷고 있었다.
“참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
‘살해!’
“시체에서 장비랑 돈을 다 털어왔어야 한다니요. 진짜로 그거 다 먹었다간 분명 나중에 금품을 탐하는 사제란 말이 나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잊지 않도록 챙겨주신 이 검 한 자루로 만족하겠습니다.”
‘살해!’
“예. 어머니 말씀대로 돈 정도는 조금 챙겼어도 괜찮았겠지요. 참으로 알뜰하십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잠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돈이 조금 궁하긴 하지만, 마음까지 궁한 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제 곁에 계시니까요.”
‘살해···!`
부패의 어머니께서 진한 감동의 여운에 잠겨계시는 사이, 나는 귀스에 다시 도착했다. 잠도 자지 않고 꾸준히 걸어온 덕이었다.
내가 귀스의 서문을 향해 다가가자 내 존재를 알아챈 경비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렁이는 횃불을 들어올리며 경비병이 소리쳤다.
“성문은 닫혔소! 밤이 늦었으니 귀스로 들어가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시오!”
나는 조금 더 걸어 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새하얀 사제복 위로 붉은 횃불의 빛이 비쳤다.
“저는 영주님의 의뢰를 받아 아침에 떠났던 용병들 중 한 명인 사제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들어가도 괜찮으나, 제 어깨 위에 있는 이 친구는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 친구만이라도 지금 들여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공손한 말에 경비병 둘이 서로 빠르게 대화를 나눴다. 둘 중 선임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아침에 출발한 용병 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제님?”
“예.”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시고 둘만 돌아오셨습니까?”
나는 줄로 엮인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거 보이십니까?”
후임으로 보이는 앳된 경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머리입니다! 사람의 머리!”
반면 선임 쪽은 침착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제님.”
나는 경비병에게 이 머리들은 도적의 것이며, 아침에 출발했던 용병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내 어깨 위에 있는 퓌에르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선임은 잠깐 고민하더니 후임에게 무어라 말해 그를 어디론가 보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안에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깨 위에 있는 환자는 많이 위급합니까?”
“조금 많이 다쳤긴 하지만, 유지(維持)의 여신께서 그를 보살펴 주시고 계시기에 잠깐 정도 기다리는 건 괜찮을 겁니다.”
실제로 퓌에르의 목숨을 붙들고 있는 건 부패의 어머니의 가호였지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장정 둘과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은 붉은 머리 아가씨가 입김을 내뱉으며 걸어왔다. 용병 길드 접수원 아가씨였다.
연녹빛 두 눈을 깜박인 여인이 재빨리 지시했다.
“빨리 환자를 받아서 의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예.”
나는 퓌에르를 건네면서 주의를 주었다.
“조금 무거울지도 모릅니다.”
덩치 큰 장정 둘은 내 경고에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손으로 퓌에르를 들고 있어서 그가 별로 안 무거울 거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둘의 표정은 내게서 퓌에르를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바뀌었다. 사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오기는 했지만, 그는 그 큰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남자였다.
“조심해서 데리고 가주십시오.”
“예.”
한결 공손해진 장정 둘이 퓌에르를 들고서 재빨리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단둘이 남은 붉은 머리 접수원 아가씨가 말했다.
“마르낙 사제님도 들어가시면 돼요. 제가 경비병분들한테 이미 허락을 구해뒀답니다.”
“감사합니다.”
서문을 거쳐 귀스로 들어서자 접수원 아가씨가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사제님은 그렇게 안 봤는데, 힘이 엄청나게 장사시네요?”
“제가 조금 힘이 세긴 합니다.”
“손에 들고 계신 그 머리들이 이번 사건의 범인들이라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사제님이 그 머리를 직접 보관하는 것보다 저희 용병 길드에서 머리를 보관하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애초에 이 머리들에게 미련 따윈 없었다. 나야 이 머리를 주고 은화 스물아홉 닢만 받아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접수원 아가씨가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용병 길드까지 데려다주실래요? 아무래도 밤길이 어두워서 혼자 가긴 조금 무섭거든요.”
환히 웃는 저 고운 얼굴 어디에도 두려움이란 감정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그러겠습니다.”
‘살해!’
나는 버둥대는 어머니의 손을 살살 두드려주며 걸음을 옮겼다.
***
자기 이름은 에린이라고 소개한 접수원 아가씨는 오는 내내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제님은 검도 잘 쓰시는 거냐, 오늘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머리들을 수배지랑 대조해 보면 혹시 모를 추가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등등.
추위로 달아오른 붉은 볼이 둥실둥실 움직여댔다. 부패의 어머니께선 끊임없이 내 가슴주머니 속에서 꿈틀대셨고.
