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7)
7 화 트레돈 필리안.
트레돈 필리안.
세계의 찌꺼기. 방황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악. 그들의 비극을 씹어 삼키며 막힌 목을 눈물로 적시는 부정한 것. 등등.
세간에서 악마를 수식하는 부정한 말들을 알아보자면 그들을 가리키는 멸칭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트레돈 필리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 트레돈은 자신이 불렀음에도 느긋하게 내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존경하는 트레돈 영주님. 송구스럽지만 영주님께 자그마한 부탁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하라.”
“단둘이 독대를 하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악마의 정체를 알아도 악마는 날 알아볼 수 없다. 부패의 신성이란 세계의 공적이란 수식어 걸맞게 아주 은밀한 것이었으니까.
트레돈은 우묵한 눈빛으로 날 한참이나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라.”
명을 들은 하인들과 기사 둘이 자리를 비웠다. 이윽고, 영주와 둘만 남게 된 나는 본론을 꺼냈다.
“인간에 빙의해서 하는 영주 생활은 재밌으십니까? 악마분.”
네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는 직설적인 말. 트레돈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얼굴의 근육을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둥실둥실 춤을 추며, 냉막했던 분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은 악마가 말했다.
“이거 죽은 갈라드 덕분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군요.”
싱긋 눈웃음 지은 악마는 대놓고 내 모습을 위아래로 핥듯이 훑었다. 지극히 무례하고 경박한 태도. 하지만 그 속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절 한눈에 알아보신 걸 보면 아무래도 ‘유지(維持)’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분은 아닌듯합니다만?”
악마는 대부분의 교단이 적대하는 존재. 옛말에 이르길 적의 적은 나의 친구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부패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악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오. 이미 다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는 부패의 아들이 있었군요. 이거 귀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기어다니는 기다림’이라고 합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부패의 어머니를 모시는 사제, 마르낙이라고 합니다.”
빙그레 웃은 악마, ‘기어다니는 기다림’은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편하게 앉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여긴 저희 둘밖에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사제와 이렇게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다니. 진정으로 오랜만입니다.”
사실, 악마들은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조차. 그들의 관심은 오롯이 지성이 있는 생명체를 향하고 있었기에.
악마란 태어나길 누구보다도 강대하게 태어나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취할 수 없는 무적자(無籍者)들. 세계에 속하지 못한 그들이 세계에 속한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지성체들과 정당한 거래를 통해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악마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지성체들을 사랑했다.
악마들은 지성체와 거래를 하며 그들의 삶에 과몰입하는 걸 즐기는 흥 많은 관객이자 말 많은 독자였다.
더없이 강력한 힘을 타고난 악마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르며 한계가 분명 했으나, 연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본 악마는 전능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신들은 악마를 꺼리고 경계했다.
악마와의 거래의 대가는 언제나 원하는 것의 크기와 정비례 하나, 신앙의 크기와 신들이 내리는 은총은 비례하지 않았으니까.
신들은 주는 만큼 대가를 돌려주는 악마들에게 신도들과 다른 지성체들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 결국, 그들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빼 들고 모든 지성체들에게 천명했다.
– 지금부터 그 부정한 것들의 이름은 악마(惡魔)이며 그들은 명백한 악(惡)이다!
악마들은 갑작스러운 신들의 적대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악마(惡魔)라 칭하고 다녔다. 고맙게도 소개하기 쉽게 이름 붙여줬다고 기뻐하면서.
그리고 명백한 악(惡)을 향한 사제들의 악마사냥이 시작되었다.
내가 악마에 대한 정보를 왜이리 잘 아느냐하는 문제의 답은 아주 간단했다.
정체를 들킨다면 모두에게 핍박받는 ‘악마계약자’는 지극히 난이도가 높고 모두가 꺼리는 플레이 방식이었고, 내가 ‘부패의 사제’ 다음으로 플레이하려고 점 찍어둔 직업이었다. 게임 속으로 떨어진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가슴주머니 속 어머니의 손이 심심하다는 듯이 꿈틀댔다.
‘살해.’
심드렁한 목소리. 우리 부패의 어머니께서는 다른 신들과 달리, 악마란 존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셨다. 나는 가슴주머니를 톡톡 두드려 어머니를 달래며 악마에게 말했다.
“몇 년째 빙의 중이신 겁니까?”
악마 영주는 한 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숫자를 세더니 활짝 웃었다.
“올해로 딱 마흔 번째 겨울을 맞는군요! 하하하! 이거 사제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기념비적인 한 해를 깜박 지나칠 뻔했습니다. 이거 싸늘한 도시에 온기가 돌도록 신나는 축제라도 한 번 열어야겠군요! 아무래도 지금 맡고 있는 역할이 역할인지라 다 벗어던지고 신나게 직접 놀 수는 없겠지만요!”
‘기어다니는 기다림’은 이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이것저것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올해 귀스의 예산이 얼마나 남았더라··· 으음. 조금 빠듯하긴 한데, 내가 좀 보태면 충분히 닷새 동안은 도시가 놀고 먹을 수 있겠네. 좋아. 아주 좋아! 완벽해!”
혼자 말하고 혼자 계산을 끝마친 악마가 박수를 짝하고 쳤다.
“사제님도 많이 바쁘신 게 아니라면 축제를 즐기다 가시면 좋겠습니다! 분명 아주 즐거울 거예요! 하하하!”
호의가 가득한 웃음 터뜨린 악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절 찾아오셨습니까?”
“저는 그쪽이 부르셔서 찾아왔습니다만···?”