‘살해! 살해!’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마르낙 사제님!”
에린은 밝게 웃으며 내게서 머리통을 엮은 줄을 건네받았다. 고운 아가씨와 줄줄이 엮인 머리라. 뭔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지만, 이 세계에선 그다지 이상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서 잔다. 어제 잤던 곳에 빈방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제님.”
“네?”
“혹시 주무실 곳은 있으세요?”
“지금부터 찾을 예정입니다. 이 큰 도시에 절 위한 빈방 하나쯤은 있지 않겠습니까?”
동화 구십 닢 예산 안에서 잡을 수 있는 그런 방이.
“이 추운 새벽에 방 찾으러 돌아다니려면 굉장히 힘드실 텐데요.”
에린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혹시 사제님만 괜찮으시면 자고 가실래요?”
두근.
가슴이 뛰었다.
‘살해!!!’
어머니의 손도 격렬하게 꿈틀댔다.
***
‘살해!’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고 있었기에 냉큼 승낙한 겁니다. 어머니. 그 붉은 머리가 참하게 어울리는 접수원 아가씨를 향한 흑심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정말로요.”
아쉽게도 에린의 권유는 정말 순수한 의미였다. 용병 길드에는 손님용 객실이 몇 준비되어 있었고, 에린은 내게 그 방 중 하나를 빌려주었다.
나는 잔뜩 심통 나신 어머니를 달래기 위한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꾸욱. 꾸욱.
말라비틀어진 어머니의 손을 꺼내서 꾹꾹 마사지를 해주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노곤하게 녹아들어 갔다.
‘ㅅ…ㅏ…ㄹ…ㅎ…ㅐ…’
똑똑.
갑작스러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나는 재빨리 어머니의 손을 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문앞에 서 있는 건 접수원 아가씨 에린이었다.
“어쩐 일로···?”
에린은 두 눈을 천천히 끔벅이고는 품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사제복을 입고 주무시면 불편하실 거 같아서 남는 옷을 가져왔어요. 혹시 제가 주무시려던 걸 깨운 건가요?”
나는 바구니를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편하게 잘 수 있겠군요.”
“다행이다. 그럼 푹 주무시고 일어나셔서 제가 이번 일과 관련된 서류를 작성하는 걸 좀 도와주세요. 아무래도 멀쩡하신 분이 사제님 혼자라 사제님이 직접 설명해주셔야 하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그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에린이 문을 닫고 떠나갔다. 나는 입고 있던 사제복을 벗고 그녀가 전해준 남자 옷을 입었다. 옷은 통이 아주 커서 헐렁했다.
벗은 사제복을 곱게 접어서 머리맡에 두었다. 이 사제복에 그 어떤 전투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건 진짜 유지(維持)의 여신의 가호가 담긴 사제복이었으니까. 이 옷은 쉽게 말하면 자동수복이 되는 옷이었다. 원래 이 옷은 유지의 여신을 믿는 사제가 아닌 이들이 입으면 그 가호가 발동되지 않지만, 나는 예외였다.
부패의 사제인 나는 그 어떤 사제로도 위장할 수 있도록 다른 신들의 가호가 담긴 물건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부패의 어머니의 배려.
‘살해!’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전 제가 어머니의 손을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는 걸 안 잊었습니다.”
다시금 손을 꾹꾹 눌러드리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푹 녹아들어 갔다.
‘ㅅ…ㅏ…ㄹ…ㅎ…ㅐ…’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문을 열자 풍성한 붉은 머리가 날 반겼다. 에린은 살짝 미안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푹 주무시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일어나셔야만 하는 일이 생겨서요.”
어차피 곧 일어날 시간이었다. 지금의 몸은 그다지 많은 수면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영주님이 사제님을 보고 싶어 하세요.”
영주가? 갑자기? 난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영주님께서 말입니까?”
“예.”
“혹시 어떤 일 때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에린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번에 죽은 갈라드. 그는 전대 영주의 사생아였다. 그 말은 즉, 지금 이 귀스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인 트레돈 필리안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말과 동일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이유는 그거 하나뿐이에요. 그런데 이상해요. 저는 영주님께서 갈라드 아저씨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일단 옷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네.”
사제복을 입고 나온 나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경비병들과 함께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
호리호리한 체구. 무미건조해 보이는 얼굴.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 바로 귀스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 트레돈 필리안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리 생각해둔 수많은 대처 방법들을 잊어버렸다.
내 가슴 속 주머니에 있는 어머니가 영주를 보자마자 검지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X’자를 그리셨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으로 판단하지 않는 생물. 그중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트레돈 필리안. 그는 악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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