자신의 이마를 탁하고 친 악마가 크게 웃었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하하하! 죄송합니다. 사제님. 오랜만에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를 만났다 보니 제가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이거 사과드리지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거 부패의 아들께서는 훤하신 얼굴만큼이나 넉넉한 인품을 지니셨군요!”
‘살해!’
악마의 직설적인 내 칭찬에 뭘 좀 안다는 듯이 부패의 어머니께서 기꺼워하셨다.
“사실,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갈라드. 그 친구가 어떻게 죽게 된 건지, 목격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사제님을 부른 거였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게 갈라드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더군다나 사례까지 해준다면. 나는 악마에게 갈라드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악마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제 하나뿐인 동생이 그렇게 가버리다니. 그러게 내가 용병 일은 무척이나 위험하니 몇 번이나 그만두라고 말했건만. 쯧. 아, 동생이란 건 이 몸을 기준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나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딱히 특별한 장식들이 없는 방에서 영주의 검소함이 엿보였다.
검소하고 배다른 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악마 영주라. 재미있네.
따뜻한 방안에서 나는 조금 편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나저나 그 몸의 원래 주인이 계약자입니까?”
내가 묻자 악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답했다.
“하하하! 이거 제 이야기가 궁금하신가 보군요! 제 사연쯤이야 얼마든지 이야기해드릴 수 있죠! 이야기란 것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감칠맛을 더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악마가 두런두런 시작한 사연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악마 계약자는 트레돈의 아버지 되는 전대 영주로, 그는 어느 날 마주친 한 여인을 지독하게 원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이미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었고, 전대 영주는 그 여인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애타게 원했다. 결국, 그는 악마를 불러내서 자신의 욕망을 내뱉었다.
– 그녀를! 그녀의 마음을 내게 주시오! 뭐든 내주겠소!
악마는 자신을 불러낸 전대 영주에게 더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 뭐든 줄 필요는 없고. 네가 원하는 만큼만 내게 주면 돼.
– 무엇을 원하시오! ‘기어다니는 기다림’이여!
천천히 서로 다른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인 악마가 웃었다.
– 하나의 인생을 망치게 하려면 또 다른 하나가 필요하지. 네 열다섯 먹은 아들, 그 아들의 삶을 내게 준다면, 그 여자의 삶을 네게 줄게.
욕망에 집어 먹힌 전대 영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아들을 악마에게 팔아넘겼다. 악마는 받은 만큼 확실하게 그에게 내주었다. 그렇게 여인은 전대 영주의 내연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연녀와 영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갈라드라는 게 악마의 이야기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갈라드는 제가 만들어낸 자식이나 다름없어서 잘 챙겨주려고 늘 노력했습니다만, 사생아라는 자신의 출신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동생은 결국 집을 박차고 나가서 용병 일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번 겨울, 동생이 일이 없어서 곤란해 하기에, 몰래 일거리를 챙겨주려던 게 동생을 죽음으로 이끌 줄이야. 역시 인생이란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악마는 빙그레 웃었다. 더없이 즐겁게.
“그렇기에 더욱 가슴 뛰는 거지만 말이죠! 그나저나 슬슬 저도 영주로서 업무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마음 같아선 사제님한테 제 이야기를 좀 더 해드리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죠! 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친우의 방문이란 언제나 반가운 법이니까요!”
어느새 나는 악마의 친구가 되어있었다. 살가운 악마 영주는 내게 잘 놀아준 보수랍시고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얼마 못 넣어서 부끄럽습니다만, 챙겨가시면 작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럼 편히 돌아가십시오! 사제님!”
나는 영주의 저택을 나선 뒤에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반짝이는 황금 동전 두 닢이 들어있었다. 은화 이백 닢어치의 동전.
“와오!”
‘살해!’
“어허. 어머니. 영주님은 참으로 옳게 된 분이십니다. 영주가 금품으로 절 유혹하려는 거라니요. 이 금화에는 순수한 호의가 가득합니다.”
부패의 어머니께서는 제 아들에게 금화를 내려주실 재주가 없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악마 영주에 대한 진한 질투심을 드러내셨다.
‘살해!’
“금품을 탐하는 사제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금화는 썩지 않습니다.”
‘살해!!!’
“어머니. 화내지 말고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지요. 말이란 건 원래 뒤에 오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금화만큼이나 절대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살해?’
“바로 어머니를 향한 제 마음입니다.”
‘살해…!’
밀려오는 감동. 부패의 어머니께서는 진한 여운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셨다.
“저는 언제나 어머니가 가장 첫 번째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나는 꾸물거리는 가슴주머니를 토닥이며 용병 길드로 향했다. 금화 두 닢과 함께.
***
반짝이며 햇빛을 튕겨내는 새하얀 갑옷, 등에 메여진 거대한 망치와 새하얀 저울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망토. 허리춤에는 만일 대비한 검 한 자루.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도륙 낼 준비를 끝마친 교화교(敎化敎)의 사제 셋이 용병 길드 안에서 에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용병 길드로 들어온 걸 확인한 에린이 환히 웃으며 손짓했다.
“어, 오셨어요? 마르낙 사제님! 여기 교화교 사제님들이랑 인사 나누세요!”
친근한 인사는 무척이나 반갑지만, 저 광신도 친구들이랑은 안면을 트고 싶지 않은데.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경건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서 교화교의 사제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매일의 삶을 수호하는 유지(維持)의 여신님을 모시는 사제. 마르낙입니다.”
교화교의 사제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살해!!!!!’
어머니께서 그들 중 하나가 12개 남은 성물(聖物) 중 하나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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